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설교, 문철영목사 "하나님의 관점"

  • 입력 2021.09.08 00:14
  • 수정 2021.09.1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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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교회력설교, 성령강림절 열일곱번째 주간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1.하나님의 관점(8:27-38)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의 표준은 신앙고백이다. 익명의 기독교인으로 살기를 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고백적 신앙은 도전적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고백적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에게 도전을 주는 말씀이다. 신앙고백을 목표로 삼은 현대기독교인들에게 오늘 본문은 목표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최초로 신앙고백을 하였기 때문에 수제자의 위치를 차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같은 그리스도의 수제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는 고백을 한 후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된다. 주님 앞에 그리스도의 고백한 베드로가 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가?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가 주님에게서 본 것은 무엇인가? 베드로의 인간적 관점에서 볼 때에 예수님은 메시아였다. 인간적 관점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보는 시력을 잃고 있었다. 그렇다면 인간적 관점에서 베드로가 기대했던 메시아 예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메시아 예수는 금세 로마를 제압하고 유대 나라를 로마에서 해방시킬 것으로 기대했다. 예수님에 대한 그가 상상하는 것은 정치가요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을 수 있다. 그 앞에는 메시야와 함께 오직 승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지 못한 것은 십자가의 길을 통과한 후에 부활하게 될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감추어진 하나님의 관점이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31-33).

 

2.지혜가 부르는 소리(1:20-33)

 

본 잠언서에서 지혜는 여선지자의 모습으로 의인화되고 있다. 지혜가 부르는 소리를 거부하면 미련한 자들처럼 된다. 그 결과로 지혜가 부르는 소리를 듣기를 거부한 자들은 재앙과 두려움을 피할 수 없게 되는 어리석은 자로 된다. 재앙과 두려움을 만나는 그들은 지혜로부터 비웃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지혜를 거부한 자에게 재앙과 두려움은 순식간에 찾아 올 것이다. 그리고 재앙과 두려움의 위력은 광풍과도 같고 폭풍과도 같을 것이다. 지혜는 거부하는 자는 재앙을 만난 후에 지혜를 쉽게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지혜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지혜를 거부하면 재앙을 만나고 그의 미래가 불행해 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혜를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지혜를 거부하는 자들은 지혜가 부르는 소리 듣기를 싫어하였다고 한다. 지혜의 소리가 그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혜가 펴서 도움을 주려는 손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살아온 습관 때문에 지혜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혜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지혜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지혜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교정받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지혜가 그들을 부를 때에 그들이 있었던 장소는 어디인가요? 그들은 길거리, 광장, 시끄러운 길목, 성문 어귀와 성중에 있었다. 그들이 자주 찾는 장소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자리 그들의 거만을 뽐내는 자리 그리고 배움이 없는 자리이다. 그들이 자주 찾는 장소를 통해 그들의 성향이 무엇인가를 추리해 볼 때에 그들은 쾌락적이고 그들은 교만하고 그들의 눈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거부한 자들이다.

그렇다면 지혜를 거부했던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살았던 자들이 우리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재앙을 면하고 안전과 보호를 주는 지혜의 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먼저 지혜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 지혜와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우리는 지혜의 소리를 듣는데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지혜의 부름과 손짓에 감사함으로 반응할 필요가 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21-22)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28-33).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33).

 

3.말의 위력(3:1-12)

 

오늘 본문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마태복음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척도가 눈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6: 22-23). 반면에 야고보서에서는 마태복음과 달리 사람을 대하는 말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야고보서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중요한 요소로서 눈이 아닌 말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야고보서는 말은 배의 키와 같아서우리 몸의 방향을 결정한고 한다. 배의 키는 이동하는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배가 이동한다는 것의 상징적 의미는 우리의 몸이 행동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진 자의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런데, 왜 야고보서는 그 말을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에 비유하고 있는가? 항해하는 배가 목표를 향해 방향을 정하고 가야하듯이 기독교 신앙인이 바라보고 따라가야 할 목표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말은 행동은 아니지만 그 행동의 진행방향을 결정하는 중요 요인이 된다.

뿐만 아니라 말은 마른 나무를 태우는 불과 같다고 한다. 불은 태우고 소명시키는 일을 한다. 왜 야고서서는 말을 나무를 태우는 불과 같다고 할까? 말이 행동의 동인되는 긍정적 요인을 가진 반면에 말이 또한 모든 행동을 완전히 헛수고로 돌아가게 할 수 있도록 있는 부정적 요인도 되기 때문이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그런데 말은 어디서 나오는가? 입에서 나온다. 입에서 선한 말이 나오기도 하고 악한 말이 나오기도 한다. 입으로 찬송을 하기도 하고 입으로 저주를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한 입으로 두 가지 다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10-11)”.

그렇다면 입은 무엇인가? 말을 샘과 같다. 한 샘에서 나오는 것은 단물이이 쓴물을 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입은 하나님의 말씀과 찬송을 하게 되어 있다. 그 한 입으로 저주를 말할 수 없다.

 

4.영적 지혜(19)

 

본 시편은 여호와의 율법의 기능과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본 시편에서는 율법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기능,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는 기능, 마음을 기쁘게 하는 기능, 그리고 눈을 밝게 하는 기능을 한다. 본 시편에서 율법의 기능은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다양하게 서술되는 율법의 기능은 하나의 주제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지혜이다. 율법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왜 그토록 중요한가?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에게 지혜를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지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한 가지는 세상에서 얻는 지혜이고 다른 한 가지는 오늘 시편 본문에서 얻는 지혜이다. 여호와의 율법으로부터 얻는 지혜는 영적 지혜이다. 이 영적 지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지혜이고 모든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경우에 지혜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데 필요한 제자도이다. 제자도는 십자가의 도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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