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 시선】 이런 예배와 설교, 어때요?

  • 입력 2022.08.09 11:09
  • 수정 2022.08.09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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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을 선포하는 예배를 꿈꾼다면?

이대희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성경학박사과정(D.Litt)을 졸업했다. 예장총회교육자원부 연구원과 서울장신대 교수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그동안 성경학교와 신학교, 목회자와 교회교육 세미나와 강의등을 해오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평생말씀학교인 "예즈덤성경대학"을 20년째 교수하고 있으며 극동방송에서 "알기쉬운 기독교이해" "크리스천 가이드" "크리스천 습관과 인간관계" "재미있는 성경공부" "전도가 안된다구요"등 성경과 신앙생활 프로그램 담당했으며 다양한 직장 소그룹 성경공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현장 사역 경험(소형.중형.대형교회,개척과 담임목회)과 연구를 토대로 300여권의 저서가 있으며 "이야기대화식 성경연구"와 "30분성경교재 시리즈"와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 저서(“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 (2016년 세종도서 우수도서 ).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공부법” (대만번역 출간), “유대인의 파르데스공부법“ "되새김 120일 쉬운 통독"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예즈덤성경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이대희 목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M.Div),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Th. M).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성경학박사과정(D.Litt)을 졸업했다. 예장총회교육자원부 연구원과 서울장신대 교수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그동안 성경학교와 신학교, 목회자와 교회교육 세미나와 강의등을 해오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에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평생말씀학교인 "예즈덤성경대학"을 20년째 교수하고 있으며 극동방송에서 "알기쉬운 기독교이해" "크리스천 가이드" "크리스천 습관과 인간관계" "재미있는 성경공부" "전도가 안된다구요"등 성경과 신앙생활 프로그램 담당했으며 다양한 직장 소그룹 성경공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현장 사역 경험(소형.중형.대형교회,개척과 담임목회)과 연구를 토대로 300여권의 저서가 있으며 "이야기대화식 성경연구"와 "30분성경교재 시리즈"와 다양한 실천 프로그램을 제시한 저서(“유대인 밥상머리 자녀교육법” (2016년 세종도서 우수도서 ). “한국인을 위한 유대인공부법” (대만번역 출간), “유대인의 파르데스공부법“ "되새김 120일 쉬운 통독" 등 다수가 있다. 현재 꿈을주는교회 담임목사. 예즈덤성경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일방적인 연설형 설교가 있어야 예배일까?

우리는 보통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설교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예배를 어떻게 드리지? 설교자가 없는데?” “나는 설교하기 어려운데? 예배에서 설교 없으면 그것을 예배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무엇이라 대답할까? 우리는 예배에서 설교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예배는 곧 설교를 들으러 간다고 말할 정도로 설교는 예배를 결정하는 가장 필수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1세기 초대교회는 지금 우리처럼 예배 중에 우리와 같은 설교를 했을까? 성경에는 그런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지금 같은 1인의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연설형 설교방식은 찾기 힘들다.

지금과 같은 1인 설교자가 주도하는 설득과 연설형 설교는 구약과 신약의 교회모임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예배방식이었다. 그것은 불신자 전도시에 사용한 방식이었다. 성전 뜰과 행각, 거리, 총독 앞에서, 유대인 회당에 가서 설교 한 베드로와 바울의 모습은 모두 전도를 위한 설교 때 사용한 방식이다, 그들에게는 전도와 설득을 위해서 당연히 이런 연설형 설교방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속에서는 이런 1인 설교자의 방식 보다는 그리스도의 한몸된 공동체이기에 서로 말씀을 나누는 공유방식을 사용했다, 그리고 일방적 설교보다는 주님의 분부한 말씀을 읽고 배우고 가르치고 권면하는 모습이 중심이었다. 신앙을 성숙하게 하고 몸을 온전하게 하는 구조로 예배가 이루어 졌다. 서로 함께 나누고 서로 위로받고 권면하는 공동체 예배가 핵심이었다,

예배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의미에서 보면 일방적 설교식보다는 양육의 권면과 가르침의 방식이 성경적이고 자연스럽다. 교회에 모인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성도의 양육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이었다. 그것은 지금처럼 수동적으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마치는 예배가 아닌 서로 함께 하는 상호성에 초점을 둔 모임이었다. 신약성경에는 교회를 말할 때 서로라는 단어가 60회 이상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몸 된 교회 가르침이다. 지금 우리의 예배도 이런 원리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골로새서는 당시 골로새교회의 예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3:15-17)

 

연설형 설교중심의 예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그렇다면 언제부터 지금 같은 설교가 자리를 잡았을까? 분명한 것은 지금같은 예배방식은 1세기 초대교회 방식은 아니다. 그것은 313년 콘스탄틴 이후에 로마 카톨릭 성당이 세워지면서 지금 같은 설교가 본격화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의 설교는 초대교부들이 헬라철학의 소피스트 연설에서 힌트를 얻어 예배시간에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예배당이 세워지면서 연설형 강단 설교가 교회 속에 들어왔다.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지금의 설교는 주로 건물교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특히 건물예배당에서는 설교가 큰 효과를 발휘한다. 큰 공간을 울리는 방송시스템과 청중들이 많이 모인 예배당에서는 연설형의 설교가 인기가 있고 당장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시스템이 갖춘 예배당으로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건물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의 연설형 설교는 본질적인 교회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방식이었다. 초대교회는 이런 예배당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런 예배 방식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예배당이 세워지면서

연설형 강단 설교가

교회 속에 들어왔다.

지금 우리에게는 코로나로 인하여 예배당에서 예배모임이 힘든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이때마다 예배에 대한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해결하려면 이제 한국교회에 성경적 예배의 원리에 따른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생각할 시점이 되었다. 성경은 직접적인 예배 언급이나 예배 방식과 패턴이 소개되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없기에 언급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실천을 강조하는 신약의 서신서에는 직접적인 예배의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로마서 121절에 영적예배라는 구절이 언급된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가 어떤 방식으로 행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15:16)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로마서 12장에서 16장 실천 내용 전체가 예배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예배당에서 드리는 공예배와 더불어 곧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예배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예수님이 친히 보여준 예배의 원형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예배의 모습을 그려보는데 힌트를 준다. 예배는 공동체가 서로 하나되는 거룩한 삶의 실천이다. 단순히 의식만 드리고 사라지는 예배로는 우리의 삶의 변화를 이루기 어렵다. 예배 자체가 곧 삶의 변화의 순간이 되려면 예배가 공동체가 함께 하는 시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찬양과 기도를 통한 영적 만남, 말씀을 통한 인격적 만남. 이웃과 소통하는 교회공동체의 교제와 세상을 복음으로 하나 되는 비전을 보게 하는 예배가 되려면 현재 우리의 예배는 많은 면에서 갱신과 변화가 필요하다. 예배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잔치의 재현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같이 함께 한 최후의 만찬과 같은 예배가 필요하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행해야할 예배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요한복음 1220절에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 으로 시작되는 구절은 앞으로 예수님이 보여줄 예배를 암시하고 있다. 요한복음 13장부터는 예수님이 유월절 죽기 전날에 제자들과 같이한 마지막 시간으로 그것은 앞으로 예배를 재현하고 있다. 17장까지 이어지는 5장의 긴 내용은 요한복음의 다락방 강화로 알려진 요한복음의 중심 내용이다. 이 구조로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섬기는 것으로 예배자의 봉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떡과 잔을 나누면서 영적 교제를 나누는 장면은 우리의 예배의 핵심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예배 중에 성찬을 나누는 일이 이것에 해당된다. 그리고 긴 시간을 제자들과 말씀을 주고받는다. 앞으로 오실 성령의 내용까지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요한복음 17장에 대제사장 기도는 서로 하나되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무리 된다. 예배의 마지막의 모습이다. 예배를 마친 후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신 후에 잡혀 십자가에 죽으신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린 후에 세상에 파송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세상에 나가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예수님 자신이 모델로 보여준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의 예배를 살펴보면 가장 부족한 것이 일방적 말씀 선포로 마치고 말씀의 교제와 나눔이 없다는 점이다. 성찬을 하기 어려운 예배 구조도 문제점이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가 성찬과 서로 주고받는 가르침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구조로 예배의 갱신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하고 있다. 특히 예배와 가르침을 분리하는 지금의 예배 구조를 가르침을 통합한 예배로 나갈 때 진정한 예배가 회복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예배 속에 가르침이 포함되었는데 이것을 분리시킨 것은 헬레니즘의 영향이 산물이다. 말씀과 기도를 분리하는 것처럼 설교와 가르침을 분리시키는 상황이 예배 속에 형성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헤브라이즘의 성경적 구조는 기도와 말씀은 서로 하나다. 기도가 말씀이요 말씀이 곧 기도다. 예배는 이것이 서로 통합되는 사건이다. 그럴 때 예배를 통하여 변화를 이루어 세상에서 예수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 수 있다. 지금의 정해진 의식에 참여하는 정도의 예배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머물기 쉽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예배를 경험하기 어렵다. 예배는 프로그램이 아닌 삶이다. 예배는 모든 곳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이 부름의 장소이며 그곳이 예배의 현장이다. 우리가 예배하는 주님은 만유의 주님이시고 세상을 만드신 유일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예배도 특별한 장소만 아닌 어디서나 주님은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주님은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신다. 물론 정기적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언약 공동체를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선포되는 예배당 모임은 우리의 신앙을 세우는데 아주 중요하다. 다만 이런 공적인 예배를 통하여 온 세상에서도, 일상 생활속에서도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 우리의 모든 삶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루스가 벧엘이 되는 예배가 진정 우리가 꿈꾸는 예배의 모습이다. 이런 예배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지금 예배와 설교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오직 1인 설교자에 집중하는 지금의 수동적인 예배자에서 스스로 능동적인 예배자로 전환하기 위해서 함께하는 예배방식을 제안한다.

부서와 년령별로 나누어진 예배를 전세대가 함께하는 통합예배가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서는 모두가 예배의 주체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주님의 몸된 공동체를 세우는 통합예배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의 설교중심의 예배방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예배를 설교가 이끌어가기 보다는 말씀이 이끄는 방식으로 주인을 바꾸는 일이다. 설교 시간 중에서 50%는 공동체가 함께 소리 내어 성경읽는 시간을 갖는 일이다. 중간 중간에 목회자의 읽은 말씀의 의미를 전하는 설교가 이어진다면 어떨까? 가능하면 예배중이나 예배 후에 소모임으로 오늘 말씀을 적용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모두가 함께하는 예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다시 일주일간 삶에서 상고하고 묵상하며 가족밥상머리 예배로 이어진다면 삶의 예배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수레바퀴처럼 순환한다면 날마다 모든 곳에서 예배가 드려지게 될 것이다.

 

예배를 설교가 이끌어가기 보다는

말씀이 이끄는 방식으로

주인을 바꾸는 일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시편1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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