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설교, 문철영목사, "계명에도 우선순위가?"

  • 입력 2021.11.0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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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도 성령강림절 스물다섯번째 주간

1. 계명에도 우선순위가?(막 12:28-34)


  성전 뜰에서 사두개인들과 변론에서 성공적으로 답변하는 예수님을 지켜 본 율법학자의 한 사람 서기관이 예수님 앞에 질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앞전에 예수님이 대답 잘 하는 것을 보고 유대의 율법 학자의 명운을 걸고 서기관은 예수님을 한방에 쓰러뜨리겠다는 결의에 차 있습니다. “계명 중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여유있게 대답을 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예상 이외로 답하는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서 서기관은 당황하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십년간 율법을 연구해온 학자의 양심에서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대답에 대하여 부정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할 명질문을 가지고 온 그였지만 그 마음에서 감탄의 소리가 터져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이어서 그는 예수님의 답변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이유에 대한 자신의 주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님에게서 흠집을 잡으려는 의도와 목적으로 가지고 질문을 가지고 왔던 유대인 종교지도자 서기관은 그가 원하는 흠집을 잡기는커녕 옳다고 하고 긍정의 코멘트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서 의도한 대로 흠있는 대답을 하기보다 그가 옳소이다라고 할 만큼 감동을 받을 수 있기까지 예수님의 답변이 탁월하게 들렸던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대답이었기에 그를 잡으려던 사람이 가까운 친구같이 대화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는가?
오늘 예수님과 서기관의 대화만 보고서는 그 당시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평면적으로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장소는 성전 뜰이며 조금 있으면 십자가에서 처형될 것을 예수님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질문자도 예수님이 처형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백성들에게 납득이 될 만한 죄목을 붙잡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답변하는 말만 가지고 칭찬하기 어렵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언행의 일치가 안되면 듣는 자의 마음을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서기관이 탄복을 하면서 예수님의 답변에 칭찬한다면 어떤 경우였을까?
오늘 예수님을 서기관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요? 십계명을 에워싸고 울타리율법을 613개의 계명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 계명의 하나라도 어겨서는 안 되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고 가르치는 연구하는 지도자를 나라는 관리로 두었습니다. 그들이 율법학자들이고 바리새인 그룹에 든 사람들입니다. 이 중 서기관들은 회당에서 관직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일렬로 순서를 매겨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계명의 배열합니다. 613번에서 1번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이 질문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듣고자 하는 대답의 내용은 무엇인가? 여기 1번의 계명이 무엇인가? 1번을 이야기하다 보면 나머지를 무시해야 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나머지를 어기면 계명을 어기는 모순을 범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입으로 이같은 대답을 하게 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예수님에게 돌려 법정에 고발할 여지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을 하였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첫째 계명을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하신 말씀은 신명기의 쉐마 말씀이었습니다. 첫째는 순서 중에 하나의 계명이 아니라 오늘 모든 계명의 기초가 되는 계명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계명을 지키기 위한 가장 바탕이 되는 기초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기초는 이것이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곧 너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하나님은 오직 이 세상에 한분 최고의 신이요 우주만물의 근원자요 창조주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권세자요 주권자요 왕중 왕이요 신들 중 최고의 신이라는 말입니다.
우주의 근원 생명의 근원 우리 활동의 기반이 되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이 사랑이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부터 움직여 하는 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바로 앞에 두고 서 있습니다. “마음, 목숨, 뜻, 그리고 힘을 다하여”라는 목숨이 끝날 때까지 마음이 무너질 때 힘이 다 소진할 때까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가? 모든 존재의 근본 우리의 생명의 기초가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호흡하고 활동하는 것이 내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을 아는 자가 감사로 서있게 되는 것입니다.
서기관이 크게 탄복을 합니다. 그도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필요를 느끼는 존재로서 서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은 감사와 사랑 그리고 흔들림 없는 신앙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언하고 그 말씀의 첫째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몸을 드리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부의 원리(막 12:38-44) 


  성전에서 헌금함에서 헌금하는 사람들을 눈여겨 본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놓고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은 가난한 과부가 많은 돈을 넣은 부자들 보다 헌금함에 더 많이 넣었다고 하였습니다. 근로자의 일당을 10만원으로 계산할 때에 두렙돈은 약 1562원입니다(1데나리온=16앗사리온=128렙돈, 4고드란트=1 앗사리온=8렙돈). 헌금함에 약 1,500원의 헌금을 하고 있는 과부가 수 십만원의 헌금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헌금함에 넣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오늘날 우리의 경제논리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논리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있었던 제자들은 아마도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 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그들은 풍족한 중에서 넣었고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헌금함에 넣는 돈의 크기는 세상의 돈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헌금하는 사람의 재산의 크기에 비례하여 헌금의 많고 작음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넉넉한 생활을 하면서 재산의 아주 적은 부분을 헌금한 것은 액수는 많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큰 금액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과부가 가난한 생활을 하는 중에 생활비에 어떤 여분도 남겨두지 못한 채 전부를 헌금하는 것이 2렙돈 밖에 적은 액수의 금액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큰 금액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활비 전부에 해당하는 두 렙돈을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강조적으로 말하는가? 가난한 과부의 모습은 장차 십자가에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몸을 드릴 예수님 자신을 미리 비추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금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신은 세상의 부의 논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의 부의 기준이 아니라 개개인의 마음과 믿음에 따라 그 무게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달아보기 때문입니다.


3. 인간의 노력의 한계(시 127편)


  고대로부터 우리 인간들은 생존을 위한 인간적인 활동을 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수고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선에 군인들을 보초병으로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호받으며 생존해 있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 활동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데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우리의 인간적 활동의 수고가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안보와 경제생활 그리고 건강생활을 위해서 우리의 인간적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수고와 노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 안에서 우리 인간의 활동을 하나님이 사용해 주실 때 생존과 번영의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생명의 활동과 번영을 우리의 자랑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 덕분인 것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물질, 건강 그리고 활동이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헛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4.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결정(룻 3:1-5 4:13-17)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상식적인 논리는 착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착하지도 않고 기만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복을 받은 사례가 많습니다. 야곱은 장자가 아닌데도 기만적인 행동으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오늘 본문에서 나오미는 룻으로 하여금 기만적인 전략으로 보아스의 잠자리에 눕게 하였습니다. 결국 보아스와 혼인하게 된 룻은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조상이 되는 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기만적인 야곱과 시어머니 기만전술에 따라 보아스의 발치에 잠잤던 룻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사람을 축복하실 때에는 선하게 보이지 않은 인간의 활동까지도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룻이 어떻게 복을 받게 되었는가? 먼저 룻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난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친정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벗들을 버리고 외국땅 유다 베들레헴까지 따라왔습니다. 이방 여인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섬기며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각오와 신앙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순종했습니다. 고국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늙고 가난한 과부 나오미는 만나는 동네 사람들과 친족들에게 룻을 칭찬했습니다. 현숙한 여인이며 경건한 야웨 신앙의 소유자 룻에 소문이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간 밭의 주인 보아스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룻은 결정할 중대한 일이 있을 때에 항상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의논하고 시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2:1, 3:5).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룻3:5).
야곱이 이삭으로부터 받게 될 복을 받는 정보를 전달하는 리브가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것처럼 룻은 그에게 복의 정보를 전달하는 시어미 나오미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같은 인간의 활동의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1, 2).

 

5. 죽음 후의 심판(히 9:24-28)


  히브리서는 구약의 옛 제사 제도와 새로운 제사 제도의 비교를 통해서 새 제도의 탁월성을 입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매년 속죄일에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대제사장은 속죄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갑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두루마리와 장막의 모든 성물들과 온 백성들에게 피를 뿌림으로써 모든 물건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제사 제도에서 매년 속죄물의 피를 가지고서 대제사장은 매년 속죄소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속죄물로서 단번에 피 흘리심으로 하늘에 들어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계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두 번째로 나타나실 때에는 죄와 상관없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 대제사장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반면에 우리 사람들은 반드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기다리는 심판대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 건너편 우리가 서야할 심판대에는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믿음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자들은 심판을 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에서 사는 동안 심판대 앞에 설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입니다. 그 준비를 위해 우리는 믿음가운데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생활과 기도와 예배와 섬기는 생활을 성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27-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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