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설교, 문철영목사, 첫째가 되고자 하면

  • 입력 2021.09.13 16:40
  • 수정 2021.09.3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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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성령강림절 열여덟번째 주간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1. 첫째가 되고자 하면(성경 막 9:30-37)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메시야 고백을 받은 후에 베드로와 다툼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오늘은 예수님 다시금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고난예고와 동시에 제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예고도 하였다. 그 때에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예수님에게 묻는 자가 없었다. 왜 그들은 예수님에게 두려워 아무것도 묻지를 못했을까? 예수님의 말뜻을 이해하기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왜 예수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을까?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 어느 집에 있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역시 여기서도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잠잠했다. 그들이 왜 아무 대답도 못하고 침묵을 지켰을까? 예수님의 질문에서 그들이 길에서 논의했던 내용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길에서 논의한 것은 누가 더 큰가에 대한 쟁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쟁의 내용은 예수님 예루살렘 올라간 후에 누가 그 오른 편에 앉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시기는 이미 예수님이 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과 제 3일에 살아날 것을 예고한 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그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예수님에게 그들이 주파수를 맞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에 예수님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어떻게 하면 깨우칠까 고심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운다. 그리고 말씀하신삳.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어린아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높아져 세상의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것이 예수님의 관심사였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권세를 부리는 리더십이 아니라 섬김의 리더십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절).

 

2.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성경 약 3:14-18. 4;1-8)


 
세상에는 두 가지 지혜가 있다. 하나는 땅 위의 지혜요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땅위의 지혜를 가지고 구하기 때문이다. 땅위의 지혜는 마음속에서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며 진리에 맞서서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세상이 혼돈과 악한 일로 가득해진다. 이처럼 세상이 혼돈과 악한 일로 가득하게 된 근본원인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하나님과 관계가 어긋 난데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존재했던 혼돈하며 공허한 땅의 모습이다. 빛이 없는 어둠 속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상태에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갈 때에 순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은 땅에서 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경험을 가진 자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중생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자에게 순결, 평화를 사랑함, 신중함, 순종, 그리고 충만한 자비와 선한 열매가 머물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공평무사와 신실함을 소유하게 된다(17절).
 
 

3. 복있는 사람(성경 시 1편)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늘 떠올리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가 늘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므로 늘 묵상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성경은 그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악인들과 죄인들과 오만한 자들과 거리를 두고 있으나 여호와의 율법은 늘 가까이 두고 산다. 성경이 그를 복 있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일어나 떠날 자리와 앉아 머물 자리를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분별하는 능력을 가진 자를 지혜로운 자라라고 한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 소원을 물었을 때 지혜를 구하였다. 그 지혜가 분별력이다. 이 분별력에는 듣는 귀가 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늘 묵상하는 자가 어떻게 지혜로운 자인가? 그가 여호와의 율법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의 귀는 그 마음에 있다. 그 마음이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사모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시편에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늘 푸르고 열매를 맺고 형통의 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유대인의 전통적 여인상(성경 잠 31:10-31)


 
 오늘 성경에 나타난 여성상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이미지는 곱고 연약한 외모와 현모양처의 이미지에 익숙해 있는 우리의 상상과는 대조적이다. 유대사회에서 지혜로운 여인은 외모가 곱거나 아름다운 것과 거리가 멀다. 생활력이 강하고 힘이 넘치는 체력을 가진 여성이다. 집안의 경제력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남편과 자녀들을 잘 돌보고 사회적으로도 가난한 약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솔선하고 있다. 게다가 남편은 한량처럼 보인다.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그 남편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명예로운 자리에서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을 하는데 필요한 경제적 후원을 그의 아내인 지혜로운 여인이 감당하고 있다. 여인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경제활동을 할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활동 대외적 활동을 부지런히 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 지혜로운 여인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편과 가족을 돌보는 일에 자신을 희생하여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인은 자기 신앙만을 위함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그가 조상으로 부터 물려받은 것처럼 다음 세대에게 계승시켜야 할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조금도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같이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남편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 남편의 영적 권위가 자녀들 앞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질 때 그 자녀들이 아버지가 가르치는 율법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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