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설교, 문철영목사, "예수 이름의 권세"

  • 입력 2021.09.20 14:06
  • 수정 2021.09.3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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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성령강림절 열아홉번째 주간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1. 예수이름의 권세(막 9:38-50) 

 

요한은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예수님으로부터 특허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요한은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막 9:38)고 보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통제를 받지 않고서 예수이름으로 귀신 쫓아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허용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능력을 행한 사람이 즉시 예수님을 비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예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제자들만의 전매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선언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은 제자들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이름을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수 이름 권세를 믿는 자들에 대하여는 비록 제자의 통제에 들어오지 않았을지라도 허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이름의 권세의 능력을 믿고서 예수를 비방할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제자의 통제를 받지 않고 축귀사역을 하는 자들이 비록 적군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아군으로 판단내리신 것이다.  
그렇다면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예수님의 분별 기준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아군과 적군을 판별하는 기준은 예수 이름의 권세를 믿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제자된 우리들은 예수 이름의 권세로 치료받는 일을 보면 함께 기뻐해야 해야 할 것이다.  예수이름의 권세가 비록 우리의 단체를 넘어서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 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2. 고난 속에서 응답받는 기도(약 5:13-20) 

 

야고보서에 나타난 초기교회 신자들의 신앙은 재림신앙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주의 강림을 맞이하기 위해 오래참고 마음을 견고하게 하고 있었다. 곧 그들은 문 밖에서 서 계시는 심판 주 앞에서 심판을 면하기 위해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을 본을 삼는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의 기독교 신자들은 어떤 고난을 겪고 있었는가? 건강문제, 가뭄의 문제, 미혹 받아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문제 등이다. 그들은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었는가? 먼저 지도자인 교회의 장로들이 기름 붓고 기도하는 일을 통해서 질병이 치료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와 같은 성정을 가진 지도자들의 기도로 가뭄의 문제를 해결 받는다. 신자들끼리는 서로 죄를 자백하는 일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병이 낫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고난 속에서 그들이 응답을 받게 되는 공통된 특성은 무엇인가? 첫째는 믿음의 기도에 해답이 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둘째는 그들은 떠나간 자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열어놓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

 

3.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 시 124편)

 

표준 새번역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들은 예배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성전을 오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폐허의 땅 위에 재건된 성전을 오르고 있다. 그들은 포로 중에 만났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들의 생명 줄이 끊어질 뻔 했던 사건들을 떠올리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들을 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 줄을 붙잡고 인도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전에 오르고 있는 일을 평범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적 중 기적으로 보고 있다. 그들이 눈앞에 전개된 성전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해 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앙의 기본이다.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예배자의 첫걸음이다.
순례자들이 성전에 오르면서 떠올리고 있는 사건은 부림절의 기원이 되는 사건이다. 기원 4세기 경에 아하수에로 왕 때에 수산성에 거주하던 유대백성들이 큰 위기를 만나 전멸될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왕이 전국에 광고를 하여 새 왕비를 선발하는 콘테스트를 열었을 때 에스더가 후보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왕비로 선택이 되었다. 게다가 당시 총리 하만의 행차시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될 위기에 있었던 사람이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였다. 그 때에 하만은 모르드개의 민족이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유대민족까지 모두 멸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모르드개와 백성들이 금식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알렸다. 그 때에 에스더 역시 죽으면 죽으리다는 믿음으로 왕을 만나기를 소원했다. 왕이 그녀를 만났을 때에 에스더의 소원을 들어 준 덕분에 모르드개가 풀려나 총리가 되고 백성들은 모두 구원을 얻었다. 그 날을 기념하여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절기가 있으니 그것이 부림절이다.

오늘 시편 본문은 유대백성들을 구원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찬송을 올리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권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생명을 되찾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생명을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찬양을 드릴 때마다 당시의 위태로웠던 역사를 기억하면서 찬양을 하고 있다. 그들의 역사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장면을 더욱 생생하게 떠올리기 위해 위태한 순간을 회상시키는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 채로 삼겼을 것이며 ....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우리를 내 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4.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7:1-6, 9-10, 9:20-22) 

 

궁전 문 밖에서 모르드개는 왕후 에스더가 보낸 내시 하닥 편으로 에스더에게 편지를 보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4:13-14).

궁전 안에서 내시를 통해 모르드개의 편지를 전달받은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답신하였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15-16)”.

이로써 왕후 에스더는 총리 하만의 모함으로 죽을 운명에 처한 모든 유대인들과 모르드개와 하나가 되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설명한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던”(고전 10:1-2) 유대 조상들의 운명과 동일하게 되었다.

왕후 에스더가 온 유대백성들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금식한 지 사흘째 되던 날에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서 왕후의 예복을 입고 서 있는 에스더를 발견한 왕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순간 매료되었고 왕의 손에 금 홀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에스더가 금홀 끝을 만지는 순간 왕은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고 하였다(5:1-2). 에스더는 왕을 위하여 잔치를 준비하겠으니 그 때에 왕이 오셔서 마음껏 즐기시기를 요청하였다.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에스더의 지혜로운 처신과 언어를 통해 상황은 급반전된다.

잔치는 계속 이어졌고 왕은 둘째 날 잔치에서 에스더의 아름다움에 더욱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왕은 다시금 에스더에게 소청이 무엇인지 묻는다.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왕후 에스더는 왕에게 대답한다. “왕이여....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7:3-4)”.

드디어 애절하게 호소하는 왕후 에스더 앞에서 왕은 입을 열었다.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왕후 에스더는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고 하였다.

이 순간 아름답고 가냘프게 보였던 에스더는 이 순간 어떤 장수의 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비수를 표적에 명중시킨 여장부가 되었다. 이때로부터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된 장대에는 하만이 달리고 왕은 명령을 내려 수산성에 거주하는 죽음의 목전에 있던 모든 유대백성들은 모두 구원을 얻게 된다. 모르드개는 왕의 명으로 총리가 된다. 왕은 유대인을 진멸하기로 한 이전의 조서는 철회하도록 하고 왕은 총리 모르드개에게 책임을 맡겨 왕의 어명대로 새로운 조서를 내린다. 각 지방에 있는 유대인들의 생명을 보호하여 구원하게 하되 유대인들을 대적하는 대적자들을 진멸토록 하였다(8:9-12). 그날이 아달월 곧 십이월 십삼일 이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이 날을 부림절로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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