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11:20)


 

●말씀 묵상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 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14-28)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예수께서 바쁜 걸음을 멈추시고 불쌍한 “벙어리” 한 사람을 고쳐주셨다. (벙어리가 비하 명칭 같아서 언어 장애인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지만 여기서는 ‘말 못하는 사람mute’ 의 뜻으로 사용한다.)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어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을 보면, 선천성이 아닌 후천성 벙어리인것 같다. 후천성이라면 불의의 사고로 말 못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사람의 경우는 “벙어리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벙어리는 모두 귀신 들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떻든, 말 못하는 답답함을 상상해 보라. 오죽하면 “벙어리 냉가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시적으로 ‘함구령’이 내려 말을 할 수가 없어도 그 답답함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데, 말을 전혀(영구히) 할 수 없다면 그거야말로 불행의 극치일 수밖에 없다. 
그를 불쌍히 보신 예수님께서 “벙어리 귀신을” 내쫓으셨다. 이 얼마나 고맙고 놀라운 일인가! 모두가 박수치며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려야 할 놀라운 은혜의 역사였다. 그 벙어리가 고침을 받아 말하게 되었을 때, 첫 마디가 무슨 말이었을까? 성경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할렐루야! 예수님 감사합니다!”라는 감사 찬양이었을 것이다. 벙어리가 말할 수 있게 되자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이 세 가지였다. 

1. “무리가 기이히 여겼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깜짝 놀라며 감탄하는 사람들.  

2.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예수님을 사탄의 하수인으로 몰아 이단으로 정죄하는 유대교 지도자들.  

3.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주면 줄수록 더 달라고 앙앙거리는 기적 중독자들. (참고:표적을 더 구하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은 내일<11:29-36, 제10일> 따로 묵상하게 됨.)  

똑같은 사건을 보아도 보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고,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선입견과 편견prejudice 때문이다. 선입견이란 대부분 그릇된 것들로 독선獨善의 산물이다.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편견을 가지면, 그가 어떤 일(행동)을 해도 삐딱한 시각으로 보게 된다. 그 결과 왜곡을 낳기 마련이다.  
여기 예수님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더러는”에 속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누가는 밝히지 않지만, 마태는 “바리새인들”로(마12:24), 마가는 “서기관들”(“율법학자들”, 막3:22, 공동)이라 밝힌다. 서기관들 거의 모두 바리새인이었으므로 둘이 서로 다르지 않다. 편견, 특히 종교적 편견은 바꾸기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만 그 개조와 개혁이 가능하게 된다. 인간 예수를 벼랑 끝까지, 급기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것도 그들의 편견(고정 관념) 때문이었다. 선입견, 편견이란 이토록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하고 모함하는 바리새인·서기관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항변하신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17b-18절)

너무나 비상식적인 논리로 공격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상식적인 비유로 설명하신다. 내전內戰은 한 나라를 망하게 하고, 내분內分은 가정, 단체, 교회를 혼란으로 빠뜨리기 마련이다. 귀신과 귀신이 싸우고, 마귀가 마귀를 내쫓고, 사탄과 사탄이 분쟁하면, 그 나라는 자멸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이로써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예수님으로 인해 원래 말을 못 하던 벙어리는 말을 하게 되고, 말도 안 되는 말을 일삼던 ‘종교 지도자들’은 말문이 막힌 것이다. 예수님께서 항변을 계속하신다.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19절)  

그 당시 유대교에도 축귀逐鬼, exorcism의식이 있었다고 전한다. 자기들의 축귀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예수님의 축귀는 사탄의 행위라는 억측이다. 요즘 한국 정계政界에서 유행하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처럼 이중잣대를 가지고 자기 행위는 정당화하고 남의 행위는 정죄하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신 것이다.
 이제 누가 신학의 핵심 사상이 나온다.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의 말문을 막은 예수님께서 선언하신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0절)

여기 “만일if”을 문맥상 “때문에since”로 이해해야 그 뜻이 더욱 뚜렷해진다는 주석가들도 있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에서 하나님의 “손”의 원문은 “손가락”(다크투로스finger)이다. 마태는 “하나님의 성령Spirit of God”(마12:28)이라 밝힌다. 하나님의 “손가락”이란 하나님의 힘, 능력, 권능을 뜻하며, 어떤 사건에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심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손가락”이란 표현이 구약성경에 몇 번 나온다.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니라written with the finger of God”(출31:18),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our heavens, the work of Your fingers”(시8:3). 

특히 애굽 왕 바로의 마술사들이 모세의 기적을 두 번째 재앙까지 모방하다가 더 이상 따라 할 수 없을 때 그들이 고백한다.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This is the finger of God”(출8:19). 

그러나 바로 왕은 마음이 완고하여 모세의 기적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믿지 않았다. 이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역시 벙어리 귀신을 내쫓는 예수님의 기적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리어 사탄의 역사로 몰아갔다. 이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인 것이다. 

벙어리가 예수께 고침을 받아 말하게 된 사건은 한낱 병자의 치유로 보아넘길 일이 아니다. 그 이상의 신비를 내포하고 있다. 메시아의 출현으로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입증하는 사건이다. 이사야는 주전 740년경에 활약한 선지자로서, 메시아의 강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벙어리의 혀는 노래 하리니”(사35:6, 32:4).

메시아의 능력으로 벙어리의 혀가 풀려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는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 도래의 표적의 하나라는 예언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힙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70인을 파송하여 복음을 전할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눅10:9)고 분부하신 주님께서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수수백년 메시아를 기다리던 선민選民 이스라엘,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메시아) 예수를 거절하고 배격했다. 그분을 도리어 이단자요, ‘바알세불’(사탄)의 앞잡이로 몰아세웠다. 자기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상이 아니며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임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 것이다. 그들(기득권자들)의 선입견, 편견, 독선self-righteousness 때문이었다.

편견prejudice이 증폭되면 점차 사상, 주의~ism. 主義, (종교에서는) 교리敎理로까지 굳어진다. 가령, 인종주의racism는 어떤 인종에 대한 편견으로 시작하여 그것이 점차 세력power을 얻게 되면 그 인종에게 억압과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런 공식이 성립된다. (인종적) 편견 + 세력(권력power) =(인종)주의. 그것이 인종주의racism, 성차별주의sexism, 나이 차별주의ageism, 언어 차별주의linguism, 등등 각종 차별주의discrimination로 나타난다. 

독선獨善 앞에서는 다름difference이나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다름을 틀림deficiency(결함)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음은 악마화 내지 귀신화demonization 단계이다. 귀신(악마) 들린 자로 내몰고 입을 막아버린다. 아니 입을 열지 못하게 한다. 소리 내지 못하고 숨죽여 살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신다(출6:5). 억압과 폭력에 짓눌린 백성에게 모세를 보내서 해방(구원)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주셨다. 이제는 새 모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귀신을 내쫓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자기 목소리voice를 내지 못하도록 변방으로 내몰린 ‘소수자들minority’, ‘나그네들’(이주민, 이민자), “고아와 과부들”(사1:17, 렘7:6)의 목을 옥죄는 “벙어리 귀신”을 예수 이름으로 내쫓아야 한다. 

벙어리 귀신을 내쫓는 일이,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신 직후에 일어난 것에 주의하자. 기도는 성도의 호흡과도 같고, 하나님과의 대화임을 앞에서 언급한바 있다.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은 말이 끊기고 대화가 두절된 상태를 뜻한다. 왜 기도하는 사람들이 없겠는가만은 진실한 기도가 두절된 것을 뜻한다. 

오늘날처럼 통신수단이 원활한 때가 인간 역사에 없었다. 그런데도 대화 두절이 현대인들의 고민거리다. 인성이 메마른 기계화된 통화는 만연하지만 진솔한 대화는 두절된 관계가 많다. 진정한 대화는 드물고 시끄러운 잡음 만이 난무한 실정이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국내·국제(정치)에서, 옳바른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불화가 생기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아집과 독선 그리고 자만에 집착하여 ‘상대방’을 배려할 줄 모르는 디지털 시대, AI(인공지능) 세대의 아픔이다. “선한 이웃”이 절실한 시대이다.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그리고 수평적으로는 ‘이웃’과의 대화가 회복되어야 한다. 현대판 ‘벙어리 귀신’을 내쫓아야 한다.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길이 곧 예수님을 따라 걷는 순례자의 행보이다. 예수께서 경고하신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23절)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으니, 그 안에 들어설 건가, 아니면 외면할 건가를 내가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가, 사탄 왕국의 백성인가, 지금 확정해야 한다. 엉거주춤 중립지대neutrality는 있을 수 없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26절) 말씀하셨다. 더 이상 ‘벙어리’ 행세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귀신’을 이미 내쫓으셨다! 분명히 표현해야 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하나님을 잘 섬긴다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한 것을 보라. 인생무상을 되뇌이며 세월에 밀려 떠내려갈건지, 순례길, 생명길을 걸을 건지를 결정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벙어리는 말하게 하고 말깨나 한다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말 문은 막아버리며, 하나님 나라 도래를 선포하심을 지켜본 사람 중에서 한 여인이 감탄하며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27절) 라고 외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믿음의 관계라는 것을 확인해 주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28절)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하나님의 나라’를 죽어서 영혼으로 가는 ‘하늘 나라’로 믿는 신자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는 주님의 선언을 어떻게 적용할까?
2. (종교적) 편견과 독선은 나(우리)와는 무관한 죄악상일까? 
3. 현대판 ‘벙어리 귀신’은 어떻게 역사하는가?

 

●기도 

우리에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도록 불러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리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올바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위하여 더욱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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