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설교, 문철영목사, "단순한 믿음과 순종"

  • 입력 2021.10.05 13:52
  • 수정 2021.10.0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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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도 성령강림절 스물한번째 주간

1. 단순한 믿음과 순종(막 10:17- 27)


 예수님 앞에 나아 왔던 장래가 촉망되는 부자 청년 율법학도가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과 대화 중에 예수님으로부터 칭찬도 받고 사랑스럽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부자이며 율법을 지키는 데 충실했던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질문할 때에 예수님을 선하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질문을 가지고 나아오는 여타의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진정으로 배우고자 하는 진정성이 있는 질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가 예수님에게 하는 그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 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켰는가?

그 부자청년은 대답하였습니다. “예 이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율법을 다 지킬 정도로 경건한 신앙을 가진 그였지만 예수님이 제시하는 말씀을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왜 따를 수 없었는가요? 예수님이 제시한 율법을 다 지킨 것에 대해서는 칭찬받을 만큼 사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획득하지 위해서는 부족한 것 한 가지가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가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 후에 예수님에게 돌아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기에 장애가 있었다면 그것은 부족한 것이 한가지인 줄 알았는데 세 가지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⓵재산을 파는 것, ⓶나누어주는 것, 그리고 ⓷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부자청년이 영생을 획득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먼저 해야할 일은 재산을 파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가난한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있다면 그것은 다 한 가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내용들은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실패한 근본 요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실패한 무엇이 근본 요인은 무엇인가? 부자청년이 예수님에게 “영생을 상속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한 질문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엇인가를 해야만 영생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그 부자청년의 무의식에 깔려있었던 것입니다. 그같은 사고구조 속에서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전제를 가지고 주님을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과 순종입니다.

베드로도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으로는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 성공여부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행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의 반응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2. 대제사장 예수님(히 4:12-16) 


  오늘날 우리 주변에 하나님을 믿고 예배생활을 하는 신자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예배할 수 있도록 교회가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로 보이지만 오늘 성경본문 속의 독자들인 유대인들에게는 그 일이 범상하지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법이 없고 반드시 제사장과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나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막 제사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이 성막에서 백성들의 제사를 위해서 항상 그곳에서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지만 예배자는 반드시 제물을 준비해서 성막 뜰까지 가야 했습니다. 예배자가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성막 뜰까지입니다. 성막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는 나를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만이 갈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제사장을 통해서만 가능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뵙고 기도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을 통해서만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도록 되어 있던 것이었는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되었는가?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이 띵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의 몸을 입으신 분으로 연약한 자리에서 고통을 느끼는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직접 피흘려죽으심으로 영원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 뵙고 예배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3. 욥의 고백(욥 23:1-9, 16-17)


  욥의 완전과 경외하는 신앙에 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공격을 받고도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그가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세 친구들로부터 훈계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그들과 변론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욥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5-6절)”.


한걸음 더 나아가 욥은 고백하기를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하나님을 뵈올 수 없고 왼쪽으로나 오른쪽에서도 뵐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8-9절)”


완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직한 신앙을 가진 욥이 하나님을 알지도 만나지도 못했다고 한다면 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욥은 왜  그 같은 고백을 하는가? 욥은 하나님이 곁에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만나 뵈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극심한 고난 속에서 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리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언제 깨닫고 이해하는가? 고난의 과정 연단의 과정이 지나간 후에 욥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10절)” 욥은 하나님이 그에게 계획하신 일이 이루어진 이후에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 때 욥은 떨면서 하나님에게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14-15절)”

 

4. 두 가지 마음(시 22편)


  본 시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자의 불평처럼 들립니다. 2절에서도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시인은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자인가?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지 않는 소망없는 자인가? 다음구절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시인은 “내 하나님여, 내 하나님이여” 하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직접적으로 대면할 만큼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없습니다. 단지 그는 부르짖는 외침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 할 뿐 그의 마음의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모태 적부터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맡겨진 몸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9-10절)”.

지금 시인이 비록 벌레같고 백성의 조롱거리와 비방거리의 처지에 있지만 그는 하나님이 구원을 주실 것을 확신하는 소망의 믿음의 근거를 구원받은 조상들의 선례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4-5절).”

그런데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 같은 하소연을 하고 있는 사람과 날 때부터 하나님을 믿고 그 몸을 의탁해 왔고 조상들이 구원받은 선례를 믿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속에서 두 가지 일이 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고통 속에서 처절하게 하나님에게 부르짖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안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시인은 그의 고통이 심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있고 맡겨진 몸으로 하나님을 완전 신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영혼을 하나님께 맡길 때 마태복음은 이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그런데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응답을 받았을까? 그가 구원을 받았을까? 그는 응답을 받았으며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1-22절)”.

그렇다면 기독교인과 이 시편은 어떤 관계애 있는가?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 시편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 받으실 것의 예언으로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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