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만과 겸손 (눅 18:9-14. 찬송가 586장 어느민족 누구게나)
오늘은 종교개혁 502년 맞이하는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과 맞서서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로 오 구호를 외치면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믿음으로 종교개혁에 착수했던 것입니다. 그가 원래 종교개혁하려는 사람 아니었습니다. 가급적 부딪치기 싫어했고 그런 일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고집했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은 이것이라고 표현했을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뜻을 제대로 밝히려고 하다가 보니까 로마 카톨릭과 싸움으로 발전해 간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걔혁을 까지 간 것입니다. 그가 종교개혁을 할려고 해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내가 하기 싫어도 하나님이 몰아가면 믿음의 새로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 결과가 종교개혁이고 작은 개혁이 된다고 봅니다.
루터는 당시 큰 권력기관이 된 카톨릭과 싸우면서 찬송가도 작시했습니다.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585장 찬송가.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루터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저는 시편 23편을 암송했습니다. 제 찬송은 시편 23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에 타협하지 말고 믿음으로 도전하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오늘 루터가 승리하고 우리들이 승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승리한 종교개혁을 기념하여 그 기념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의 의”가 “하나님의 의”를 대신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공의는 사라지고 인간의 술수와 조종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보다 사람을 배제하는 인간의 악함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 약한 자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는데 교회마저도 그렇게 변질되어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보다 인간의 의를 주장하고 힘있는 사람의 말을 따르고 그들이 가진 권력을 마구 휘두르고 횡포하는 것은 부패입니다. 그 부패와 맞서서 우리들이 용기를 가지고 서야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슬쩍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고 힘이 없어질 때 그렇습니다. 저도 많이 고민했습니다. 편안하고 쉽게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안가면 머리가 아프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신앙의 양심을 통해 우리를 더 강하게 압박하고 찌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 사람은 부패를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종교개혁주일의 의미는 인간의 의가 하나님의 의보다 앞서가는 그 자리에서 우리가 “No”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영광받으시고 하나님만이 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다스려야지. 어떠한 인간의 힘있는 권세도 우리를 억압해서도 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주일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인간의 의가
하나님 보다 앞서가는
모든 것들에 NO! 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정신
오늘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비유를 듣는 청중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멸시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바리새인은 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나는 죄인들과 세리와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식과 십일조의 의무를 잘하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떨어져서 감히 눈을 들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면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외관상 볼 때에 누가 더 의롭게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법정에서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법적 효력이 있는 발언이 됩니다. 기도하는 외관적 모습만 볼 때에는 바리새인은 의인처럼 세리는 죄인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중에 가서 말씀하시기를 집으로 돌아갈 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 세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의롭게 보이는 바리새인보다 죄인으로 보이는 세리를 더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 이 부분을 놓고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물의 흐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물이 고이는 법이 없습니다. 물은 내려와서 골짜기에 고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낮은 곳에 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교만합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것처럼 교만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머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흘러서 골짜기와 같은 겸손한 세리에게 갔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회개하고 있는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내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이 그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복을 받고 은혜를 받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세리가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큰 틀에서 이야기를 분석해 보고 싶습니다. 바리새인의 특징을 보고 싶습니다. 바리새인은 “나”를 매우 중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11절)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12절).”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상당히 중시하는 “나 중심”의 사람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왜 성전에 가는가? 이 사람은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성전에 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사람은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까지도 판단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자기중심에서 판단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리에 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변화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부족함이 없고 신적인 존재와 같이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특징속에서 볼 때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보다 낫다고 하고 비교 속에서 자신의 자랑거리를 찾는 것입니다. 비교 속에서 저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 속상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의 주체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근대 이후에 근대 철학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당시에는 우리 사람들이 객체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중요한 인물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나 주체를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가 서구 근대국가입니다. 이제는 유럽의 선진국들로 자리 잡았습니다. 서구 선진국의 주체는 나 중심의 주체입니다. 이 주체의 변화가 없는 한 이 세계의 평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개인으로 출발할 때는 문제가 없었으나 그것이 국가의 힘으로 발전해 갈 때에 그것이 제국주의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제국주의가 무엇입니까? 나 중심의 주체가 국가로 발전하고 국가가 나중심의 주체를 가지게 되는 것이 제국주의입니다. 제국주의의 문제는 제왕적 권세를 가지고 다른 국가를 평가하고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구의 주체가 바뀌지 않으면 이 세상에 평화는 없습니다. 가진 자와 힘있는 자가 주체의 전환을 해야 할 것입니다. 힘있는 자가 자기를 중심 주체로 다른 모든 사람을 평가하고 조종하고 배제하면 그 힘 앞에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나 중심의 주체가
국가로 발전한 것이
제왕적 제국주의
오늘 바리새인이 무슨 죄를 범하고 있는가요? 오늘 바리새인이 그 주체에 있어서 자기중심적 주체를 세우고 있고 하나님을 배제하고 모든 사람을 배제할 도구를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심을 필요하지 않고 자신의 제왕적 권력을 확보하고 자신이 제황이 된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내가 잘하기 때문에 내가 의롭기 때문에 내가 자랑거리가 많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그가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얼굴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자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방 받고 소외당하고 왕따 당하고 있습니다. 그가 관리로서 세금을 거두어 이방나라에게 바치고 그리고 그가 돈을 떼어먹고 부자가 되었다고 낙인찍혔기 때문입니다. 국가 관리로서 충성을 하였으나 무엇이 잘못이 있는 지 자신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얼굴을 감히 들지도 못하고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고 하나님 앞에 죄인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긍휼을 받으면 그가 감격할 것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용서를 사모하고 긍휼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누구에게 주고 싶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입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 주일에 오늘 우리 사랑하는 가족들이 세상속에서 살다가 와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자리에서 무엇을 얻어가는 것이 목적입니까? 남들과 비교해서 남들보다 잘낫네 내가 남보다 더 성공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하러 왔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복을 받았다고 확인하러 왔습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러 온 것 아닙니까? 예배하러 왔다면 우리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경험하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변화가 바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임재 경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예배 중에 오십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옷자락에 손을 대었던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혈루 근원이 낫겠다고 하여 그 옷가에 손을 대고 혈루병을 치료받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자리가 예수님의 옷자락이 내려 온 자리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댈 수 있는가? 마음이 부드럽고 마음이 깨끗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입니다. 그같은 믿음을 가진 자가 반드시 하나님의 옷자락에 터치하는 사람입니다.
1년 지나면 몇 번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까? 52주입니다. 30년 동안 다녔으면 몇 번이나 변화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1,560번입니다. 예수님처럼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변화를 입었습니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의를 입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예배 속에 찬양 감사있고 돌아갈 때 감격을 맛보기 위해 교회에 온 것 아닙니까? 돌보라가 더 많은 권세를 더 많은 복을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 권세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종교개혁 주일에 예수님이 기뻐하는 세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자기를 낮추는 자 (눅 18:9-14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바리새인은 서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자신은 죄인들과 세리와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식과 십일조의 의무를 잘하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멀리 떨어져서 감히 눈을 들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면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외관적 모습만 볼 때에는 바리새인은 의인처럼 세리는 죄인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의롭게 보이는 바리새인보다 죄인으로 보이는 세리를 더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비유와 청중과의 관계에서 보면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비유로 하셨습니다. 비유를 듣는 청중들은 비유를 듣는 중에 자신의 입장에서 좋게 보이는 사람을 쉽게 지지하는 성향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현실을 돌아보면서 자기 자신과 이야기 속 인물이 다름을 확인합니다. 자기를 옳다고 주장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바리새인 편에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을 옳다고 주장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사죄 은총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성전에 올라왔을지라도 그는 성전에 올라가기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이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옳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사죄를 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전에 온 목적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기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때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일 외에는 아무런 변화를 입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변화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것도 받지 못한 자리에 있게 됩니다.
반면에 세리는 성전에 온 목적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뉘우쳤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그가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입고 변화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뀌어진 것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4절).”
3. 하나님의 의의 옷 (시 65편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오늘 본문은 성소를 중심 배경으로 된 시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성전을 온 세계의 중심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성전에서 설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 그곳은 지성소와 성소도 아닙니다. 그곳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성소의 뜰에 불과합니다. 성소도 지성소를 밟아보지도 못하고 겨우 성소의 뜰을 밟는 것에 불과할 뿐인데 왜 시인은 이처럼 성소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일까? 성소에서 찬송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찬송은 시온의 성소에 주님이 임하시는 것을 기다리며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께 올리고 있는 찬송과 경배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이행하기로 다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1절).”
그런데 성전의 뜰에 오기 전부터 오기까지 시인과 백성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성전의 뜰에 오기 전에 백성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허물많은 백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시인과 그들이 죄악에 정복당하여 허물 많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광야에서 조상들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방황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을 배반하고 방황하던 시인과 백성들이 성전 뜰까지 오기까지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의 의로는 그들 속에 잠재되어있는 허물과 죄악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포장된 의로는 하나님의 성전의 뜰 근처도 갈 수 없었습니다. 시인과 백성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성전의 뜰까지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이 이곳까지 올 수 있게 되었는가?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2절),”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5절).”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응답이 무엇인가? 그들의 허물을 하나님이 사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함받은 허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의 옷으로 덮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은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며 구원받은 것입니다. 시인이 성소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구원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소의 뜰까지 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4절).”
허물을 사하시는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
그렇다면 시인이 성소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는 그 만족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오늘날 물질 때문에 만족할 것 같은 우리와 다른 만족입니다. 그 만족은 영혼의 만족이요 하나님과 순수한 영적 소통의 관계에서 오는 만족입니다. 어떻게 해서 시인은 그 만족을 성소에서 맞볼 수 있었는가? 그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순수하게 의지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입혀주신 하나님의 의와 권위의 옷 때문입니다.
4. 평안과 대담함 (딤후 4: 6-8, 16-18 찬송가 240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
디모데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바울이 로마감옥에서 쓴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는 말은 바울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직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을 때 제일 먼저 마음에 찾아오는 손님이 공포와 두려움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위해 일생을 다 바친 노 사도가 지금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을 것으로 디모데는 생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길이 자신이 가야할 길이라고 직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일찍이 알아차린 데마와 그레스게 그리고 디도 같은 다른 동역자들은 세상을 사랑하여 이미 바울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10절).”
그런데 오늘 노 사도가 디모데에게 주시는 본문의 분위기에서는 두려움이나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평안과 대담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노 사도가 이처럼 두려움을 극복하고 평안과 담대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노 사도는 죽음을 모든 것의 끝이라기보다 경주자가 달려갈 고울인 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울인 지점을 통과한 경주자가 시상대 앞에서 자기가 받을 상을 기다리듯이 노사도는 면류관을 들고 서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복음만을 위해 평생 달려온 노 사도의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앞에서 평안을 유지하고 담대한 노 사도의 신앙을 지탱하고 있는 그 바탕은 무엇인가? 그것이 소망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노 사도는 평생 동안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는 어떤 좋은 보수도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선물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앞에서 받을 상을 마음에 그리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부활하신 주님 앞에 면류관을 받아 쓰게 될 것이라는 소망 넘치는 확신을 그 마음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7-8절).”
5. 상한 마음 (욜 2:23-32 찬송가 184장 불길 같은 주성령)
선지자는 “그 때”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이라고 합니다. 그 때에 모든 사람들과 남종과 여종이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에 모든 사람들과 남종과 여종이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이 단단하던 사람의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순간이 두려움 직감할 때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이란 부서지고 상한 마음입니다. 부서지고 상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부서지고 상한 마음은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두려운 일을 만날 때 사람은 그 마음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주의 이름의 권능의 위대함을 신뢰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가 나의 마음을 감싸고 있는 보자기가 벗겨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들어오는 순간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영혼이 소생되는 순간이 이 때입니다. 과거에 모든 것을 판단하는 주인의 자리에 앉았던 높은 마음이 바뀌어 하나님을 주인으로 맞이하는 자리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주의 두려운 날이 임할 때 구원을 받고 살아남게 될 자들은 성령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로 인하여 기쁨과 평화가 넘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