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후 300년경 작은 도시 옥시린코스에서, 한 남자가 신에게 질문하려고 종이에 적어왔다. 옥시린코스는 지금의 이집트 땅이고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통치 지역이었다.
"내가 보조금을 받게 될까요, 내가 선한 일을 하게 될까요, 내가 돈을 받게 될까요?, 내 재산들이 경매장에서 팔리게 될까요, 내가 팔리게 될까요?, 내가 걸인이 될까요?, 내가 도망가야만 하는 일이 일어날까요? 나의 도망이 끝이 있을까요?, 내가 시의원이 될까요?, 내가 내 아내와 이혼하게 될까요?, 내가 독살을 당할까요?,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게 될까요?"(미셸 끌레브노, 그리스도인과 국가권력).
내용을 살펴보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차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남자에게 어떤 사건이 진짜 사건이 터진 것이 아니다. 막연한 것,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삶의 질서가 흐트러진 경우가 많다. 고유가, 고물가, 고환율, 부동산폭등 등으로 인한 서민 경제의 그늘은 점점 깊어져간다. 국제유가가 내려가면 좋은일인데, 이 현상을 보고 경제학자들은 저성장 늪으로 들어가는 신호탄으로 보고 있다. 경제학자들의 셈법의 무척이나 복잡한 모양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여과없이 언론과 방송매체를 통해 흘러 안방으로, 손안에 핸드폰으로 들어오니 국민들의 불안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제2의 IMF가 왔다는 설까지 등장한다. IMF는 국가 부도로 인해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헤쳐 나왔지만 코로나 이후 저성장의 늪은 장기간 오래 지속될 확률이 있다고 경제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교회공동체의 미래도 그리 밝지는 않다. 인구 총량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교육, 종교, 산업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세계인구는 증가하는데 한국의 인구 시계는 5천명을 약간 돌파하더니, 인구의 정점을 찍고 하향선을 그리고 있다.
세계의 인구는 UN의 추계에 의하면 1950년은 24.9억이다. 2022년 현재 79억5천명이 넘었다. 2050년에는 100억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인구증가로 인해 지구촌의 식량부족는 매우 큰 고민거리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인구 증가와 다르게 한국은 저출산으로 인해 산업 전반에 급격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인구감소로 인한 학령인구감소는 이제 대학의 현실이 되었고, 종교에 미치는 영향은매우 크다. 다음세대가 없는 교회가 점점 증가하고, 다음세대 예배가 사라진 교회가 이미 넘쳐나고 있다. 인구소멸 지역에 가면 아이의 울음소리가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고 한다.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소리가 주는 파장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든다. 그런데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모자리판이었던 개척교회는 늘 아이들로 넘쳤다.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욜로VS 카르페 디엠
2010년 이후 우리사회에 파고드는 문화의 형태는 욜로와 카르페 디엠이다. 욜로(yolo,you only live once)는 한 번뿐인 인생을 즐기자는 문화이다. 현재를 즐기며 사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오늘을 즐기라’는 라틴어 용어중에 ‘카르페 디엠, carpe diem)과 아주 유사한 표현이다. 한 번뿐인 인생 충분히 즐기며 살다 가리라는 의미이다.
젊은이 중심의 욜로문화가 이제는 전세대에 퍼져 한번뿐인 인생을 즐기며 살자는 분위기가 강하다. 또한 이런 문화가 교회 깊숙히 파고들었다. 교회도 욜로문화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다. 율로 문화가 코로나를 거치면서 더 견고해지는 것 같다.
(1)혼자 인터넷 예배를 드린다. (2)교회모임을 회피한다. (3)나홀로 문화가 급증하고 있다. (4)주일예배대신 여행, 취미활동하며 나 홀로 신앙을 추구한다. (5)미래를 준비하는 것을 포기하고, 지금 즐기자는 생각이 지배한다. (6)이웃을 위한 희생과 섬김의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즐긴다.
욜로문화는 아주 현세적이고 세속주의적이며 감각주의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반면에 기독교적 세계관은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그리스도안에서 이 세상이 변화될 것을 가르친다.
한동대(1995)의 슬로건은 “Why not change the World" 왜 세상을 바꾸지 않는가? 세계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라고 가르친다.한동인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교훈)는, 사랑, 겸손, 봉사이다.
기독교인의 자세는 현세의 삶을 즐기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에 임할 미래의 소망을 기다리며 인류를 변화시키는 사명에 헌신하는 것이다.
욜로문화는 일종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형태이다. 세상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다. 그분을 만났다면 땅의 것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살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이타적으로 산다. 욜로는 미래 또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 행복만을 위해 자신이 가진 물질을 소비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한 번 뿐인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욜로족의 근본은 인본주의와 자기 사랑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중심 삶, 자기 헌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성취를 통해 기쁨과 자아실현을 강조한다.
지금을 즐기자. 세상의 문화이다. 세상문화에 지배를 받으면 거의 복음과는 관계없이 산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을 보면 세상문화와 복음의 일치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고후6:14-18).
한번뿐인 인생 즐기고 살겠다는 것은 거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명의 길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다. 세상문화를 따라가겠다는 것이다. 세상문화가 나를 익숙하게 지배하도록 하지 말라.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현재 고난의 삶을 살아가고 있든, 아니든 관계없다. 미래에 닥칠 막연한 불안에 떨고 있다면 어쩌면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멀어졌기 때문일 경우가 많다.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는 처방전은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관계가 견고해야한다. 또한 비전과 사명이란 단어에 자신을 던져야 한다. 방향이 없다면 운동에너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문화가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세상문화에 점령당하지 말고 복음 문화에 지배을 받아야지만 현재와 미래의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뿐아니라 사명을 완수하는 제자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