영국 런던의 금융가에는 세계 최고의 옛 증권거래소가 있다. 그 건물 전면에는 라틴어로 Dictum Meum Pactum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내가 한 말은 곧 보증수표’라는 뜻이다. 철저한 신용과 단단한 신의가 금융의 생명임을 말해준다. 노아는 하나님이 아직 보이지 않는 일, 즉 아직 명백하지도 않는 홍수 경고를 하실 때 신뢰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증수표처럼 받아들였다. 믿음으로 접수하였다. 홍수 경고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경고하신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창 6:9). 노아는 아벨과 같이 의로운 사람이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노아가 방주를 제작하게 된 것은 사람의 조언이나 직감에 의해 행동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확신을 가져다 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직 보이지 않는 일’, 즉 눈에 보이는 징조도 없고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다.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을 때 믿음에 의해 움직여졌다.
예전에는 ‘가을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이다. 맑고 높은 가을 하늘에 말도 살을 찌우니, 등불을 가까이해서 책 읽으라는 권유다. 북방 변경 중국인들은 달리 생각한다. “하늘은 높아 푸르고 말이 살찔 때가 가장 두려워! 언제 흉노가 쳐들어올지 모르니까”라고 푸념하였다. 천고마비는 여기에서 유래됐다. 가을은 유목민족들이 살이 오른 말을 몰고서 농경민족의 영토로 쳐들어오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따라서 평화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일종의 공습경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사서 ‘한서(漢書)’에 나오는 말이다. 원래는 오랑캐에 대한 대비를 촉구하는 의미였다. 노아가 방주를 준비한 결정적인 이유는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다.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다. 감각으로 그것의 징조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고 해도, 미래 일의 전조로서 보여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때까지 보지 못한 일이다.
1.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일을 준비하다
노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아 눈으로 볼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의지하고 그것을 확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아는 보이지 않는 것들과 미래에 대한 믿음의 전형적인 예를 제시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종말론적 축복이라기보다는 심판의 위협이다. 노아의 홍수 발생 전에 반응해야 했듯이,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눈으로 인지할 수 없는 심판에 대한 경고에 근거하여 행동해야 한다. 노아의 믿음은 옳다고 입증된 반면, 하나님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세상은 멸망했다. 베드로전서 3:20에서는 방주를 짓고 있던 기간은 하나님의 인내의 기간이자 회개의 기회로 간주되고 있다. 노아가 120년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의를 선포하였다. 노아는 의인이였으며, 믿음을 좇는 의를 가지고 있었다. 경건하지 않는 세대에 ‘의를 전파한 자’였다. 그의 의의 설교는 결과에서 보여주다시피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다. 그 시대 상황이 창세기의 기사에서 생생하게 서술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런 배경 하에서 노아의 믿음이 시험을 당하고 환경을 극복하였던 것이다.
노아에게 ‘보이지 않는 일’은 임박한 홍수였다. 그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에 실제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것은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에 놓여 있었다. 노아는 미래를 마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을 마치 이미 발생하기를 시작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기에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약속한 실제가 나타날 환경이 이미 시작된 것으로 여겼다. 노아는 온 천지의 모든 생명체를 멸망시키는 홍수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 하지만 전혀 본 적조차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믿었다. 믿음은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다.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그것들이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무한 정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정보를 ‘선택 삭제→편집→취향에 맞는 정보의 재구성’을 한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창조한다. 그 만들어진 틀로 대상을 바라본다. 열성적인 숭배를 보내기도 하고 과감하게 삭제하기도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은 실수다. 정보뿐 아니라 소음에 가까운 메시지까지 정보의 좌판에 널려 있어 입맛대로 골라잡고 광범위하게 퍼나를 수 있는 환경에서 편향은 위험하다. 이렇게 각자 필요한 자극이나 정보만 받아들이다 보니 정작 핵심은 놓쳐 버릴 수 있다. 이를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 한다. 앞으로 될 일을 스스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 주셔야 우리는 비로소 바로 볼 수 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과 마음과 귀를 열어 주시면, 우리의 이성과 상식과 경험 이상의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 노아는 의의 상속자다
노아는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다. 노아는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의로웠다(창 6:9; 7:1). 그러나 여기서는 ‘의’가 신실한 자들이 상속받는 하나님의 호의적 심판을 보여주는 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아를 의인으로 성경에 묘사함은 믿음의 측면 하에서 적용된다. 노아는 믿음의 온전한 분량으로 하나님께 반응했다. 이것은 그가 의인이었다는 성경의 증거를 설명한다. 창세기 7:1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노아가 방주를 다 건조한 것을 보고 ‘의로움’을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분명 그의 믿음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노아는 ‘믿음을 따라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대장동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유행한 인사말이다. “화천대유(火天大有) 하세요.” 하늘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으라는 뜻이다. 주역 64괘 중 최상의 점괘라고 한다. 노아가 의를 상속한 것은 점괘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다 준행하였다. 에녹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해서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저자는 노아가 믿음의 범주에서 의로운 자였다는 전승과 관련짓는다. 알 수 없는 미래와 관련한 엄중한 경고에 대해 노아는 믿음으로 다 준행한다. 믿음의 반응으로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상속자’는 히브리서에서 두 번 나온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을 의미한다. 아들과 관련하여, 약속의 상속자들과 관련하여 나온다. 노아의 경우에 이 의는 미래적이지 않다. 현재적이다. 실제로 그는 구약성경에서 의롭다고 특별하게 묘사된 최초의 사람이다(창 6:9). 노아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가 결코 범죄한 죄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노아가 지은 죄가 있다(창 9:20-21). 하나님께서 노아를 의롭다 하신 것은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며 말씀을 준행했다는 의미다.
노아는 상속자로 묘사함은 홍수 이전의 믿음의 연대기와 홍수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한 응답의 계속된 계도 간의 연결을 구축한다.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함께 받는 상속자’로 묘사된다. ‘못된 자식들은 상속을 받을 자격이 없고, 착하고 근면한 자식들은 상속이 필요 없다.' 중국 속담이다. 노아는 착하거나 성실해서 의의 상속자가 된 것이 아니다. 믿음은 노아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약속을 받은 아들이다. 따라서 믿음에 의해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은 혈육에 의한 자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자가 되는 것에 의해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들이 된다. 약속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약속을 넘겨받아 약속에 도달할 약속의 상속자들이다. 그리스도가 상속자라면, 그의 백성들은 공동상속자다.
상속이란 사람이 죽었을 경우 그가 살아 있을 때의 재산상의 지위가 법률의 규정에 따라 특정인에게 포괄적으로 승계되는 것을 말한다. 죽은 사람을 피상속인,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을 상속인이라 한다. 따라서 상속의 피상속인의 죽음을 원인으로 개시된다. 상속은 그 내용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 상속하는 자에게 있다. 믿음을 따른 의는 획득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롭다하신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주시는 것이다. 근거는 믿음이다(롬 4:16). 상속은 선물이다. 은혜다.
노아가 의의 상속자가 된 것은 죽음이 아니라 믿음이다. 노아는 언제 ‘의’를 상속받는가. 현재인가. 미래인가. 전자는 홍수 후의 세상이다. 소위 정결하게 되고 회복된 세상이다. 후자라면 마지막 날에 온전히 누릴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 ‘의로운 자’라 여김을 받았다. 의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기업(企業)’의 ‘기(企)’자는 사람 인(人)에 그칠 지(止)이다. 사람이 멈춰 서서 멀리 바라보는 모습이 ‘기(企)’다. 50년 혹은 100년 후에 어떤 사업이 국가와 사회에 공헌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시작한 사업이 바로 ‘기업’이라는 것이다. 노아가 상속받은 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제공한 유산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유일한 상속자로 지정하셨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즉 믿음에 의해 그러한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상속자다. 그와 하나되지 않고 받을 수 있는 유산은 전혀 없는 셈이다. 믿음으로 의의 상속자가 된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할 것이다.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소유가 된 것은 정부에 의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땅 전체가 이스라엘에게 할당되었을 때, 부족, 친척, 가족들에게 개별적인 몫이 할당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업이다(신 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