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설교, 문철영목사, "어린아이가 먼저 천국에"

  • 입력 2021.09.28 14:56
  • 수정 2021.09.30 02:59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1년도 성령강림절 20째 주간

 

1. 어린아이가 먼저 천국에(막 10:13-16)


  오늘 예수님은 당신 앞에 오는 사람이 만사형통이 아니라 불통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 앞에 질문하고 있는 바리새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답답해 하는가요? 질문은 하는데 왜 하는가요? 시험하려고 질문합니다. 테스트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덫에 걸어 넘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 올 때 설교 들으면서 목사님 알아맞히기 어려운 질문하러 오는 사람 있습니까?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그러면 선생님이 힘들 것입니다. 오늘 질문은 교묘합니다. 법정에 집어넣으려고 고발거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만사형통의 길로 가는가? 아니면 불통의 길로 가는가? 그들은 불통의 길을 갑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그 결과로 국가적인 재난을 당합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새롭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기들의 목적대로 이용하기 위하여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사형통의 길을 가르쳐 주려고 온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만사형통의 모델입니다. 그들이 제자들에게 야단맞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에게 오려는 아이들을 데려오는 부모를 제자들이 꾸지람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만짐을 당하려고 온 것입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는 예수님께서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요? 인자하고 화내지 않는 모습입니다. 오늘 성격 나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화를 내십니다. 14절에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노하신다는 것은 분노한다는 것입니다. 왜 화를 내시는가요? 어린아이들 오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아이들은 힘도 없습니다. 아이들이 가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헌금을 하겠어요? 봉사를 하겠어요? 어른 눈에는 그들이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해 아이들을 필요로 합니다. 이들이 장차 미래에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선 그들은 마음이 단단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가르침의 활동이 법에 걸리는 것인지 아닌지 지적하는 것을 일로 삼습니다. 그들은 불통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오늘 누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고요? 어린아이입니다. 가치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달려듭니다. 모두 가 다 머릿속에서 돈 계산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몰라보기 때문에 그렇게 대우한 것입니다. 예) 가치를 모르면 돈도 아무데나 던져버립니다. 우리나라 돈 100만원을 봉투에 두었는데 어디 갔다 오니 돈이 없어진 것입니다. 두 살짜리 아이가 엄마가 하는 것을 평소에 지켜보았다가 엄마가 없는 사이에 그것을 파쇄기에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미국사람은 웃깁니다. 그 돈을 복원시킨답니다. 약 5개월-3년 걸려 복원한답니다. 가치를 모르니까 아이는 그 돈을 장난삼아 파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이 만사형통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잡으려는데 만 혈안이 되었습니다. 예화) 가치를 모르다가 나중에 가치를 발견한 사람의 사례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에게 전에 농장을 사면서 들어온 집 문지방에 못생긴 돌이 박혀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변에 운석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혹시나 하고 전문가를 데려다가 문지방 밑에 놓인 돌을 진단해 보았더니 그것이 1억 1000만원어치의 가치가 나가는 운석이었습니다. 그는 30년 동안 그것이 그렇게 값비싼 운석인줄도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믿고 예배하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십년 교회를 다녀도 그 가치를 모르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깨닫는 순간에 우리가 무심코 다니는 교회 예배 자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지 알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부터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 앞에서 와서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그 신비가 깨달아질 때에 교회를 찾게 됩니다. 12해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에게서 신비를 느끼고서 예수님의 옷에라도 손대면 치료될 줄 믿고 터치하여 치료받은 것입니다. 만사형통의 비밀이 어디에 숨어 있는가? 어린아이에게 있습니다. 아이들이 졸라대니까 부모가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온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은 손주 앞에 잡히면 꼼짝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손을 붙잡은 손주가 마트를 향하여 손가락질 한답니다. 그 때 장로님이 “나 돈 없는데”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때 손주 하는 말 “할아버지 카드 카드”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예수님 흠집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달려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누구입니까? 마음판에 아무 것도 칠해지지 않은 백지입니다. 마음판이 깨끗합니다. 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표현합니다. 순수함이 있습니다. 그 순수함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왜 오지 않는가? 그것이 굴절되어서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리저리로 판단하다 보니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않고서는 천국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배 오는 자는 설교자의 외모에 신경 쓰기보다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단순히 믿는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예수이름으로 기도하면 치료가 됩니다. 예수이름으로 명하면 귀신이 나갑니다. 중요한 것은 믿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단순해야 합니다. 치료 기적은 믿음을 받아들이고 믿어져야 일어납니다. 어린아이는 그렇게 믿습니다. 왜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까? 우리 몸이 나이 들면 몸의 흡수력이 약해 집니다. 소화력이 떨어집니다. 나무들 고목을 보면 죽어갑니다. 뿌리에서 흡수력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어린 나무들은 힘차게 뻗어갑니다.
아는 것이 많은 게 좋은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고목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개척하는 일, 사람 모으는 일 이제 잘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고목이 된 것 같습니다. 애들의 눈에는 제는 이제 할아버지인 것입니다. 아직 마음은 청춘인데. 머리는 커지고 아는 것은 좀더 많아진 것 같은데 문제는 열정이 식어졌다는 것입니다.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가? 신비감이 있을 때 열정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모자랄 때에는 알고 싶은 열정이 나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있습니다. 머리 속을 가급적이면 비워두는 것이 좋습니다. 머리가 늘 가득 차 있으면 고목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어린아이처럼 신비감으로 가득차시기를 바랍니다. 태풍은 만나지 않아도 태풍만난 것처럼 새로워 질 필요가 있습니다. 씨를 뿌리기 전에 밭을 갈아엎듯이 우리 마음을 갈아엎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 때에 우리 마음이 순수해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태풍을 만나지 않아도 마음으로 갈아엎음으로써 새로워지는 경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갈아엎어야 예배와 설교에서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2. 고난을 이해하시는 분(성경 히 1:1-4, 2:5-12)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로 인해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글입니다. 히브리서가 독자들에게서 관심을 끌고 있는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능가하는 분입니다(1-4절). 그리스도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세력들보다 으뜸이 되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환난 때에 굳게 붙잡아야 할 신앙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 되었던 주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모든 세력들을 능가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여행하는 동일한 여행길을 완주한 분”(William Loader) 으로서 우리가 겪는 고난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도자요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힘들게 여행하는 우리의 여행길의 시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여행을 완주한 마지막이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여행 중에 가장 심한 고난의 때가 언제인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기도하시며 도움을 주시기를 기뻐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우리의 곤경을 멀리서 구경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의 현장에 직접 관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연약하여 시험 들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고난 중에 있는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여행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와 이와 같이 우리의 고난을 충분히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직접 고난을 받아 십자가서 죽음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리시므로 부활로 일어나사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2장 9-10절).

 

3. 체험신앙(성경 시 26:1-8)


욥기에서 욥이란 인물은 보기 드문 신앙생활을 한 인물입니다. 욥기서 1장 1절에서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시편은 1절에서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라고 기록된 점이 욥기서와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행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펴보면 늘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을 발견합니다. 마치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나의 얼굴과 외모에 부족한 것이 발견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편에 인물이 하나님 앞에 행위 완전하게 되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했다고 합니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으로 서는 훈련을 한 인물입니다. 이같은 신앙훈련으로 된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머리로 아는 신앙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남에서 오는 체험신앙입니다. 그렇다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체험 신앙이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여기에 우리의 정직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기도함으로 하나님 주시는 평안과 확신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안과 전적인 맡김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확신에서부터 찾아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관계로 인해서 영적 자존감이 높아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랑관계에서 우리가 영적자존감이 높아 질 때 정신적 육체적 모든 병에서 치료를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라는 확신에 찬 신앙은 우리의 생활 속에 찾아오는 염려 걱정 그리고 두려움에서 해방을 줄 것입니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2-4절).


4. 고난 중의 욥의 믿음(성경 욥 1:1, 2:1-10)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계신데 믿는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믿는 신자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자가 누구일까? 그를 아는 가까운 사람이 아닐 까? 욥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고 정직하여 경건하고 악을 떠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 아침페 폭풍을 만나 집이 무너지고 자녀들을 잃는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떼와 양떼를 비롯한 많은 재산을 도적에 의해 순식간에 잃었습니다. 그 때에 누가 욥을 힘들게 하였는가? 욥의 세 친구들입니다. 그들은 고난당한 욥에게 와서 훈계하고 가르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하고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곤경에 처한 신자들에 대하여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는가? 고난을 당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빛 태도에 민감하다. 예전에는 가까이 오던 사람이 거리를 멀리해도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심코 던지는 말속에서도 마음에 더 깊은 상처를 안길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욥을 가장 힘들게 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욥을 향하여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같은 상황에서도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즉 화도 받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그 모든 일에 그의 입술로 하나님을 향하여 범죄하지 않았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