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죄 사함의 선언은 새로운 시대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 입력 2022.01.0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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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43) 죄 사함(Forgiveness)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 담임목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 담임목사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郞)는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아들러를 20여 년간 연구한 일본의 철학자다. 그가 작가 고가 후미타케(古賀史健)와 함께 쓴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자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 할 몫이라고 설명했다. 기시미는 행복해지려면 미움 받을 용기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기 위해 용서를 선포하고 치유를 행하므로 미움을 받고 죽음의 위기까지 처한다.

예수님은 유대지도자들로부터 눈 밖에 나고 미움과 비방 그리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것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왕이신 예수님이 서기관들로부터 미운털처럼 비방을 받고 죽을 위협을 당하는 것은 고난받는 메시야의 몫이다. 서기관을 좋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질병만 고쳐주지 않으신다. 비록 비방을 받고 미움을 당하더라도 그 사람의 아들로서 사죄와 치유의 권세를 나타내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임하였음을 알린다.

 

1. 죄 사함의 선언

마가는 첫 번째의 기사에서 죄와 병 그리고 치유와 사죄의 문제를 조명한다. 이 땅 위에 사죄의 권세가 그 사람의 아들의 유일한 권세임을 확인하여 준다. 용서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는 자다. 마가의 문맥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신적 수동태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신적 수동태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는 수행 발언’(performative utlerance)것으로 이해된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행위자로 하는 수동태를 신적수동태(divine passive)라고 한다. 이는 제3계명을 존중하는 것에서 비롯된다(20:7). 하나님의 이름이 생략된다. 그 대신 동사를 수동태로 나타내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 수동태는 행위의 주체가 언급되지 않았지만 실지로는 하나님에 의해서 비롯된 행위를 의미한다.

믿음의 내용이 마가 당시에는 구원을 가져오는 초기 형태의 믿음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예수님이 능히 병을 고칠 수 있으며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왔다는 믿음을 포함했다. 문학적으로 보면 치유에 방해되는 장애는 긴장을 고조시켜서 내러티브적인 관심을 유지시킨다. 아울러 탄원자에게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이례적인 결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헬라 세계에서 묘사된 치유들과 달리 일반적으로 믿음은 치유 다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치유에 앞선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환자의 병을 그의 죄에 초점을 맞춘다. 죄 사함을 선언한 것은 중풍병의 원인을 죄로 보신 것이다. 이 병자가 어떤 특별한 죄를 지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경우도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으로부터 죄로 분리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고, 또한 모든 고통은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떠남으로 기인되었다는, 구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진리가 예증된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죄의 용서와 신체적 치유가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마가는 분명하게 믿었다(9-11). 병과 죄 사이의 연결이 고대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여러 구약 본문에서 치유와 용서는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구약성경의 몇 가지 본문에 보면, 치유와 죄 사함, 즉 병 고침과 용서가 교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낱말이다.

유대적 사고에서 치유는 단순히 육체적 건강의 회복 이상을 의미한다. 질환과 병이 죄의 증상이며 결과이기 때문이다(5:12). 따라서 질환은 종종 죄의 문제로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이는 병보다 더 근본적인 인간 문제다. 흔히 하나님의 치유는 그의 죄 용서와 동의어다. 구약성경에서는 질병과 죽음은 인간의 죄의 결과라 보았다. 욥기는 개인의 고난이 불가피하게 그 자신의 죄의 결과라는 견해에 대해 강하게 반증한다. 신약에서도 일부 고난과 죽음은 연관된 자들의 구체적 죄에 귀속된다. 다른 곳에서는 그런 연관이 거부된다.

치유는 하나님의 용서에 의하여 조건 지어진다. 치유는 종종 용서의 표식이었다. 이것은 질병의 각각의 경우에 해당하는 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서로 관련이 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 전체에 대해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 사람의 육체적 상황이 근본적으로 영적인 원인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을 뿐이다. 인간이 사망에 눌려 살아야 함이 하나님의 의도는 아니다. 병고, 질병, 사망은 모든 인간이 죄악된 상태에서 생활하는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치유는 사망을 추방하는 일이다. 죄의 영역에 대한 침공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말씀함이 정당하다.

예수님의 선언은 뜻밖이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더구나 환자의 직접적인 요구와 네 사람의 기대와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죄와 질병 그리고 용서와 병고침을 자주 상호 연관된 개념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그 병고의 사람이 치유를 받았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성격이다. 인간의 전인적인 범위에서 철저하게 치유를 제공하며 이 철저한 치유의 선포가 가까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표적이다.

2. 죄 사함의 선언과 새 출애굽

예수님께서 병만 고치지 않고 죄인을 용서하는 것을 병행한 것은 구원의 시대, 즉 새 출애굽의 시대를 향한 예언자적 희망과 일치한다. 병의 증상만 제거하는 데 국한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전인적 치유는 새로운 시대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귀신 축출에서와 같이 병자를 치유하고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사야 40:1-2은 용서 선포가 시작되는 새 출애굽의 개막을 반향하는 본문이다. 첫 번째 출애굽 때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며 범한 죄를 홍해에서 씻어 정결하게 하고 용서하여 주시고 건강한 두 발로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광야를 여행하는 것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 형벌을 내리신다(40:28).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의 과거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것을 수용할 시간이 가까이 왔다.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43:18).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43:19).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자 하는 새 일이 무엇인가? 광야에 야훼의 길을 예비하며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며 사막에 강을 흐르면서 이스라엘의 창조주요 왕이신 그 분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이다(43:15). 예수님께서 바로 그 새 일을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새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내가 너희로 알게 하리라는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용서와 치유의 사건을 통해 자신이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리고자 작정하셨다는 의중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메시야-왕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알리고자 한다.

감독은 하나님, 주인공은 예수님, 그리고 조연은 중풍병자와 지붕 위에 사람들이다. 시나리오의 원작은 이사야 선지가가 작성한 것을 마가가 복음서(gospels)라는 양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사야는 예언하기를 광야에 야훼의 대로가 예비되면 그 길로 하나님이 오실 것인데, 그 분이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마가가 증거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광야에 나타나 드디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였다.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새 출애굽의 역사가 이미 시작되었다. 야훼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메시야를 통해 용서가 선포되고 육신이 치유되므로 새 출애굽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메시아-왕으로서 용서를 선포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날 때 모든 육체가 그것을 보도록 중풍병자를 일으키신다(43:5). 용서와 치유라는 그림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가 맞춰지는 광경을 보게 한다.

신체적 고난이 그 고난당하는 자의 죄 또는 공동체의 죄에서(삼하 24:10-15) 기인한 것으로 돌려질 수 있듯이 때때로 신체적 치유가 명료하게 죄 용서와 관련된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나병처럼 굳이 죄를 언급하지 않고 손을 내밀어 고칠 수 있었다. 죄를 사한다는 말을 하면 함께 있던 제사장 출신인 서기관이 어떤 반응을 일으킬 것을 환히 알고 있었다. 예수님을 향한 공박 가운데 일부는 그가 제사장의 특권을 침탈했다는 문제 제기일 수 있으며, 서기관들이 제사장일 경우 이러한 주장은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까닭이 무엇인가. 야훼의 용서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를 회복하는 데 필수요건이었기에 홍해를 지나게 하므로 죄 사함의 표로 물세례를 받게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우상을 섬긴 것은 다리가 있으나 걷지 못하는 우상처럼 우상숭배하는 자들도 저는 자와 같다. 일부 초기 유대 전승에서 이사야 35장의 언어가 이사야 6장과 더불어 은유적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새 출애굽이 오게 되면 저는 자들이 사슴과 같이 걷게 되는 사건이 있게 될 것을 바라보았다(35:6a). 이로 보건데 예수님께서 걷지 못하는 중풍병자를 자기 매트를 들고 걸어가게 하기 전에 죄 사함을 받게 한 것은 새 출애굽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했음을 알리는 선언이다.

예수님이 제사와 무관하게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은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다. 서기관들이 바로 인식하였던 것처럼 하나님만이 허물을 사하시고 새로운 일을 행하실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이 하실 새 일을, 즉 새 출애굽의 사역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왕이신 예수님께서 대리인의 자격으로 행하시고 있다. 용서와 치유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는 하나님의 대리인임을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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