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위스(die Schweiz)에 대하여

스위스는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에 둘러 쌓인 내륙국가로 칸톤(Kanton)이라 부르는 26개 자치 주(自治 州)로 이루어진 연방국가(Confoederatio Helvetica)이며 인구는 850만 명이다. 
수도는 스위스 중심부에 위치한 인구 15만명의 중세 풍의 도시 베른 (Bern)이다. 스위스의 면적은 41,285제곱킬로미터로 대한민국 영토의 반절 크기이며 위도 상으로는 한반도와 같은 위치에 있고, 한반도처럼 전 국토의 7할이 산악지역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스위스 국경을 벗어나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쪽으로 가면 좀처럼 산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평야만이 전개된다. 
                                                  
종교적으로는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이며, 카톨릭과 개신교의 비율은 대략 49대 49이다. 전 인구의 2퍼센트 가량이 무슬림인데 그들 중 상당 수가 스위스에 정착한 터기인 노동자들이거나, 쿠르드인 난민들이다. 

스위스에서는 4개 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전 인구의 63.5퍼센트 가량이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취리히, 바젤, 베른, 쌍트 갈렌, 루체른, 등 19개 주가 독일어 사용지역이다. 전 인구의 22.5퍼센트 가량이 불어를 사용하는데 제네바, 로산, 프리부르그, 몽트루 등이 불어 사용지역이다. 전 인구의 8.1퍼센트 가량이 이태리어를 사용하는데 남부 테신 주의 루가노, 로카르노 등이 이태리어 사용지역이다. 그리고 전 인구의 0.5 페센트 가량이 레토로로마니쉬(Rätoromanisch)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라우뷴덴 주(Kanton Graubünden)의 일부가 레토로로마니쉬 사용지역이다.

 

2. 스위스 한인교회(취리히 중앙교회, 바젤 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의 위치

 

스위스 한인교회는 취리히 중앙교회, 바젤 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의 연합체인데 보다 정확히 말해서 1983년 이래 스위스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정효 목사가 목회하는 3 지역교회를 가리킨다. 
교통연결이 잘 되어있고 기차와 버스와 전차(Tram)의 운행시간표가 편리하게 편성이 되어있어 자동차 없이 3 지역을 순회하며 사역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1) 취리히 중앙교회는 취리히에 근거지를 둔 한인교회이다. 

주일예배(오전 10시)와 수요 성경공부모임(저녁 7시)과 토요일 새벽기도(오전 7시)가 있다. 그리고 국제결혼을 한 교인들을 위해 남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사역이 병행되고 있다.

취리히 시(Stadt Zuerich)는 취리히 주(Kanton Zuerich)의 중심도시로 인구 40만의 상공업 도시인데 취리히 주 전체인구는 80만명이다. 취리히는 중세기 때부터 바다처럼 넓은 거대한 호수를 끼고 발달해온 중세기 풍의 풍광이 빼어난 도시이다. 
호반의 도시답게 공기가 맑고 숲이 우거져있으며, 교통과 상공업의 중심지로 통계상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도시 1위로 지목되고 있다. 
내륙국가인 스위스의 대도시답게 유럽 각 도시로 연결되는 고속열차운행이 고루 편성되어 있어 열차로 베를린, 빈, 파리, 런던, 밀라노, 로마, 마드리드, 모스크바 등의 유럽 주요 도시들을 쉽게 여행할 수 있다. 
그리고 취리히 시 중심지에서 기차로 10분 거리에 취리히 국제공항이 있는데, 한국의 인천공항처럼 타 지역으로 가는 비행기로 옮겨 타는 환승객들이 많아 항상 공항이 붐빈다. 
취리히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가는 여러 항공편들이 있는데, 대한항공은 주 3회 직항 편을 운행하고 있다. 

취리히는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동시대의 인물인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가 취리히 시의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종교개혁을 단행한 곳이다. 
당시 취리히, 베른, 바젤, 제네바 같은 스위스의 도시들은 상공업의 발달로 재정자립이 이루어져 있었으나, 그 밖의 지역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취약하여 로마교황청의 재정지원에 절대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들은 로마교황청의 재정지원을 받는 대신 로마 교황의 군대를 위해 용병을 파견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청은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을 무산시키기 위해 그들의 재정지원을 받는 카톨릭지역으로 하여금 군대를 조직하여 취리히 시를 공격하게 했는데 루체른 시가 선두가 되었다.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전적으로 후원했던 취리히 시는 그들의 공격에 맞서 두 차례나 큰 전투를 치러야만 했는데, 루체른이 주축이 된 카톨릭 연합군에 수적으로 열세였던 취리히 시의 방어 군들은 시의회 의원들과, 목사, 교사들까지 총동원되어 그들에 대항했는데, 쯔빙글리는 제 2차 전투인 카펠 전투에서 47세의 한창 나이에 전사했다. 
당시 카톨릭 군은 부상당한 쯔빙글리를 붙들어 참혹하게 살해한 후 그의 시신을 불태워 재를 바람에 날려버렸다. 

쯔빙글리는 그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취리히 시는 그의 충실한 동역자 불링거(Heinrich Bullinger)로 하여금 쯔빙글리의 뒤를 이어 종교개혁을 완수하게 했다. 

지금도 취리히 시 호수가 언덕 위에는 쯔빙글리가 시무하며 종교개혁을 수행해 나갔던 교회당과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던 부속건물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많은 순례자들이 찾고 있다. 
쯔빙글리는 무덤이 없기 때문에 취리히 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85년에 쯔빙글리 기념교회당 아래 호숫가에 그의 동상을 제막하고 시의회 주관 하에 대대적인 행사를 치렀다.

 

(2) 바젤 한인교회는 바젤(Kanton Basel)에 근거지를 둔 한인교회이다. 

주일예배(오후 3시)와 목요 성경공부 모임(오후 2시 30분)이 있다. 
그리고 취리히 중앙교회와 마찬가지로 국제결혼을 한 교인들을 위해 남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사역이 병행되고 있다.

프랑스,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바젤 시(Stadt Basel)는 라인 강을 끼고서 발달한 중세 풍의 도시로 중세 때부터 상공업이 발달하여 학문적으로도 이웃 나라들과의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었다.                                          바젤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약회사와 화학회사들이 있는데, 산도즈(Sandoz), 노바르티스Novartis), 신젠타(Syngenta)등이 바젤의 대표적인 제약, 화학 회사들이다. 바젤 시(Basel Stadt)의 인구는 17만이지만 바젤 주(Kanton Basel) 전체의 인구는 70만 명이다.  
                             
화란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 -1536)가 유명한 출판업자였던 요한 프로벤(Johann Froben)과 함께 최초의 인쇄성경을 출판한 곳이 바젤이다. 에라스무스가 편집 출판한 최초의 인쇄성경은 헬라어-라틴어 대조 본이었는데, 에라스무스는 이 작업을 위해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했던 독일의 종교개혁자 요한네스 외콜람 파디우스(Johannes Oekolampadius, 1482-1531)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외콜람 파디우스는 바젤 시의회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아 바젤 시의 종교개혁을 수행했다. 
쯔빙글리 보다 한 살 위였던 외코람 파디우스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위해 취리히의 쯔빙글리와도 긴밀히 협력했는데, 쯔빙글리가 카펠 전투에서 카톨릭군에게 무참히 살해 당한 후, 그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쯔빙글리가 죽은 지 한달 만에 그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 역시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종교개혁 사상은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신학과 교리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사후 프랑스에서의 박해를 피해 바젤로 망명한 젊은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Jean Calvin, 1509-1564) 은 이 곳에서 외콜람 파디우스의 신학과 교리학을 학습한 후, 이를 한층 발전시키고 체계화시킨 기독교강요 초판을 저술하여 1536년에 출판했다.
 
바젤 대학의 신학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이곳에서 신학강의를 하며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3) 인터라켄 쉼터교회는 세계적인 관광명소인 인터라켄(Interlaken)에 근거지를 둔 교회이다. 

인터라켄에는 한식당이나 민박 또는 여행가이드를 하는 소수의 한인들만이 체류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터라켄 쉼터교회는 순전히 여행자들을 위한 교회로 CTS 방송에서도 한차례 소개된바 있다. 매주일 저녁 8시 15분에 여행자들을 위한 예배가 있다.

인터라켄(Interlaken)이라는 지명은 라틴어로 호수와 호수 사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인터라켄의 상주인구는 채 만 명 도 안되지만 인터라켄과 인근지역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호텔이 70여개나 있을 정도로 사시사철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인터라켄 지역은 양 옆으로 풍광이 수려한 툰 호수(Thunersee)와 브린츠 호수(Brienzsee)를 끼고 있고, 인터라켄 인근에는 스위스 민속촌 발렌베르그(Ballenberg)가 있으며, 인터라켄 역에서 출발하는 산악열차는 사시사철 수많은 관광객들을 눈 덮인 산 아이거(Eiger, 3967m)와 융프라우(Jungfrau, 4158.2m)와  쉴트호른(Schilthor, 2970m) 등지로 실어 나른다.

 그러나 인터라켄 지역이 원래부터 세계적인 관광지는 아니었다. 
인터라켄은 원래 수도사들이나 순례객들이 찾아와 기도하고 가는 성지(聖地)였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인터라켄 부락 전체가 수도사들의 기도처소였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주후 6세기에 아일랜드에서 파송된 선교사 베아투스(Beatus)가 스위스의 깊은 내륙지방인 호숫가 마을 툰(Thun)에 정착했고, 그는 호숫가(Thunersee) 언덕 위에 있는 커다란 동굴 입구를 거처로 정한 후, 툰 지역을 비롯해서 인접한 산동네들과 호수 끝에 있는 마을인 인터라켄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죽어 그가 거처로 삼았던 호숫가 언덕 동굴입구에 묻혔다. 그의 활동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사후에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성자란 칭호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선교사역이 그만큼 소중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

성 베아투스가 죽은 후 많은 순례자들과 수도사들이 찾아와 그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기도하고 갔다. 
그러던 중 1130년 프라이헤른 셀리거(Freiherrn Seliger)라는 수도사가 순례자들을 위해 인터라켄 마트(Matt)에 기도의 집을 세웠는데, 어거스틴파 수도사들이 이를 기반으로해서 정식 수도원을 개설했다. 황제 로타르 2세(Kaiser Lothar 2세)와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들이 인터라켄 수도원에 넉넉한 재정지원을 해줌으로써 인터라켄 전 동네가 하나의 수도원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인터라켄수도원은 풍기문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남녀수도원으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인터라켄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매일 새벽 3시반에 기상을 했고, 그때부터 2시간반 간격으로 기도, 찬양, 말씀묵상을 저녁 8시반까지 되풀이했다. 정식 식사시간은 하루 한번 오후 2시 이전이었다.  
수도사들에게 그만큼 철저한 금욕생활을 시킨 것이다. 

인터라켄 수도원이 생긴 지 400년이 되던 해에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가 카톨릭 군과의 전투에서 순교(1531.10. 31)했고, 그 후 5년 후 프랑스의 젊은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이 제네바에 입성했다. 그리고 요한 칼빈에 의해서 마르틴 루터와 쯔빙글리의 미완의 종교개혁이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완성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교회를 위한 당신의 작정계획들을 갖고 계시는데, 이 작정계획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많은 기도의 수고를 하게 하신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의 길고 혹독했던 종살이 400년간(창세기 15:3)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 후 마침내 출애굽의 감격과, 광야에서의 만나와 생수의 기적을 체험하게 하신 것처럼, 종교개혁의 그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터라켄 수도원으로 하여금 중세 암흑기 400년 동안 긴 기도의 수고를 쌓게 하신 것이다. 

인터라켄 수도원은 인접해있는 베른 시(Bern)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베른 시 주민들은 인터라켄 수도원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영적으로 깨어있었고, 가장 먼저 종교개혁 신앙을 받아들였다. 
당시 베른과 취리히와 제네바는 동맹관계였는데, 막강했던 베른 시의회는 취리히와 제네바에서의 종교개혁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도록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3. 스위스 한인교회(취리히 중앙교회, 바젤 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의 역사

 

(1) 취리히 중앙교회

취리히 중앙교회의 시작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취리히에 유학 온 순복음 교단의 이건승 목사가 몇몇 교인들과 예배모임을 가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교인 구성원은 여행사 직원, 한식당 종사원, 간호사, 국제 결혼으로 이주해온 가정주부로 스위스에 정착한 교민들이었다. 
이건승 목사의 사역기간은 길지 않았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기 때문이다.
 
이건승 목사의 뒤를 이어 취리히에 유학 온 고신 교단의 강용원 목사가 설교사역을 담당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교인구성원에는 변화가 없었다. 
강용원 목사가 학위를 취득한 후 사역의 바톤은 같은 고신 교단 소속인 전병두 목사에게 넘겨졌다. 
이때부터 교회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전임 목사들은 학업에 열중했던 반면 전병두 목사는 목회에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무렵부터 경제 고도성장을 이룩한 한국의 위상에 걸맞게 한국기업들도 해외 지사들을 두기 시작했기 때문에 취리히에도 상사직원들이 다수 상주하게 되었고 이는 곧 교회부흥으로 이어졌다. 
전병두 목사가 사역하기 이전의 교회 중심역할은 정착해 살고 있는 소수의 교민들의 몫이었지만, 잘 훈련되고 교회봉사 경험이 많은 상사직원들의 수가 늘어남으로써 상사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교회운영의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현지 교민들과 상사 직원들 사이에 긴장관계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병두 목사가 사임하고 미국으로 이주해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예장 합동 측 목사인 김정효 목사가 담임 목사로 청빙되었다. 
이 때가 1995년 6월이었다. 김정효 목사의 부임과 함께 현지 교민들과 상사 주재원들 간의 갈등관계도 잠잠해졌다. 
그리고 교회는 양적으로도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교회의 양적 성장에 걸맞게 큰 행사들을 치르는 과정에서 두 그룹 사이에 갈등관계가 재현되었고, 이는 곧 교회분열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에 IMF 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상사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일시에 귀국했다. 

교회는 평화로워졌지만 교회규모는 축소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IMF 사태 여파로 한식당 종업원으로 있던 교인들이나 여행 업에 종사하는 교인들의 생활이 매우 궁해졌다.
이 때를 기해 한국에서 수십 명의 농자(聾者)들이 몰려와 교회의 빈자리를 채워줬다. 
교인들은 그들을 반겼지만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그들의 체류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벌이 수단으로 길거리에 나가 열쇠고리 같은 액세서리들을 팔았는데 이 또한 불법행위였다. 
김정효 목사와 사모는 그래도 이들을 따뜻이 보살폈고, 농자들은 김목사 부부를 부모처럼 의지했다. 
농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갈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빈자리를 정상적인 새 교인으로 채워주셨다. 
이전의 상사직원의 자리를 유학생들이 채워준 것이다. 
하지만 김목사 부부는 이제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많은 수고를 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학생 수도 점차 감소되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스위스의 비싼 물가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지 교민들도 나이 들어 한국의 자녀들에게 가거나 세상을 떠남으로써 지금 현재의 교회상태는 많이 위축되어 있다.
 
한 때는 국제결혼으로 정착한 교인들이 교회를 안정감 있게 함께 이끌어줬으나, 그들 역시 현지 어에 익숙해짐으로써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현지 교회로 한 사람 한 사람 옮겨 갔다. 
교회로서는 매우 아쉬운 부분이지만 그럼에도 긍정적인 측면은 그들이 이곳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는 과정에서 교회가 안정감 있게 적응해나가도록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가 회복됨으로써 한국기업들도 다시 해외지사를 두기 시작했지만 이전과는 달리 대부분 현지 법인화시켜 현지인들로 하여금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있다. 

지금 현재 취리히 중앙교회는 많이 위축되어 있지만 그래도 지난 30여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했고, 그들과 고락(苦樂)을 함께 하며 그들이 이곳 사회의 구성원으로 훌륭히 적응해나가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2) 바젤한인교회

바젤 한인교회는 1980년 대 초에 스위스에 유학 온 정갑진 목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정갑진 목사의 사모가 간호사였기 때문에 교회 구성원도 대부분 간호사였다. 
그들은 대부분 독일에 파독 간호사로 취업을 나왔다가 계약기간이 만료된 후 스위스로 옮겨온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그 수 역시 많지는 않았다. 

정갑진 목사가 학업을 마치고 한국의 한 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 되어 간 후 예장 합동 측의 김정효 목사가 1991년 1월에 후임으로 부임했다. 이때부터 교회는 안정감 있게 성장을 했다. 
그러나 당시 교회 구성원 대부분이 초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김목사는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교회가 안정적으로 운영 되자 바젤에 유학 온 학생들과 바젤의 제약 회사와 화학 회사에 취업을 한 한인 교인들이 주일 예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교인 수는 40여명으로 불어났고, 유학생들 대부분이 음학공부를 하는 학생들인데다가 바젤 오페라 극장에 고용된 성악가들까지 합류했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성가대까지 갖추어졌다. 
그러나 기존 유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한 사람 한 사람 떠난 후에는 더 이상 유학생들은 오지 않고 있다. 비싼 스위스의 물가 때문이다. 오페라 극장에 고용 된 성악가들도 단장이 바뀌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지금 현재 바젤 한인교회의 중심역할은 다시 초창기에 함께 시작했던 간호사들이 맡고 있다. 
물론 이전처럼 왕성히 활동하지는 못한다. 
이제는 은퇴자들이고 고령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헌신적이다. 
다른 교인들은 코로나를 탓하며 몸을 사리고 있지만 이들만은 한결같다. 

 

(3) 인터라켄 쉼터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는 2007년 6월에 김정효 목사와 최옥순 사모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인터라켄을 찾는 여행자들을 위한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 명칭도 ‚여행자를 위한 인터라켄 쉼터교회이다. 
인터라켄은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매년 전 세계로부터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한국인 관광객들도 한때는 연간 백만 명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많이 감소했다. 
그럼에도 연간 수십만 명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인터라켄 쉼터교회를 시작한 이유는 주일예배 참석을 위해 인터라켄에서 힘들게 취리히 중앙교회나 바젤 한인교회를 찾아오는 교인들 때문이었다. 차로 족히 2시간 거리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단지 주일예배만을 위해 택시를 대절해서 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 비용을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족히 몇 십만 원은 나갈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시작한 것이 인터라켄 쉼터교회이다. 
지금은 인터라켄에서 사업을 하시는 집사님이 함께 쉼터교회를 섬겨주고 있다. 

지난 14년간 참 많은 여행자들이 쉼터교회를 찾아와 예배 드리고 갔다. 
쉼터교회는 매 주일마다 예배 후 방문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는데, 예배 참석 자들 대부분은 단지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를 찾지만, 그들 가운데는 신혼여행을 왔다가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신혼부부들도 있고 특별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예배 참석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본시 안 믿는 사람이었는데 친구 따라 예배참석을 했다가 결신자가 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여행자는 오래 전에 신앙생활을 포기했던 사람인데 우연히 호기심에 쉼터교회 예배에 참석했다가 잃은 신앙을 회복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을 포기하려고 했었는데 쉼터교회 예배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고 새 출발을 다짐하며 기쁨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심지어 이혼에 합의하고 마지막으로 함께 여행이나 하고 헤어지겠다는 부부가 쉼터교회 예배에 참석해 은혜 받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경우도 있다. 
또  왜 이렇게 고달프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해 방황하다가 쉼터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그 해답을 얻고 기쁨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4. 향후 계획

 

현재 인터라켄 쉼터교회는 풍광이 수려한 세계적인 관광명소요, 아일랜드 선교사 베아투스와 중세 인터라켄 수도원의 영적 유산을 간직한 인터라켄에 수양관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일단 수양관이 세워지면 오래 전 중단된 중세 인터라켄 수도원의 기도의 제단이 그곳에서 다시 회복되게 할 것이며, 기독교인들의 영성 훈련을 비롯해서 각종 세미나가 개최될 것이고, 무엇보다 기독교인 여행자들을 위한 영적 재충전의 처소가 되게 할 것이다.

필자: 김정효 목사(Pfarrer Jung-Hyo Kim)

이메일 주소: kimjunghyo50@hotmail.com
Facebook: Jung -Hyo Kim
홈페이지 주소: www.korenchurch-swi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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