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들의 설교의 방식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3대지, 주제별, 한절씩 푸는 강해설교방식은 성경의 방식이 아닌 헬레니즘 소피스트들이 사용한 방식을 초대교부들이 차용한 것이다. 이런 설교는 설득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이성에 초점을 두는 지식형 설교다. 우리가 흔히 설교를 준비하고 원고를 정리하는 방식은 강의를 할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지식과 깨달음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주로 강단에서 일인 설교자가 주입하는 설교방식과 거의 같다. 그러다 보니 효과적인 강의 시간에 따르면서 30분 정도의 설교 시간이 자리 잡게 되었다. 오래 집중하지 못한다는 일반 학교강의 형태를 따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설교가 강의식으로 흐르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착화 되고 삶의 적용은 점점 힘들게 된다. 특히 설교를 잘하는 유명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 이런 현상이 심하다. 마치 유명한 학원강사의 쪽집개 강의를 들으면 다 될 것 같은데 막상 실천하려면 멍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지식을 주입하고 설명하고 정리하는 지식형 설교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설교를 들으면 점점 신앙이 죽고 사변화 된다. 교회를 설교를 들으러 갈뿐 정작설교를 듣고 실천하려는 의지는 부족하다. 설교가 학교의 강의와 설교가 비슷한 것은 이런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을 계속 고수하면 결과는 지금 유럽교회와 같아진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왜 설교가 필요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적 설교인가? 를 깊게 고찰해야 한다. 설교방식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설교방식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인본주의 방식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설교를 재정립해야 한다. 한마디로 설교를 성경적으로 정리하면 설교자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재현하면 성도들은 들은 말씀을 삶으로 재생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이는 모임을 성회라 부른다. 교회에 모이는 것은 내가 오고 싶다고 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불러야 올수 있는 신비한 곳이다. 주님의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것은 인간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에 예배에 모이는 것은(모에드) 주의 말씀을 다시 듣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다. 주의 말씀을 기억하려고 모이는 것이다. 설교의 역할은 주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게 하는데 있다. 이전의 말씀을 오늘 속에서 재생과 재현하는 것이 설교다. 이것은 신명기와 선지서(미가서)의 핵심주제다.
설교는 주의 말씀을
다시 듣는 재생과 재현
세상모임은 사람들과 교제하기 위해 모이지만 교회는 거룩한 말씀을 들으러 모이는 것이다. 교회 모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려고 모이는 것이다.(민수기 10:10(소집) 느헤미야 8:8 (독서)) 구약의 거룩한 모임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기 위해 모였다(신4:10, 5:15.16:12. 출애굽기 12:42) 신약에서 교회모임도 같은 의미다(행2:1)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것은 성경을 읽고 나누기 위해서다. 교회는 모이는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단순히 설교만 듣고 사라지는 곳이 아닌 공동체가 함께 말씀을 구체적으로 나누는 데까지 나아가야 건강한 교회가 된다. 이것을 위해 지금 우리 교회는 새롭게 개혁할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 역시 말씀을 듣고 나누기 위해서 모였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가신 기록을 보면 말씀을 읽은 후에 말씀에 대한 설명을 한 후에 서로 질문과 나눔의 시간을 가졌다.(눅 4:16) 초대교회는 이런 전통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말씀이 활발하게 예배 가운데 나눔을 가졌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성경적인 모습이 지금 우리 교회에서 사라졌을까?
왜 매주 우리는 교회에 모이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을 듣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교회모임에서 예배와 기도회와 말씀을 나눌 때 꼭 기억할 점이 있다. 그것은 새로운 이야기나 새로운 사상을 듣고자 모인 곳이 아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연설한 아레오바고 광장은 철학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지금도 우리주변에는 이런 모임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모임은 새로운 사상과 이야기를 듣는 곳이다. 지난 이야기가 아닌 오늘 처음 듣는 새로운 이야기와 가르침을 추구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것에 흥미를 가진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초등학문으로 허탄한 이야기들이다. 성경은 이런 이야기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한다. 교회 모임이 이런 이야기가 많아지면 안 된다, 그러면 교회는 점차 약해지고 모임이 힘들게 된다. 교회 모임은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 하나님이 모임을 운행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는 것이 해결점이다. 그것만이 교회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이렇게 하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이미 이루신 말씀이다. 십자가상에서 모두 이루신 일을 전하고 나누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나누는 교회
크리스천 신앙은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다 이룬 과거의 일을 오늘의 삶에 새롭게 반복과정이다. 다시 말하면 가거에 이루신 약속의 말씀을 오늘 속에서 재생하는 것이다. 성경은 과거의 이야기다. 그래서 흔히 성경을 따분한 과거의 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과거의 이야기 이지만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다.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늘 속에 재현될 때는 오늘의 말씀이 된다. 이것이 성경의 신비다. 성경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 이미 주신 이야기다. 이미 완성된 것을 오늘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오늘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경읽기는 뉴텔링이 아닌 리텔링이다. 과거에 행하신 그 성경의 말씀을 오늘의 삶속에서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교회모임은 과거의 것을 어떻게 오늘날에 생생하게 재현하고 재생하느냐가 관건이다. 성경읽기는 이것을 이루는 것이다.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를 전송하는 것이 아닌 오늘의 언어로 오늘의 현장에서 다시 읽는 성경말씀으로 재현하는 것이 성경 읽기다. 신앙은 재현이다. 잃었던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나를 새롭게 한다.
그런 점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다. 설교하는 순간 살아 있는 말씀으로 선포되는 복음사건이 된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된 것처럼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 역사가 일어나는 생생한 복음사건이다. 명사와 형용사로 설명하는 것이 아닌 동사로 선포되는 살아 있는 생생한 말씀의 시간이 곧 설교 시간이다.
절기 마지막 날에 거룩한 성회로 모인 것은 말씀을 읽기 위해서다.(민수기 29:35 .역대하 7:9. 느헤미야 8:18) 특히 안식일에는 성경을 읽으려고 모였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회당에 가신 것이나(눅 4:16) 바울이 찾아간 회당과 기도처 역시 말씀을 읽기 위해 모였다.(행 13:14-15, 42, 44, 15:21 , 16:13, 17:1-2, 17:17)
이렇게 보면 구약이나 신약 모두 동일한 설교의 원리가 있다. 주의 백성들이 모일 때는 이미 주신 말씀을 읽고 듣기 위해서였다. 이런 점에서 성경 읽기(미크라)가 주된 일이었고 설교는 그것을 오늘 삶에서 재현하는 일이었다. 철저히 말씀을 드러내는 봉사자가 설교였다. 오늘날처럼 설교가 수사학적으로 조직하고 구성하는 설교가 아닌 말씀을 자체를 어떻게 기억하게 하고 재현하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곧 하나님의 말씀의 시간이었다.
설교의 교과서인 신명기에 강조하는 핵심 단어는 “기억하라” 이다. 이것은 신명기 전반에 걸쳐서 나오는 반복된 단어다. 이것은 예수님이 주의 만찬을 제자들과 나눌 때 사용한 “기념하라” 와 같은 의미다. “기념하라”는 뜻은 “기억하다. 재생하다. 생각나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설교한 모습도 같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생 시키는 것이다.
비유와 은유와 시를 사용하여 상상력을 불어 일으키면서 과거에 행한 하나님의 일을 재생시키는 것이다.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노래라고 불리운 모세의 노래로 된 설교문이다. 후대에 잘 기억하고 암송하기 쉽게 노래와 시로 구성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일을 오늘에 재현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마치 눈앞에 영화를 보듯이 이미지가 그려지는 그런 설교다.
하나님 말씀을
오늘에 재현하는 것이 설교
베드로와 스데반과 바울의 설교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내용과 십자가 사건을 오늘 속에서 재현하고 기억하게 하는 내용으로 설교가 구성되었다. 이런 면에서 철저히 성경적인 내용으로 설교가 구성되었다. 다만 그 것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오늘의 언어를 사용하여 현 시대에 맞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예수님이 성선 청결사건은 이미 오래전에 성전 설교를 했던 예레미야 설교의 내용인 “강도의 굴혈“을 인용하면서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메시지를 전한다.
성경에 나오는 설교는 한결같이 성경의 사건을 오늘에 재현하는 설교다. 자기의 생각을 주석을 단다든지 그것을 애써 설명하는 방식이라기 보다는 이미 있었던 하나님의 사건을 오늘 속에서 재현함으로 기억나게 하는 설교였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 설교다. 여기서 설교는 철저히 과거의 말씀을 오늘 속에서 재현하는 의미가 있다. 사람이 설교를 쪼개어 다시 재구성하는 것이 아닌 이미 행하신 말씀과 구원사건을 어떻게 생생하게 전하느냐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설교자 자신부터 응답하고 성도들에게 선택을 촉구한다.
성경적 설교는 사람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닌 철저히 성경이 설교를 하는 방식이다. 말씀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역사하는 방식의 설교가 헤브라이즘 설교다. 본문 말씀의 본래의 의미를 살려 오늘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데 초점이 있다. 인간이 본문을 재단하거나 분리하여 재구성하는 방식이 아닌. 본문의 의미를 최대한 살려서 그것이 오늘 성도들에게 말씀 그대로 역사하게 돕는 설교다.
마치 최고의 요리사가 음식 재료를 그대로 살려서 그 맛의 향기를 내고 본래의 자연의 맛을 살려내는 것과 같다. 아마추어 요리사는 맛을 내기 위해서 식용첨가제를 넣어 달콤하게 만든다. 설교자가 이와 같다. 아마추어 설교자인가? 최고의 프로 설교자인가? 는 얼마나 말씀을 말씀되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하고 잘 풀이한다 해도 본래 그 성경 보다 더 잘하지 못한다. 만약 풀어주는 설교에 더 심취하고 본 재료에 맛을 느끼지 못하다면 그는 최고의 설교자는 아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철저히 말씀 속으로 설교자가 먼저 들어가 그 맛을 경험할 때 가능하다. 설교는 본래의 말씀을 오늘 속에서 재생하며 재현하는 것이다. 그 설교를 통해 주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물론 기억하고 생각하고 깨닫게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설교, 지금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교회 위기를 해결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