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말씀 묵상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눅11:1-4)

주기도문 가운데 첫째 부분, 하나님에 관한 기원Thou-petitions이 끝났고, 이제 그 둘째 부분, 인간(우리)에 관한 간구we-petitions를 묵상한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Give us day by day our daily bread(3절)  

마태의 주기도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 한글 번역의 문제점이 몇 가지 있다. 우리가 사용해 온 주기도문에 “오늘날”이란 표현은 “요즈음”, “오늘의 시대”, 또는 “현대”의 뜻으로 시간적 범위가 넓다. 희랍어 원문의 “세메론”(마태), “카트 헤메론”(누가)은 “오늘”, 한문자로 “금일今日”, 영어는 “today” “this day” “day by day”이다. “오늘” 또는 “날마다”가 바른 번역이다.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로 교정하는 것이 좋겠다.

“일용할 양식”의 양식이란 한글 의역이다. 원어 “아르토스”는 “빵”인데, 성경을 처음 번역할 당시 우리나라에는 “빵”이 없었기에 그와 비슷한 “떡”으로 번역했다. 가령,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마4:3-4)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빵”으로 번역할 수도 없다. 빵이 주식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서양 사람들에게는 통하는 말이지만, 우리 한국인들에게 빵이나 떡은 별식別食이지 주식이 아니다. 

주기도문에서 간구하는 것은 주식이지 별식이 아니다. 그렇다고 “밥”으로 쓸 수도 없다. 밥이란 이미 요리된 음식인데, 주기도문의 “아르토스”는 (매일 필요로 하는) “먹을거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가장 근접한 번역이 “양식”이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라는 공동. 표준 번역도 적절하다.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간구하는 것이다. 

창고에 쌓아 두도록 욕심껏 잔뜩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실 때 매일 먹을 분량만 공급해 주셨다. 욕심껏 많은 분량을 거둬들이면 썩고 벌레가 생겼다(출16:19-20). 

여기에 “일용할 양식”이란 육신의 양식뿐 아니고 영적인 양식도 내포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육신의 양식으로 시험하는 사탄에게 명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4b).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따라 순례길을 걷는 것도 “생명의 양식”(요6:48)을 구하는 행위이다. 육신의 양식이 매일 필요한 것처럼 영의 양식 또한 ‘날마다’ 필요하다.

“우리에게…주시고Give us”이지, ‘나에게…주시고Give me’가 아니다. 공동체적인 간구이다. “나” 한 사람만을 위한 것egoism이 아니고 “우리” 모두를 위한altruism 간구이어야 한다. 

우리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우리”라는 단어는 거의 “나”라는 뜻이다. “내 남편·부인”을 “우리 남편·부인”이라 부른다. 그런 의미의 “우리”가 아니고, 두루두루 “우리들” 모두를 위하며, 공공의 이익common good을 위한 간구이다.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과 일치한다. 사실, 여기 양식이라는 말에는 “먹을 것”만을 뜻하기보다는 인생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needs, 곧 평안(샬롬)을 이루는 필수여건 모두를 위한 포괄적 간구로 보아야 한다.

“우리”라는 범주를 어디까지 적용할 것인가는 심각한 질문이다. 자연(생태)환경ecosystem을 무분별 파괴해 온 결과로 각종 (자연) 재난을 당하고 있는 우리 현대 인간들에게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창조물 모두를 포함시켜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인간이라는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된)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사람” 곧 “선한 이웃”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롬8:19)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절박한 현실을 무시하고 생태계 훼손을 계속한다면 인류는 자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상생相生, win-win partnership”의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이 애절한 간구가 이루어질 때,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우리가, 당신들이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4절a)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우리가 암송하는 마태의 주기도문)  

인간(우리)관계를 위한 간구 두 번째로서 죄 사유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인간 실존에 있어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 ‘먹고 사는’ 문제이므로 “일용할 양식” 구함이 첫 번째로 나오고, 그다음이 ‘죄’ 문제이다. ‘먹을 것’이 육신을 위한 것이라면 ‘죄 사유’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제아무리 “먹을 것”이 풍부할지라도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평안(샬롬)을 누릴 수 없다. 역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을지라도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그것 역시 복된 삶이 될 수 없다.  

‘올바른 관계’를 “의義”라고 정의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사람 간의 올바른 관계가 곧 의를 이루는 관계이다. “의”를 이루지 못하고 “비뚤어진” (잘못된) 관계가 “불의不義”요 “과오”요, 그것이 곧 “죄罪”이다. 그러나, 인생 실존에서 어떤 관계이건 그 안(사이)에 ‘금’이 가고 ‘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비뚤어지고 금이 가서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는 義의 회복을 위한 간구가 오늘 묵상의 요지이다. 

죄 사함을 위한 간구에서 죄라는 단어가 (원문에) 두 가지로 나온다. 마태는 “오훼일레마타”를 사용하는데, “빚” “의무” “과오” 또는 “죄”로 번역할 수 있다. 그래서 “죄”가 아닌 “빚”(빚진자), 영어는 debts또는 trespasses로 번역하기도 한다.  

죄로 번역된 단어 중의 다른 하나는 “하마르티아”로서 “과녁에서 빗나가다” “비뚤어 지다” “벗어나다”의 뜻이 있다. 누가는 두 단어 다 사용한다. 단, 하나님을 향해서는 “하마르티아”(죄)를, 사람을 향해서는 “오훼일론티”(빚, 잘못, 과오)를 사용한다. 두 단어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누가의 용법이 더 타당하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마태의 용어 선택과 이방인을 대상으로 쓴 누가의 차이점을 고려할 수도 있다.) 한글 새 번역도 구분하여 사용한다(눅11:4a).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공동)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표준)

“죄 사함을” 얻기 위한 이 간구는 오해하기 쉬운 문장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를 하나님께 조건부 사죄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우리가 용서하였기 때문에 우리 죄를 용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인간 사이의 용서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신약시대 죄 사유의 개념은 다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대속代贖, redemption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요1:12).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죄는 절대적으로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서 죄 용서를 간구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근본적으로) 용서함 받은 자녀들이 일상생활에서 지은 과오들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이 “아버지”하고 부름으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을 보라. 이미 근본적인 사유의 은총을 누리는 자녀들은 마땅히 “우리에게” 죄(빚)진 자들을 용서해야 한다. 주기도문을 주시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죄 용서forgiveness는 의사 누가의 주요 관심사theme이다(e.g.눅1:77, 3:3, 7:36-50, 24:47). 죄 문제 해결이 샬롬(참 평안)의 시작이며, “하나님 나라”의 관문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인간성(사람다움) 회복은 죄 사유함에 기인한다. 

죄 용서를 뜻하는 희랍어 “아훼시스”(아휘에미)는 ‘용서’, ‘탕감’ 외에도 “해방release”의 의미가 있다. 예수의 “메시아 선언mission statement”에서 두 번씩이나 “자유”(해방·놓임)(아훼시스)를 언급한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8).  

육적으로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포로된 자들”과 “억눌린 자들”을 자유(아훼시스)케 함이 하나님의 나라 도래의 표징이다.

심리(치료)학psychotherapy·counseling에서도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용서”란 상대방(용서받는 자)을 위하기보다 용서자 자신을 위해 필수적이다. 용서로 풀어주는 자유와 해방은 용서자 스스로가 더 누리게 된다. 심적인 자유함을 누리려면 (위에서 다룬 타인 용서 외에) 3가지 것을 용서하고 놓아 주어야release·let go한다. 

첫째, 조상들을 “용서”해야 한다. 내게 “금수저”를 물려주지 못한 ‘못난’ 조상들을 원망하고 탓하는 태도를 버려야 내가 자유로워진다. ‘과거’가 내 발목을 잡도록 해서는 안된다.  

둘째, 운명의 神을 용서해야 한다. 운명을 탓하면 자포자기하거나 분노하기 쉽다. “왜 하필 나입니까?”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신이 인간을 용서해야지 인간이 어떻게 신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실존에 있어서는 인간이 “운명의 신”을 용서해야 그 신의 매임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셋째,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찌질맞게 생각되는 나 자신을 용서하여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남들과의 비교의식에서 비롯되는 자기 비하를 내려놓아야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용서”함이 없을 때 갖가지 심신증心身症, Psychosomatic disease을 유발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용서란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심리치료 전문가therapist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기도문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를 심도있게 기원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4절b, 누가가 전하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기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태의 주기도문)
(누가의 기도문은 하반절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와 맨 마지막 송영, “대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없다.)  

주기도문 가운데 가장 당혹스러운perplexing 구절이다. 원문을 번역하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이 기원은 마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 분으로서, ‘그렇게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는 야고보의 교훈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는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와 상충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 “시험”이라는 단어 “페이라스모스”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성경 번역이 각기 다르다. 한글 ‘개역’과 ‘개역 개정’ 또한 ‘표준역’은 “시험”으로 번역하고, ‘공동’역과 ‘새번역’은 “유혹”으로 되어 있다. 영문판도 대부분 temptation(유혹)으로 번역하지만, 소수의 새 번역판NRSV은 “trial”(시련)로 되어있다. (NRSV: “And do not bring us to the time of trial”)  

이렇게 놓고 볼 때, “페이라스모스”는 “시험’으로 보다는 “유혹”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똑같은 “시험”일 지라도 사탄 마귀는 ‘우리를’ 죄와 악에 빠지게 하려는for evil ‘유혹’과 ‘꾀임entice’을 하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자녀된’ “우리를” 더 유익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for good 일시적으로 ‘시련trial’ 과 ‘다듬질refinement’을 주시는 것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그런데, 여기서 마귀의 유혹이 어디로서 어떻게 오는 걸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마음속 깊이 뿌리 박고 있는 갖가지 욕망(욕심)이 마귀의 유혹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야고보는 계속 말한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4).

그러면,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란 무슨 뜻인가? ‘시험’과 ‘유혹’은 인생 ‘순례길’에 불가피한 여건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시험을 면하거나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인내로써 이기게 하여 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힘으로, 내 지혜로는 이겨낼 수 없으니, “아버지”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만일 ‘우리가’ 그 유혹과 올무에 걸려들거든 하나님께서 구출하여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의 주기도문에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원이 뒤따라 나오는 듯하다. 

시험과 유혹이 인생여정에 불가피한 것이기에, 우리는 “쉬지말고 기도하라 Pray without ceasing”(살전5:17)는 바울 사도의 권고를 이행해야만 한다. 예수께서도 “주기도문”을 주신 직후에 어떻게 기도할까를 말씀하셨다. (다음 장에서 그 말씀을 음미하게 된다.)

주기도문을 (두 눈 딱 감고 외우는 마법의) 주문呪文, magical formula처럼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교 기도의 전형pattern이며 골격骨格이요 근간根幹이 되는 기도문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이 기도문을 모형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구성해 나가면, 주님께서 경계하신, “중언부언vain repetitions”(마6:7)하지 않고,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용서”의 중요성과, 누구를 어떻게 용서해야 할까를 다시 음미해 보자.
2. 주기도문을 주문呪文처럼 생각하고 외우는 오류를 교정하는 길을모색하자. 
3. 생태계 파괴가 죄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기도 

우리에게 익숙한 마태에 의한 기도문이 아닌, 누가에 의한 주기도문을(눅11:2b-4) 천천히 소리내어 세번 읽고 다시 음미해 보는 것으로 오늘의 기도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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