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설교, 문철영목사, 구원받은 소경 바디매오

  • 입력 2021.10.26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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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도 성령강림절 스물네번째(종교개혁) 주간 

1. 구원받은 소경 바디매오(막 10:46-52)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 큰 도로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편이 아파트 값의 차이가 많이 나더라고요. 그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학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 학교가 좋은 학교이기 때문에 이곳으로 부모들이 이사를 오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학군이 땅값을 많이 좌우합니다. 고위급 장관들 청문회를 지켜볼 때 장관후부들이 자녀들을 위해 학군 좋은 지역에 이사하려고 위장 전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물이 나는 곳으로 이사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이것역시 교육을 위한 학군문제였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는 경계선을 중심으로 해서 주류사회와 경계밖에 사람들의 거주지역이 달라집니다. 정결례법에 적용하여 정결하지 못한 사람들을 정상사회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여리고의 큰 길 가에 거지 바디매오가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세리 창기 등은 이방인의 취급을 받고는 그들이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람 바디매오는 사회적 성공률이 0%였습니다. 이 사람은 경계선 밖을 이동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발언권도 없고 투표권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대로를 가는 사람들은 발언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대로가에 있는 사람은 이동의 자유도 없고 발언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은 바디매오를 왜 예루살렘 가시기 직전에 등장시켰는가? 
예수님이 보실 때에 바디메오는 정성껏 양육하였던 12제자보다 더 값어치 있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바디매오를 영웅적인 자리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 올라간 후에 예수님이 영광에 앉을 때에 좌우편에 않게 해달라고 싸우는 일이 벌어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후에 이방집권자들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메시야 고백을 한 이후에 3번이나 수난 예고를 선언하였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눈이 감긴 것처럼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 제자들을 바라볼 때 흡족했을까요? 답답했을까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맡기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멀찌감치에서 동행한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피곤하여 잠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나중에는 성자가 되고 십자가를 거꾸로 지는 순교자가 되었으나 예루살렘 올라갈 때 예수님의 보기에는 깨달음이 둔한 자들이었습니다. 이 순간 제자들은 눈이 멀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교회를 열심히 섬겨도 눈을 감고 다니는 사람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안에 이름내는 자리에는 얼굴을 내밀고 싶은 것입니다. 이 모습이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서 제자들은 이제 경제력도 리더십도 명예도 얻었는데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눈을 떴으나 눈을 감은 것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리고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인파들이 대로를 지나갑니다.  그 대로 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던 맹인이 궁금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여보시오 이렇게 떠들썩하게 지나가는 데 지금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그 때에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고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맹인 바디매오는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큰 소리를 지르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하면서 꾸짖었습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하자면 “발언권 없는 사람은 조용히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리니까 바디매오는 조용히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댑니다. 그런데, 맹인 바디매오가 마음이 약해지기는커녕 도리어 더욱 집요하게 다윗의 자손 예수를 불러대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이 그에게 있었던 평생 소원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때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지금 지나가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그가 확신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앞에 찾아온 메시야를 만날 생각할 때에 주변 사람들이 주는 꾸지람이나 협박이나 압력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지나가는 분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으나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외쳐대는 것입니다.“그는 나사렛 예수 당신은 바로 메시야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예수님이 가던 길을 멈추고 이 바디매오를 향하여 고개를 돌리시고 “저 사람을 나에게로 불러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이 너를 부른다 하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져 버리고 예수님 앞으로 신속하게 달려왔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이 바디매오에게 질문합니다.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선생님,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 순간 바디매오의 시력이 회복되고 눈을 떴습니다. 눈을 뜬 이후에 바디매오가 떠나 갔어요? 안 떠나 안갔어요? 따라오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도망가게 됩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한 청년이 겉옷을 벗어던지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오늘 이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 앞으로 달려왔으며 그가 시력이 회복된 후에 그는 고난중에 있는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입니다. 
바디매오는 메시야를 고백하는 그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입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Nothing(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올라가신 예수님 앞에서 그는 영적으로 깨달음이 없어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제치고 믿음의 영웅이 된 사람입니다. 
 사전에 보면, 영웅이란 “1.사회의 이상적 가치를 실현하거나 그 가치를 대표할 만한 사람 2.어떤 분야에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이루어 대중으로부터 열광적으로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리빙스턴에 의하면, 영웅이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스스로 선택할 뿐만 아니라 그 선택에 따르는 희생을 끝까지 견디는 것을 충족시킨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가는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찾아올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있게 따라간 영웅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 메시야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킴으로써 바디매오처럼 믿음의 영웅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율법의 가치와 정신(막 12:28-34)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후 성전 뜰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헤롯당, 그리고 사두개인들로부터 번갈아 질문을 받고 변론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하는 동기는 가르침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답변에서 책을 잡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도 동일한 동기에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온 것입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그렇다면 서기관은 예수님에게 어떤 답변을 기대하고 이같은 질문을 하였을까요? 이 서기관을 비롯한 당시 유대 사회의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계명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서 더 중요한 계명과 덜 중요한 계명을 구분하는 계명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였습니다. 이같은 구조 속에서는 더 중요한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덜 중요하게 여기는 계명을 자연히 무시하거나 어길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기관은 자신이 질문하는 질문에 예수님의 예상답안으로 반드시 첫째의 계명을 위해서 다른 계명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는가요? 서기관이 기대하는 율법관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예수님은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계명을 세분화하여 조항을 만들어가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율법의 어떤 조항도 무시하지 않으면서 율법의 중요한 가치와 정신을 담은 것을 계명의 으뜸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백성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우선적 계명이입니다. 이것은 개별적 조항이 아니라 모든 개별 조항속에 흐르고 있는 계명의 정신입니다. 그 다음에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에서 흠집을 기대하고 질문했던 서기관은 예수님의 답변에서 어떤 작은 흠집도 찾아내지 못하고 도리어 “선생님이여 옳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 분이 시니 그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서기관은 자신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 지혜롭게 대답하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히 9:11-14) 


염소와 암송아지와 황소가 제물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죄사함을 위한 효력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의 피플 제단에 뿌렸기 때문에 짐승의 피로인한 죄사함의 효력이 발생하는가? 구약의 대제사장과 제사장 그리고 염소 암송아지 황소와 같은 희생제물의 짐승은 모두 다 문자적 의미보다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구약의 옛 언약의 시스템에 속한 것들로서 장차 올 새 언약을 지시하고 예표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옛제도는 앞으로 올 대제사장이며 죄없는 희생제사의 제물이 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 예수님이 희생제물로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죄를 사하였는가 아니면 피를 뿌렸기 때문에 우리들의 죄를 사하였는가?
히브리서 저자는 단순한 죽음보다는 피흘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서 속죄함을 받게 된 것이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 때문이라는 뜻이 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11-14절).

 

4. 룻의 믿음(룻 1:1-18)


유다 베들레헴 지역에 기근이 심하였을 때 베들레헴의 한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까지 가서 거주지를 찾아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방지역인 모압에서 거주하여 살면서 두 아들은 모압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와 모압에서 얻은 두 며느리만 남겨두고 그 사람과 두 아들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남은 여인이 나오미요 두 며느리는 오르바와 룻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미는 하나님이 고국땅 베들레헴의 자기 백성들에게 양식을 풍성하게 주셨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두 며느리를 불러다가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며 살라고 권면하였다. 그 때에 두 며느리가 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잡고 울고 난 후에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입맞추고서 떠나갔으나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보통 사람이라면 내리기 어려운 결단을 룻이 내렸습니다. 룻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 죽고 자녀도 없는 홀몸인데 고향 친정가족들과 친구들을 남겨두고 외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늙은 시어머니를 바라보고 불확실한 미래에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룻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 계산이 나오지 않는 길을 가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룻으로 하여금 이같은 어려운 결단을 내리게 하였는가? 인간적인 계산을 초월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룻에게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신앙이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기근을 만나 비록 시어머니 나오미가 비록 이방 땅에까지 와서 살았으나 며느리에게 영향을 줄만큼 야웨를 경외하는 신앙생활을 철저히 했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인 우리들은 오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나오미와 룻은 각각 상징입니다. 그 상징적 의미는 나오미는 그리스도와 교회요 룻은 신자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룻은 훗날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으며 예수님의 족보에도 그 이름이 올라가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5. 하나님 찬양이 우선(시146편)


본 시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는 “자랑하라, 찬송라다, 찬송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처럼 할렐루야로 시작하여 할렐루야로 끝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시작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마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 인생들의 생애에 많은 사건들과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일들 중에 제일 우선순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주가 되시고 우리의 생명과 삶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시편 기자가 이어서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고 하면서 1인칭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시편은 공동체 시편이라기보다 개인 찬송시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개인들은 비록 공동체에 속할지라도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세속생활과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때에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유력하고 힘있는 권세자들에게 잘 보여야만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처럼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권세있는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허무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의 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여호와는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를 먹이시며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영원히 살아계셔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원토록 살아있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을 삼고 그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가 복있는 자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3-4절).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6-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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