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11:1)


●말씀 묵상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눅11:1-4)

주기도문 묵상은 규모가 방대하므로 두 차례에 걸쳐 다루고자 한다.
I. 하나님에 관한 간구Thou-petitions, 
II. 인간(우리)에 관한 간구We-petitions로 나누고, 
오늘은 I 간구 편을, 다음 날에 II 간구 편을 다루기로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내용을 음미해 보자. “주님의 기도문”(주기도문Lord’s Prayer)이라 불리는 기도의 모형model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교 기도의 골격骨格이며 근간根幹이다.) 기독교를 기도교祈禱敎라 할 정도로 기도가 기독교 신앙에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하다. 기도는 “신앙인의 호흡”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 보다 기도를 더욱 강조한다. (그가 기록한 사도행전에 더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님께서는 수시로 기도하는 본을 보여주셨다(눅 3:21, 5:16, 6:12, 9:18, 9:29, 11:1, 22:32, 41, 23:34, 46). 중요한 일을 앞에 놓고는 의레 (밤새)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주님 예수께서 자주 기도하셨다면 인간인 우리들이야 얼마나 더 기도가 필요할까? 나는 십대 소년 시절부터 육십여 년 동안 신앙 생활을 하였고 그 중 오십 년은 목회 활동하며 인생 여정을 걸어왔지만 기도는 여전히 신앙의 신비mystery로 남아있다.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보라.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항상 하루에 최소 3번씩 기도하여야 했고, 예수님을 따라서 아마도 늘 기도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간청한다. 기도야말로 불가사의요 신앙의 신비이다.

유대교 랍비들 중 유력한 스승들은 자기 제자들에게 자기들 특유의 기도문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세례자 요한도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을 말하고 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아마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사도) 안드레가(요1:40) 그런 요청을 한 것 같다. 또한 제자들이 볼 때, 예수님의 기도는 다른 랍비(스승)들의 것과는 사뭇 다른데가 있고, 그분을 이미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곧 메시아임을 고백한터라(눅9:20, 공동), “메시아 공동체”로서의 올바른 기도법을 배우려는 것이다. (기도의 신비를 더 깊이 깨닫고 실행하기 위해 애쓰는 오늘 우리의 간청으로 받아야 한다.) 그 요청에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11:2-4)

여기 누가의 주기도문은 마태의 기도문(마6:9-13)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문으로 알고 기도 시에 사용하는 것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내용이다. 왜 두 복음서가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 마태복음에는 “산상수훈”의 일부로서 (외식적이고 위선적인 기도를 바로잡기 위해) 주기도문을 언급하셨으며(마6:5), 그것도 제자들이 요청하기도 전에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로 말씀하셨다(마6:9). 
누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순례길 도상에서 기도를 가르치신 것으로 전한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께서 주기도의 중차대성 때문에 두세 차례 (다른 상황에서) 거듭 가르치신 것 같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누가의 신학적 사고思考와 표현방식을 고려하면 두 복음서의 차이점 역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도 주님의 기도문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기도 시에 암송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법의 주문呪文처럼 주기도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주문을 주기도문의 略字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화를 하나 소개하면, 내가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중병으로 몸져 앓고 계셨던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이웃 마을에 살던 어떤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찾아와서, 주기도문을 하루에 200번씩 외우면 병이 낫는다고 처방 아닌 주문을 주고 갔던 일이 생각난다. 
누가의 주기도문은 두 가지 골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관한 기원Thou-petitions(2인칭 단수 대명사 사용) 두 가지, 둘째는 인간(우리)에 관한 간구we-petitions(1인칭 복수 대명사 사용)로 구성되었다. 

율법의 핵심으로서 하나님의 백성 생활 규범인 십계명Ten Commandments이 첫 4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 with God, 그 다음 6가지는 인간관계relationship among us를 규정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요약하신 대로 위로는 “하나님 사랑”과 옆으로는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22:40)인 것처럼, 주기도문 역시 “하나님 사랑Thou petitions”과 “이웃 사랑we-petitions”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도란 먼저 기도의 대상, 기도를 받으실 분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에게 기도를 드리는가, 내 기도를 듣고 응답하실 분은 어떤 분인가를 확실히 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눈깜땡깜’ 외우는 주문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음송吟誦하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에 따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 성경본문의 누가는 긴 수식어가 없이 단순하게 “아버지여”라고 부른다. 얼핏 보기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기도의 대상이 ‘초월자超越者’ 임을 더 명확히 표현한 것같다. 그래서 아마도 마태는 그런 수식어를 붙인 듯하다. 그러나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눅17:21) 도래함을 강조하기 때문에, 저 멀리 높고 높은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고,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로 부른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는 (희랍어 파테르가 아닌) 아람어 “아빠Abba”였을 것이다(막14:36, 롬8:15, 갈4:6). 여기서 아버지(아빠)라는 호칭은 하나님의 성별性別을 뜻하기보다, 창조적 근원성origin과 관계성relationship과 친밀성intimacy을 나타낸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다음 장에서 다룸.) 내가  아무 때나 “아버지!” 하며 달려갈 수 있고, 항상 나와 대화할 수 있을 만큼 내 가까이에 계신 분을 뜻한다. (하나님의 속성은 아버지보다 어머니에 더 가깝기 때문에 “하나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여성주의feminist 신학자들의 주장도 타당성이 있다.)
 마태의 “우리 아버지”가 아니고 누가는 그냥 “아버지”로 부른다. 마태는선민選民 의식이 강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을 선호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신성모독blasphemy으로 여겼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신32:6, 사63:16, 64:8, 렘31:9)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결정적 요인이 곧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참람僭濫”함이었다(요5:18, 마26:65). 누가는 그러한 유대교 적 관념을 넘어, 누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그와 함께 순례길에 오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요1:12, 롬8:15)로서 그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신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참람함”(신성모독)이요, 이방 출신 크리스천들에게도 매우 충격적이며 또한 고무적인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누가의 독자들은 희랍신화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각 민족마다 각기 다른 ‘수호신’들을 신봉하고 있었는데, 그 여러 신 중의 최고 존엄 신(야훼)을 감히 “아버지”로 부르는 특권을 인하여 놀라지 않았겠는가! 사실인즉, 누가는 오늘날 예수님을 따라 순례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그 놀라운 특권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첫째 기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성경 원어인 희랍어 고대 사본들에는 2인칭 대명사가 있어 영어 번역에 “hallowed be thy name”으로 되었다. 그러나 우리말에는 극존대의 2인칭 대명사가 없기 때문에 생략되었다. 영어에도 Thy name이라는 고어로 (KJV, RSV) 표시해 왔으나 근래 들어 새로운 번역본에는 Your name으로(NKJV. NRSV) 바뀌었다. 현대 한글판 역시 “당신의…” 또는 “하나님의…” 또는 “아버지의…”로 대신하고 있다. 

 하나님(“아버지”)의 어떤 이름을 뜻하는지 분명치 않다. 구약의 “엘로힘Elohim”, “야훼”(여호와YHWH) 또는 다른 어떤 이름인지 밝히지 않는다. 구태여 밝힐 필요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자의 영”을 받은(롬8:15) 우리가 이미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그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새번역 성경에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십계명의 제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명령에 일치되는 말씀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부르거나 발음하지 않고, 주님(아도나이, Lord)으로 대신한다. 우리 한국어에는 “천주天主”, “하나님”, “하느님” 등 호칭이 다른데, 어느 호칭이 옳은지 해설이 분분한 상황이다. 서양, 특히 영어권 사람들은 (크리스천들 포함) 하나님·예수님의 이름을 욕하는데swear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도 교회와 신자들에게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가는 “가나안 교회”(‘안나가’를 거꾸로 쓴 것)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기독교를 “개독교”라 하고, 목사를 “먹사”로 부른다고 한다.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신도들의 경거망동輕擧妄動 때문일 것이다. 사회에 큼직한 (범죄)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장로 권사 집사들이 연루되어 있음을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예수께서도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glorify your Father in heaven”(마5:16)고 말씀하셨다. 신자가 신자답고, 성도가 성도답게 살 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과 찬양을 받아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둘째 기원: “나라이 임하옵시며Thy Kingdom come”(한글 문법상 “나라가 임하시오며”가 바른 번역이다, 개정)

앞서 언급한바 대로 우리말 번역에는 2인칭 대명사가 빠졌다. “나라”, 누구의, 어떤 나라가 임한다는 걸까? 영어로 Thy(Your) Kingdom come, 우리말로는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로 이해해야 한다. “아버지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사상이기 때문에, 그분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들, 특히 누가복음의 중심사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가 주기도문의 중심적인 기원이다. 전술한바(제3일, 눅10:1-16)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들처럼 영역적인territorial 개념이 아닌, 주권主權, sovereignty 또는 다스림reign을 뜻한다. 하나님의 공의justice와 자비mercy의 다스림으로 샬롬이 성취되는 현실 상태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 도래의 선포는 세상 나라들에 대한 도전과 심판의 선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면서 또한 미래적인 이중성이 있다.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지상사역과 십자가 사건 그리고 부활, 승천을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고,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종말론적eschatological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이미already” 실현되고 있지만, “아직not yet”은 그 완성을 기다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Proclaimer이자 실현자이고 장차 이룰 완성자이시다. 하나님의 나라가 다름 아닌 우리 “아버지의 나라”이니, 그 나라가 “임하면” 당연히 그 분의 자녀 곧 후사heirs인 우리 성도들이 상속받아 마땅하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롬8:16-17a).
이러한 “하나님의 후사” 개인들이 모여 “우리”를 이룬 신앙공동체가 교회이며, 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소서”를 기원하며, 그 확장을 위해 “땅 끝까지” 이르는 증인된 선교사명을 이행해 나가야 한다. 

그럼 “우리” 교회We the church가 과연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라고 말 할 수 있는가? (부끄럽고 죄송스런 고백이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고, 멀어도 너무 멀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를 날마다 쉬임 없이 간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오늘도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누가복음에는 없다. 아마도,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임하는 것이 곧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에 포함되기 때문에 생략한 듯하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주기도문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달리 기록된 이유와 차이점은 무엇인가?
2.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성취되는가?
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태)와 단순히 “아버지”(아빠)(누가)로 부르는 차이점을 생각해 보자.
 
●기도 

천지의 대주제이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감으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제자가 되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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