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따를 걷는 인생길 순례길"_유근희목사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11:9)


 

●말씀 묵상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5-13)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하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본인 “주기도문”을 주어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what to pray”를 말씀하신 직후에 그럼 “어떻게 기도할까how to pray”를 말씀하셨다. “강청하는 기도”로 알려진 기도 방법이 오늘 묵상할 성경 본문이다. 그러나, “강청强請”이란 예수님의 본 의도와는 상반相反된 기도자의 태도인 것을 미리 밝히면서 오늘의 묵상을 시작한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5-7절).

세 명의 친구 사이에서 벌어진 일화를 예로 들어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손 대접hospitality”을 중요시 하던 그 당시의 청중들은 물론 “그러면 안되지요!”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열대성 기후인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뜨거운 대낮을 피하고 오후 늦게 여행을 떠나기 마련이다. 야밤에 목적지에 도달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원활하지도 않았고, 전화나 그 어떤 통신시설이 있던 시절도 아니라서 갑자기(예고 없이) 그것도 밤 늦게 손님이 들이닥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같으면, 그런 무례 막심한 행동을 삼가라고 경고할 것이다. 그러나 고대(2000여년 전) 중동 문화권에서는 전혀 무례한 일도 아니며, 그런 손님일지라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을 당연한 도리sacred duty로 여겼다. 성경에도 길손 대접을 적극 권장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2).

문제는 따로 있다. 오밤중에 친구가 (갑자기) 들이닥쳤는데, 대접할 음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음식을 장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처럼) 24시간 열리는 상점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끼니를 거르며 쫄쫄 굶고 찾아온 친구에게 그냥 자고 내일 아침이나 대접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고민 고민하다가 묘안을 찾아냈다. 옆집 이웃 친구에게 가서 떡(음식)을 꾸어오기로 결심하고, 오밤중에, 염치불고廉恥不顧하고 그 집에 찾아가서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주게!”라고 요청한다. 

아무리 손 대접을 중요시하는 사회라지만 이건 아닌데, 무례함을 알면서도 문을 두드린다. 곤한 잠을 자던 옆집 친구가 어떻게 나올지는 뻔한 일이다. 거절할 것이 당연하다. (청중들도) 남의 일이니 “거절하면 안되지!”라고 말은 하겠지만, 속으로는 “그런 무례한 친구가 내겐 없으니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야기는 점점 진지해진다. 예수님의 말씀이 더 걸작이다. 듣는 사람들의 생각을 뒤엎어 놓는다. 이것이 비유를 말하는 목적이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8절).

 

이 말씀이 “강청하는 기도”라는 왜곡된 기도방식을 낳게 된 것 같다. 강청强請으로 번역된 희랍어 “아나이데이아”는 “겸손” “수줍음” “염치”를 뜻하는 “아이도스”에 “아”(안)을 붙여 그 반대어가 되어 “뻔뻔함” “파렴치” “부끄러움을 모름shamelessness”을 뜻한다. 성경에서 단 한 번 이곳(눅11:8)에서 사용된 희귀한 단어다. (단 한 번 사용되었기에 다른 곳과 비교해 불 수도 없다.) 영어 성경도 대부분 “importunity”(끈질긴 요청) “persistence”(끈질김, 고집)로 번역하였고, 다른 한글 번역판들도 별다를게 없다. - “귀찮게 졸라대면”(공동.표준), “극성스럽게 조르면”(새번역), “간청함”(개정). 

어떻게 해서 “아나이데이아”를 “강청”, “귀찮게 졸라댐” “극성스럽게 조름”으로 번역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의 추정으로는, 아마도 (집 주인이)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한 말을 보고 “그 친구가 귀찮게 하고, 끈질기게 졸라댄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번역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다음 구절에 계속되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에 “강청”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추측하여 그렇게 번역한 듯하다.
“강청”(“간청”, 개정)으로 오역誤譯됨으로 인해 “강청 기도” 곧,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실 때까지 끈질기게 졸라대야 한다’를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실 때까지 생떼를 부리며 끈질기게 졸라대면 귀찮아서라도 내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다’ 라든지, 기도 응답은 ‘기도하는 시간의 양量에 정비례한다’고 믿어, 별별 떼쓰는 기도 방식들이 우리 한국교회에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화를 자세히 읽어보면, 그 친구가 ‘여러번 끈질기게 요구했다’거나, ‘떼를 쓰며 졸라댄 것’도 없다. 그 집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다만, 밤늦게 찾아온 “친구”를 위하여, 오밤중에 이웃집에 찾아가 염치불고하고 “떡 세 덩이를”요청하는 그 태도를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강청”으로 오역된 원어 “아나이데이아” 곧 “뻔뻔함” “부끄러움을 모름” “파렴치”란 (3명의 친구 중)누구에게 해당하는 표현일까? 얼핏 보기로는 세 사람 모두의 행동에 해당되는 것 같다. 밤늦게, 그것도 쫄쫄 굶고, 불쑥 들이닥친 길손 친구가 “뻔뻔스럽고”, 그런 친구를 먹이기 위해 오밤중에 옆집에 찾아가서 떡을 요청하는 그 친구 역시 “뻔뻔스럽지만”, 그들 보다, 아무리 오밤중에라도, ‘길손’ 친구를 위해 체면불고하고 “떡을 요청하는” 이웃 친구를 (귀찮다고) 야박하게 거절하면, 그 친구야말로 (길손 대접하는 것을 지당한 도리로 여기는 그 동네에서) “후안무치厚顔無恥”로 소문이 나서 (불명예로) 얼굴을 들고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상황이었다. ‘이웃답지’ 못한 “뻔뻔스러운” 인간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될 것이 두려워, 마지못해reluctant 일어나서 이웃 친구의 요청을 들어주는 경우를 예화로 사용하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파렴치의 불명예를 면하기 위해’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8절).
 


여기서 하나님과 ‘이웃 친구’가 요청(기도)의 대상으로서 비교comparison 되지만, 사실은 대조적contrast 위치이다. (이웃 친구의) 불명예 대對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명예, “강청” 때문이 아니고 “명예” 때문에 요청(기도)을 들어주시는 사랑하는 “아버지”(하나님)를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다음 예화에서 더 음미하게 됨.)
이 예화가 주기도문 바로 뒤따라 나오는 것을 잊지말자.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기를 가르치신 주님께서 시사하는 바는 이렇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뻔뻔스럽다는 ‘불명예”를 피하려고 마지못해begrudgingly 들어주는 그 게으른 ‘이웃 친구’와는 달리,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름)”명예”를 걸고 하시는 자비慈悲인 것이다. 

또한, 오밤중에 이웃 친구에게 찾아가 염치불고하고 (뻔뻔스럽게) “떡을 요청한 그 친구”를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아무 때나 (오밤중에라도) 필요한 것을 “부끄러움 없이” “체면불고하고” ‘담대히’ 요청(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육신(지상)의 아버지Earthly father와 하늘 아버지 Heavenly father(천부)를 비교하여 기도 응답에 관해 교훈하신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11:9-10).

 

이 말씀은 신앙의 순례길을 걷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널리 애용되는 구절이다. 응답되는 기도는 믿음faith뿐 아니라 적극적이고 지구력 있는 기도자의 태도 역시 중요함을  보여준다. 기도는 단순한 말로 요청하는 “구하라ask”에서, 내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힘써 노력하는 “찾으라seek”로, 그리고,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여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인내하며 포기하지 않고 간구하는 “두드리라knock”로 강화된다. 

앞서 말한바대로 기도는 성도의 호흡과 같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사도 바울의 권고를 명심하자. 누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기도의 필연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예수께서도 수시로, 때로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고(눅6:12),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다(히5:7).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는 땀이 “핏방울같이” 떨어지기까지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눅22:44). 

그러나 기도는 내 뜻(욕구)을 관철하려는 안달복달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진정한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대화對話이다. 일방적으로 내 요구를 하나님께 털어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자의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면서 지구력 있는 기도 자세를 (원어 오역인) “강청”으로 왜곡하여 내 욕심자루를 채우려고 억지 부리고 생떼 쓰는 불경스러운 자태를 보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엄히 경고하신 ‘이방인들의 중언부언’에 불과하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마6:7).

구약성경의 예를 보자. 450명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태도와 엘리야의 기도를 보면 바알 선지자들은 고함 지르고, (몸을 찢어) 피를 흘리며, (무당굿 같은) 난무亂舞를 동반하여 길게 기도했지만 (무응답!), 여호와의 선지자 엘리야는, ‘주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인 것을 이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소서’라고 짧지만 진심 어린 믿음의 기도를 드렸을 때, 즉각 응답이 내렸다(왕상18:20-40). 하나님의 이름(명예), 뜻, 나라(통치)를 위해 간구할 때, 그 기도는 필연코 응답됨을 보여주는 좋은 실화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부모와 자녀 관계를 예로 들어 기도 응답을 재차 교훈하신다.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11-13).

 

여기에 세 가지 우선 명제가 있다.
1)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2) 육신의 아버지의 유한성과 “천부”의 무한성을 대조한다. 
3) 부성애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준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거듭나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길에 오른 “우리”의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전능자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하고 부르는 특권을 가지고 그 분에게 요청한다.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의 필요needs가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들 보다 더 잘 아신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간구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그런데 “Yes”만이 기도 응답은 아니다. “No” 역시 응답이며, 때로는 “기다려wait” 그리고 “성숙해라grow”로 응답하신다. 성숙한 신앙인의 기도는 어린이의 기도와 달라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육신의 부모는 인간의 유한성을 가지고 있다. 지력知力과 재력財力 그리고 분별력分別力의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는 항상 “좋은 것”을 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유한성을 넘어 죄성까지 언급하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육신의 ‘아버지’가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신 ‘천부’께서는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물며”(How mch more)라는 표현을 써서 하늘 아버지의 사랑를 강조하신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마태는 “좋은 것으로good things” 주심을 언급할 뿐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그러나 누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성령”을 강조한다.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최고, 최상의 선물(은사Gift)이 “성령” 임을 암시한다. 물론 “성령” 안에 다른 좋은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성령”은 모든 “좋은 것”의 근원source이기 때문이다. 성령은(요14:16) “보혜사保惠師”, 협조자(공동), 영어로는 Helper(조력자), Comforter(위로자), Counslor(변호자)로 불리며,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고, 예수님의 제자답고, 순례자답게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분이시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 보다 성령의 역사를 더욱 강조한다. (누가의 다른 기록인)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으로 불릴 정도로, 오순절 이후post-Pentecost, 그리스도 복음 전파의 주역이 성령이심을 보여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성령이 충만해야 그리스도의 증인된 순례길을 바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충만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바로 이해하려면, 성령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한다. (매우 어려운 신학적 설명이지만) 성령은 곧 성부(聖父, 야훼 하나님), 성자(聖子, 인간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聖靈,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를 이루는 바로 그분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는 뜻이다. 이 얼마나 최고, 최상의 선물(은사)인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지상의 교회가 세워졌고(행2:1-4, 36-47), 성령 받음이 곧 구원의 확증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고대 사본들 중에는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로 되어있다(개정). 성령임재臨在가 성령의 선물(은사)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성령의 선물(은사)을 어떤 특정 은사, 가령, 방언·예언·신유 등으로만 국한하는 것은 편협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에게 내재內在하신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아 순례길을 걷고 있는 모든 성도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4, 11).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하물며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의 말씀이 분명해진다. 그럼, 이미 내재하시는 성령을 주시라고 간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께서 나(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역사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갈5:22-23, 표준). 

이러한 성령의 열매들을 풍성히 맺는 우리(성도)의 삶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강청’하는 기도의 문제점들을 더 음미해 보자.
2. “하물며How much more”를 사용하신 주님께서 의도하신 바는 무엇일까?
3. 성령의 주요 사역을 통해 오늘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우리들의 순례 여정을 재 조명하자.
 
●기도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하신 말씀을 우리의 기도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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