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도 성령강림절 스무째 주간

 

1. 응답받는 기도 (눅 18:1-8 찬송가 91장 슬픈 마음있는 사람)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모든 일이 잘 되고 모든 일이 다 이루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해도 노력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낙심하기 쉽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이런 복음성가가 떠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자녀된 자들인데도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는 우리 모습속에서 그런 면을 발견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다녔던 제자들도 우리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의 서두에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속에서 하나님과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 등장합니다. 그가 불쌍한 과부의 원한을 들어주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힘없는 과부의 원한을 들어 주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과부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밤낮으로 끈질기에 자신에게 찾아오는 것이 재판관에게 번거로울 뿐 아니라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5절).”과부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계속찾아갑니다. 재판관은 잃을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구설수에 오를 수 있습니다. 재판관 집앞에 매일 찾아가는 과부를 사람들이 볼 때 저 과부하고 재판관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비유를 듣고 있는 예수님의 청중이 누구인가? “그들에게”라고 합니다. 17장 22절에 보면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라고 합니다.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유 속 누구와 동일시하고 있는가? 청중인 제자들은 원한을 가진 과부에 해당합니다. 청중들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을 과부와 동일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청중들이 과부처럼 원한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억울하게 십자가에 못 박힌 일 그리고 유대 당국자들이 제자들에게 압박을 하는 일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공의가 세워지지 않고 불의가 판치고 있는 일, 이 땅에 빈부차가 심하고 세상이 공평하지 않게 돌아가는 일 이것이 과부의 원한과 같은 제자들의 원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유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조차도 불쌍한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밤낮 부르짖는 택한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응답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7절)”
하나님은 오늘 우등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다고 한다면 선하시고 공의로운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원한을 훨씬 더 잘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속히 그 원한을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이 원한을 풀어주시려고 재림하실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주님께서는 반드시 재림이 도래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가 가까워 질 때에 믿는 자들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유인즉 재림의 지연 때문에 재림에 대한 의심이 생기고 재림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재일 지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 오시는 것이 많나 하나님 살아계신 것 맞나?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 맞나?하고 의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을 가진 택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원한을 속히 풀어주신다고 하십니다.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2. 낙심말고 기도하기 (눅 18:1-8 찬송가 104장 곧 오소서 임마누엘)


“기도할 수 있는 데 왜 염려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왜 방황하십니까?” 이런 복음성가가 떠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자녀된 자들인데도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는 우리 모습속에서 그런 면을 발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다녔던 제자들도 우리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의 서두에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 불쌍한 과부의 원한을 들어주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힘없는 과부의 원한을 들어 주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 과부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밤낮으로 끈질기게 자신에게 찾아오는 것이 재판관에게 번거로울 뿐 아니라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5절).”
그렇다면 비유를 듣고 있는 예수님의 청중은 비유속 누구와 동일시하고 있는가? 청중인 제자들은 원한을 가진 과부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비유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조차도 불쌍한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밤낮 부르짖는 택한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응답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7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속히 그 원한을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이 원한을 풀어주시려고 재림하실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중요한 핵심은 우리들의 기도를 주님이 들어주실까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끝까지 의지하고 기도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3. 새 언약 (렘 31:27-33 찬송가 546장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예루살렘이 제 1차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위되었던 B.C. 597년 이후에 수 천명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제 2차로 예루살렘이 포위되었던 것은 B.C 587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의 1차 포위 후에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간 직후 2차 포위 이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유다 집과 이스라엘 집과 새 언약을 맺을 날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길 것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백성들과 새 언약을 체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옛 언약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배반하고 깨트릴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된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언약을 깨트린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에는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깨트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법을 백성들의 마음에 새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백성들의 마음에 자신의 법을 새긴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조건없이 자기 백성을 용서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용서가 유다집과 이스라엘 집의 백성들과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새로운 관계를 가능케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백성간에 새로운 관계는 예루살렘에 완전한 파괴가 온 후에 생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순간에 하나님의 법이 그들이 깨트릴 수 없도록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2-33절)”

 

4. 꿀보다 단 주의 말씀 (시 119:97-104 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시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 따라 이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각 절의 시작이 히브리어 멤(m)에 해당된 부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혼잣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기를 하루 종일 일삼아 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토록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시인이 원수보다 지혜롭게 된 것이 주의 계명들이 함께 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스승보다 더 명철하게 된 것이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린 덕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시인은 주의 말씀의 맛을 아는 자입니다. 그가 왜 주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는가? 주의 말씀이 입에 꿀보다 더 달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절).”
시인에게 주의 말씀은 무엇인가? 그의 발에 등이요 그의 길에 빛입니다. 주의 말씀이 아니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전진할 수 없는 어둠속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이처럼 사랑하고 사모하는 시인은 언제부터였는가? 주님 말씀의 가치를 깨닫는 순간 이후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은 세상에서 실퍠 경험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서에 나온 것처럼 뽑고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전복시킨 이후에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씨를 뿌릴 날이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가 기다리는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종말이 찾아올 것입니다. 종말의 경험을 하는 것 때문에 깨어 일어나 영적인 각성과 번영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종말의 경험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잘 들려오는 일입니다. 부모로부터 꾸지람을 듣지 않고도 부모님의 말씀이 잘 들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려오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5. 구원의 진리 성경 (딤후 3:14-4:5 찬송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바울이 옥중에서 전도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고난을 겪고 있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전도자로서 디모데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인가? 목회자의 올바른 진리에 관심이 없고 다른 가르침인 별미에 더 귀를 기울이는 청중 때문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3-4절).”
목회자로서 양떼들의 영적 건강을 생각하면서 속앓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디모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양떼들의 영적 건강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최근의 유행과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대안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최신의 사상과 이론을 추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바울은 옛 것에 해당하는 전통에 관심을 돌릴 것을 추천합니다. 전통 중에서도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쏟아지는 신사상과 학문들과 신문화를 접하는 상황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전통과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권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본에 충실할 때에 교회 내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풍조에 떠내려가지 말고 처음에 가르침을 받았던 것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속에 있는 기본원리인 구원의 진리입니다. 어려서부터 알았던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도들을 따를 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14-15절).”
그렇다면 복음 전도자는 어떻게 성경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사람의 사람을 온전하게 세우는 일과 선한 일을 하는데 필요한 자격을 준비시키는 데 필수적인 책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문제가 있고 성경속에 해결책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16-17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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