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29-30)


 

●말씀 묵상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눅11:29-36)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내쫓아 벙어리 한 사람을 고쳐주신 기적을 우리는 어제(제9일) 음미하였다. 그 광경을 본 “무리가 기이히” 여겼다. 마태는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반응을 묘사한다.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마12:23)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은 메시아(구세주)의 출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적을 보고 도리어 예수님을 반대하는 구실로 삼은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1. 그 무리 중의 더러는 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힙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며 공격했다. 

2. 다른 무리는 하늘로서 내리는 표적을 요구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욱 증가된 듯하다. 
“군중이 더욱 모여 들고 있었다while the crowds were thickly gathered together.”(29절, 공동)   

그들에게 예수께서 매우 격한 어조로 대응하신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29b-30절)
 

요나는 크리스천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대부분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동화로 들은 내용 정도인 것 같다. (요나서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짧은 4장 분량이므로 15분 내에 읽을 수 있다.) 

요나는 주전 760년경에 활약한 선지자로서 아모스 그리고 호세아와 동시대 인물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욘1:2). 

니느웨는 당시 최대강국으로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인 앗시리아Assyria의 수도로서 극악무도함으로 악명 높은 죄악의 도성이었다. 철천지 원수나라의 수도가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선언은 요나에게 ‘달콤한’ 소식이지, 그들에게 회개를 외쳐 회생回生의 길을 열어준다는 것은, 도저히 마음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그대로 놔두었다가 소돔 고모라 같이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 소멸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인간으로서 이해가 되는 솔직한 심정이 아닌가! 그리하여,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동편에 있는 니느웨 와는 정반대 방향인 서편으로 도망친다. 욥바 항구로 가니 마침 맨 서쪽 다시스(스페인)로 가는 배가 있어 그 배를 탔다. 

그런데 요나가 탄 배가 지중해로 미끄러져 나가 중간쯤 갔는데, 갑자기 광풍이 불어닥쳐 파선 지경이 됐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욘1:4). 선원들을 위시해 모든 선객이 죽겠다고 아우성치며 난리인데, 요나는 배 밑창에서 “깊은 잠”에(욘1:5) 빠져있었다. 솔직히 그런 상황에서, 사람이라면 어떻게 깊은 잠에 들겠는가? 그저 배 밑창 깊숙이 숨어서 잠자는 척, 죽은 척하고 있었겠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친 자가 어디에 숨겠는가? 결국 “제비뽑기”로 신분이 발각 나고, 요나는 급기야 바다로 내던져지게 되고 큰 물고기가 요나를 냉큼 삼켜버렸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욘1:17).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있으면서 하나님께 회개하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물고기가 요나를 앗시리아 땅에 토해냈다. 
그때 다시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였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3:2). 

요나가 니느웨 성을 돌며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고 외쳤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이 짧은 설교가 능력을 발휘했다. 니느웨 시민 모두, 왕을 위시하여 남녀노소, 심지어 가축들까지, 금식하며 회개의 대각성이 일어났다(욘3:5-9). 

목사의 짧은 설교 몇 마디가 그렇게 큰 효력을 발휘한다면, 그 누가 목사 일을 마다하겠는가! 어떻든, 그들의 진심 어린 회개 곧 “악한 길에서 떠난 것을 감찰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 3:10). 이것이 선지자 요나의 ‘성공’사례이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30절) 

어떤 점에서,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듯이, 예수께서 “이 세대에” 표적이 될 것이라는 말씀일까? 마태는 부언한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 12:40).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삼 일만에’ 부활하심과, 요나가 ‘삼 주야’를 물고기 뱃속에 들어 있다가 다시 (살아)나온, 두 가지 사건이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 직접 관여하신 표적sign이라는 설명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해석 방법이다.) 그러나 누가는 그러한 부언설명이 없다. 다만, 그 이유를 간략하게 밝힐 뿐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32절) 

 여기서 두 가지 심각한 내용이 더 있다. 

1.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기적)을 행한 일이 없다. 단지 자신이 물고기 뱃속에서 3주야를 있다가 (살아) 나온 기적적인 실증뿐인데, 그 사실 조차 니느웨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단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선포(케루그마: 전도, 설교) 뿐이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들을” 보이심과 동시에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고 선포하셨다. (이방 민족)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여 멸망을 피할 수 있었으나 (선민) 이스라엘,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선포를 믿지 않고 도리어 그를 죽이려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날)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2.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의 “더 큰 이”로 번역된 원어 “프레이온”은 중성中性, neuter 형용사이므로 “더 큰 사람”이 아니라 “더 큰 것something greater”으로 번역해야 옳다.

(권위있는) 영어 성경 RSV(Revised Standard Version. NRSV포함)는 “behold, something greater than Jonah is here” (“보라, 요나보다 더 큰 것이 여기있다”)로 번역한다. 요나보다 더 큰 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기 보다는 요나보다 더 큰 그 무엇, 어떤 인물이 아닌 사물을 뜻한다. 그럼 “더 큰 것”이 무엇일까? 누가 신학의 핵심사상인 “하나님 나라”를 암시한다. 예수께서 “벙어리 귀신”을 내쫓고 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 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1:20).

표적sign(세메이온)이란 그 기적 자체 (표면)만을 보면 안되고 그것이 가리키는 목표(물)를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표적(기적 행하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리키는 것이다. 표적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 대표되는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처럼 예수가 “바알세불”에 잡혔다느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더 더 더 요구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오늘날도 기사와 이적에 매료된 신자들은 이런 수렁에 빠져들기 쉽다.) 그리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악한 세대”라는 엄한 책망을 받게 된다. 그 표적이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볼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보라idou, behold”로 시작하여 (표준새번역 외의 다른 한글 성경들은 idou를 빠뜨렸다), 요나의 표적보다 더 큰 것이 지금 여기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 같다. “더 큰 것”에 관해서는 곧 이어 나오는 ‘솔로몬과 남방 여왕’ 설화에서 더 분명해진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31절) 

여기서도 역시 “behold, something greater than Solomon is here”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것이 여기 있다)로 RSV는 올바로 번역했다. 이 설화는 왕상 10:1-13(역대하9:1-12)에 나오는 스바Sheba = Yemen왕조의 여왕에 대한 것이다. 얼핏, 이 스바 (남방)여왕의 설화는 생뚱맞게 끼어드는 감이 있다.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시겠다던 예수께서 갑자기 “남방 여왕”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은 솔로몬 왕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찾아온 “남방 여왕”을 종말 심판 때 ‘증인’으로 내세우실 때는 상당한 자극을 받아 황당했을 것이다. 이방인, 그것도 여왕(여자)이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을 정죄하는 위치에 올려진 것이 아닌가? 종교를 빌미로 인종차별, 성차별이 극심했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남방 여왕”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왕상10:1) 그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이역만리) 이스라엘까지 찾아와서, 그를 지혜롭게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지까지 이른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왕상10:9).

솔로몬의 지혜를 탄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방 나라 여왕이 있는가 하면, 솔로몬의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스라엘 민족에게 몸소 오셔서 표적을 보여주시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불경죄를  범하고 있는 “이 악한 세대”를 질책하신 것이다.

여기, 예수님께서 “스바 여왕”이라 칭하지 않고 그저 “남방 여왕”으로 부르고, ‘스바”왕국에서 왔다 말하지 않고, “땅 끝에서” 왔다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자. 누가에게 있어 “땅 끝”이란 세상 모든 민족(나라)을 뜻한다. (누가의 두 번째 저술인 사도행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분부하실 때, 세상 모든 민족(족속, 나라)에게 나아갈 것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다(행1:8. cf.눅24:47). 

그러므로, “보라, 솔로몬 보다 더 큰 (위대한) 것이 여기 있느니라”는 솔로몬의 나라(이스라엘)와 (땅 끝에서 온 남방 여왕으로 표상된) 세상 모든 나라들 보다 더 큰(위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너희 눈앞에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럴때 다음에 나오는 “빛과 눈”에 대한 말씀(33-36절)과 연결이 되고 그 뜻이 분명해진다.

예수께서 “보라”(idou = behold·see.한글성경 거의 모두 번역 없음)를 두 번씩(31-32절)이나 강조하신 직후에 지금 여기(우리의 목전)에 전개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맹인 세대”를 꾸짖으셨다. (사실, 마태는 예수께서 고치신 “벙어리”는 “귀신 들려 눈 멀고 벙어리된 자”<마12:22>라고 적시한다.) 
예수께서 경고하신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4-35절)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 “생명의 빛을 각 사람에게 비추시므로”(요1:9) 그 빛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요1:12)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된다. 예수님의 ‘참 빛 곧 생명의 빛’을 보지 못하는 (나쁜 눈) 사람은 심령이 어두워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예수께서 “보라idou 하나님 나라가 너희 목전에 임하고 있다”를 거듭 강조하셔도 깨닫지 못하고, “하늘로서 오는 표적”만을 더 요구하고 있다. 예수님의 참 빛을 받은 (구원받은) 성도는 그 빛을 세상에 반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하나님의 자녀는 지금 여기서here & now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빛된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어두운’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한국교회 성도는 다분히 “저 세상적other-worldly”이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죽어 천당 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표어가 잘 말해 준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정도가 지나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죽기 전에,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야 함을 망각하고 (얼빠진 삶을) 살기 때문에, 세상의 빛과 소금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빛의 사람으로서가 아닌 어두움의 사람으로 살기에 갖가지(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비리들을 낳게 된다. 세상(이방) 불신자들(“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의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갈 때, 죽어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물론 “행위”로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 사실이지만, (천국에 들어가기 전) 지금 여기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순례자의 삶이 절실한 때이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왜 예수께서 “이 세대”를 “악한 세대”라 책망하셨는가?
2. “요나 보다 큰 것” 그리고 “솔로몬 보다 큰 것”이란 무엇인가?
3. 누가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다시 조명해 보자.

 

●기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를 향해 주님께서 “악한 세대”라 한탄하시는 음성을 듣고 회개하며, 이 어두운 세대에 “빛을” 발하는 순례자가 될 것을 주님께 서원 드리자.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