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회는 마틴루터의 로마서 1장 17절(의인사상(Justification))에 기초하여 탄생했다. “오직 성경”을 신앙의 모토로 삼고 날마다 신앙의 갱신을 이루면서 교회는 놀랍게 성장하고 발전해왔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본산인 독일교회를 비롯한 유럽교회들이 처음의 종교개혁 정신을 잃어버리면서 교회는 세속화 되었고 지금은 거의 구라파의 모든 나라의 교회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이것은 지금 한국교회도 그대로 영향을 받아 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다. 골든타임이 얼마 없는 한국교회는 교회개혁에 최우선을 두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유럽교회처럼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지금은 제2의 종교개혁이 절실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개혁의 구체적인 동선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위기의 상황을 공감하지만 여전히 신학교와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크게 이전과 달라진 점이 없다. 코로나가 그것을 촉구하는 기회였는데 코로나가 잠잠해진 지금의 모습은 예전과 같은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찰의 부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지금의 교회를 바르게 진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잘못된 것을 모르고 결국 회개도 일어나지 않는 강퍅한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처음 인간이 타락한 내용을 담은 창세기 3장을 다시 깊게 읽어야 한다. 인간의 죄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때 사단이 사용한 타락의 전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세운 규칙과 방법을 교묘하게 위장해서 사단의 방법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사단은 인본주의 방법을 제시하면서 결국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이 세운 에덴의 질서를 파괴했다. 이때 사용한 사단의 전술은 변조. 삭제. 첨가. 선택, 강조 등의 방식 등이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인본주의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의 방법을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점에서 가인의 제사는 믿음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제사를 드렸다. 결국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 거절되었다. 반면에 노아는 방주를 지을 때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순종했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이해가 안 되었지만 하나님이 명령한 내용을 그대로 순종한 것이다. 족장들의 이야기도 결국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과 인간의 방법을 따르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비교하여 전개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기의 방식을 포기했다. 반면에 롯은 자기가 보기에 좋은 땅을 선택했다. 이것은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방식은 애급에서 체득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존하는 애급의 황금송아지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다. 결국 이런 인간의 방식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을 훈련하기 위해 하나님의 방식을 담은 율법을 제시하며 그것을 따를 것을 명령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자기 방식을 고집함으로 전세대가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계속 이어졌다. 가나안의 바알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 사이에서 이스라엘은 결국 이스라엘백성은 바알방식에 지배를 당하면서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구약성경은 모두 방식과의 싸움이다.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것은 방법을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방법
VS
인간의 방법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는 천국시민의 삶의 방식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은 방식을 제시함으로 복음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을 따를 것을 권면하고 있다. 방식의 전환이 없다면 본질은 생각에 그친 죽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앙은 지식에 머물게 되고 영혼만 있고 몸이 없는 죽은 믿음이 된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까지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데 까지 나가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믿음은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믿음이다.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본질에 따른 방법과 메뉴얼이 필요하다. 성경은 방법과 메뉴얼로 가득 차 있다. 신앙은 삶이다. 그것은 방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왜 그동안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방법의 중요성을 갖지 못했을까? 처음 종교개혁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복음의 원리를 찾는데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오직 성경으로“ 교회개혁을 이루었지만 한 가지 놓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삶의 개혁은 부족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서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말한 것은 실천적 믿음에 대한 오해가 한몫했다. 실천적인 면을 율법적인 행위로 이해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것은 당시 중세교회가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이분법적인 신앙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을 그대로 답습한 때문이다. 대부분 종교개혁자들도 오직 성경에 대한 확신을 말했지만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하는 방법의 개혁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면서 믿음은 강조한 반면에 행함이 약화되었다. 이것은 결국 실천적 신앙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이성적, 학문적, 사변적이 되는 요인이 되었다. 2000여년 동안 개신교회는 아직 이루지 못한 방법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어야 했는데 그대로 답습해왔다. 그 결과 시간이 가면서 교회가 힘을 잃고 교회가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이렇게 형성된 잘못된 흐름을 전환시키려면 지금이라도 믿음을 행함과 같이 연결하는 신앙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실천적 믿음을
율법적인 행위로 오해
그동안 한국교회 역시 원리만 추구하고 방법은 등한시 했다. 그 이유는 이미 오랫동안 인간을 지배한 인간적 방법 때문이다. 본래 사람은 원리 보다 자기방법을 고집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신앙에서 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은 율법주의나 행위를 추구하는 것처럼 오해하여 그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이미 헬레니즘으로 오염된 이분법적인 생각의 영향 때문이다. 더 큰 원인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거부감이 핵심이다.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자기 방식으로 살고 싶은 죄악 된 인간의 속성이 원인이다.
종교개혁에서 믿음만 강조하고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게한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이 크다. 본래 원리와 방법은 같은 것이다. 믿음과 행함이 분리될수 없다. 원리와 방법은 서로 하나다. 물론 여기서 방법은 세상 방법이 아닌 성경적 방법을 말한다. 말씀원리에서 나온 방법이다. 이미 성경속에 수많은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말씀과 삶의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앞으로 한국교회 개혁의 과제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 그것을 진정 감사한다면 이제 앞으로는 구원 받은 자가 어떻게 행할것인 가를 깊게 고민하고 그것을 이루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원리 속에 방법이 있음을 믿고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는 일이 주된 삶이 되어야 한다. 믿음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을 성경 속에서 찾아 적용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때 세상의 방식을 적용하려는 사단의 시도에 조심해야 한다. 오늘도 사단은 한 번에 해결하는 욕심을 부추기며 인본주의 방법으로 우리를 미혹한다. 교회안에 성경을 떠난 인본주의 방법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세상의 방식을 선호하다 보면 나중에는 본질이 사라진다. 그래서 방법이 중요하고 방법은 결국 본질과 연결된다. 알고 있지만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천을 위한 방법이 도출이 안 되면 결국 지식에 머물게 된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방법을 기다리며 찾고 기도하면 성령께서 알려주신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을 찾아 가는 것이 매일의 과제다. 다윗이 블레셋을 쳐들어갈까요? 아니면 멈출까요? 전쟁을 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할까요? 이렇게 하나님께 여쭙는 다윗과 같은 방법이 우리에게 필요하다.제1의 종교개혁은 본질에 대한 개혁이었다면 제2의 종교개혁은 본질을 실천하는 방법의 개혁이다. 세상의 방법이 아닌 성경에서 계시된 방법을 기도로 우리의 실천방법을 찾아야 한다. 교회안에 인본주의로 위장해 들어온 불신앙적인 방법들이 많다. 이것들을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 우리 안에 오랫동안 고수하고 있는 아간과 같은 인본주의 방식을 진멸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 방법을 고수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다. 다니엘이 바벨론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에스더가 세상의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방법을 따를 때 주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오늘 우리도 말씀을 따라 지켜 행하는 방식의 개혁이 나부터 일어나는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