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근희 목사의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사순절 순례”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1-42)

 

● 말씀 묵상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38-42)

잘 알려진 두 자매, 마르다와 마리아의 일화가 소개된다.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자매인 것 같다. 언니 마르다는 행동적active이고 동생 마리아는 사색적인contemplative 성격으로 나누고, 묵상적devotional이며 사색형인 마리아는 영적spiritual생활을 추구하지만 행동파인 언니 마르다는 육적인 일에 치우치는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의 성품으로 해석되어왔다. (교부 Origen 부터 시작.) 그러나 이 일화가 기록된 정황context을 고려하지 않은데서 생긴 왜곡이다.
 앞에서(10:25-37, 제4일 묵상) 소개된 “선한 이웃”의 비유와 연결된 맥락에서 두 자매의 일화를 읽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서두에서부터 두 일화가 유사점과 대조점을 보인다. 

 

사마리아인 비유는 “어떤 사람이a certain man”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그리고 두 자매 일화도 “한  촌a certain village”, “한 여자가a certain woman”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신분(지명)을 밝히지 않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거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정성껏 보살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올바른 수평관계horizontal relationship의 모범을 보였고,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공동역: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 일에 전념함으로 (성육신하신 그분) “하나님 사랑” 곧 올바른 수직관계vertical relationship의 본을 보여준다. 사마리아인과 마리아 둘 다 별볼일없이, 항상 남들에게 “죄인” 취급이나(눅7:39) 받고 외면당했던 변두리marginal 인간들이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모범으로 급부상하여 예수님의 순례길 동행자, “제자다움”의 실상을 보여준다.
 

마리아는 소개될 때마다, 주님의 발치에 앉는at His feet 모습을 보인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곳에 오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요11:32) 말씀드렸고, 예수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지극히 비싼 향유를 그분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다(요12:3).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라는 전설은 허구이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 역시 마리아를 참 제자의 모범으로 소개한다. 사도 바울 또한 자기가 성실한 제자였다는 것을 “가말리엘 문하에서at the feet of Gamaliel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런 제자도弟子道는 오로지 남자들에게만 허용되었고, 여자들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엄두도 낼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수용할 뿐 아니라 극구 칭찬함으로 여성의 위치를 격상시켰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2절)

오늘날에도 제자도에 있어 (교회가) 성차별을 두는 것은 예수 정신에서 어긋난 것이다. 가령 여성 목사 안수를 부정하거나, 여성 장로를 세우지 않는 교회들도 많다. (한국교회 특유의 권사제도는 여자 장로를 세우지 않으려는 묘안으로 나온 제도이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촌에 들어가시매…(38절)

누가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마을의 지명을 밝히지 않는다. 다른 복음서들에 의하면 그곳은 베다니이다(요11:1, 12:1-3, 마26:6, 막14:3).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한 오리쯤” (2마일=3km, 요11:18) 떨어진 마을이므로 매우 가깝다. 예수님께서 이미 베다니까지 오셨다면 예루살렘 순례길을 거의 마치게 되는 셈이다. 누가의 순례길 여정으로는 아직도 몇 주 더 걸리게 되는데, 여기서 베다니를 말하면 독자들이 혼선을 빚을 것을 감안한 것 같다. 
 

누가는 지명location 보다 사건event, 즉 예수님과의 만남과 그분의 교훈에 중점을 두고 있다. 어쩌면 누가복음 기록 당시에는 그 마을 이름을 밝힐 필요가 없었지만, 훨씬 후에 요한복음이 기록될 무렵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행적뿐 아니라 그들의 오빠 나사로의 “부활”을 기리기 위해서 그들이 살던 마을 이름을 밝히게 된 것 같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마을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한 촌에 들어가시니”라고 언급한데는 누가 특유의 속내가 있다.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인종, 성별, 연령, 직업 등) 신분을 구분하지 않고 단순히 “어떤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그 누구라도, 어떤 신분의 사람이라도, 인간이라면 ‘인생 순례길을 가다가’ 당하게 되는 육신적, 정신적, 영적인 “강도 만남”을 암시한다. 그와 같이 두 자매의 실화에서도 마을 이름을 밝히지 않고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 가시니”라고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어떤 한 시골 마을, 별 볼 일 없는 한 촌락, 사회적으로 외면과 무시당하는 변방살이(달동네)에서도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게 되고(요1:12) 하나님의 나라 도래에 참여하게 된다는 복음의 신비를 내포하고 있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당시 중동지방, 특히 유대 문화권에서는 손님을 초대하려면, 의레 가부장인 남자가 하지 여자가 초대하는 법이 없다. 여자가 초대하면 손님에게 큰 결례가 되는 시절이었다. 더욱이 고위 신분의 손님을 여자가 초대하고 영접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러면 왜 마르다가 예수님과 그 일행을 초대한 것일까? 남자가 없이 두 자매만 사는 가정이었을까? 마르다의 남편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막14:3)이었는데 일찍 별세했다는 전설이 있고, 그들의 오빠 나사로는 (예수님께서 살리신지 얼마 후에 다시) 죽고 마르다와 마리아 두 자매만 살았던 것 같다고 추측하는 성서학자들도 더러 있다.  
 

그러한 갖가지 전설과 추측들보다는 누가 특유의 신학적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여성비하 풍토의 장벽을 뚫고 새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의 새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여자(부인)란 남편의 ‘소유물’의 하나이며 사람들의 숫자를 셀 때도 “여자와 아이”는 제외되던 (마14:21) 시절이었다.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같은 오병이어 기적을 소개하면서 배불리 먹은 무리의 숫자를 ‘여자와 아이 외에’라는 문구가 없이 단순하게 ‘남자가 한 오천 명’이었다고 기록함. 눅9:14)
 

내가 어린시절 한국에서도 여자는 호주戶主가 될 수 없었다. 45세가 넘은 과부 어머니 그리고 내 손위 누나들이 넷씩이나 있었지만, 모두 다 여자라서 제외되고 맨 말째로 이제 겨우 10살 남짓한 내가 호주로 등재되었다. 여성비하 풍토의 다른 일화가 있다. 아침 일찍 이웃집에 심부름 보낼 일이 있으면, 어머니는 언제나 나를 깨워서 보내셨다. 나만 심부름 보낸다고 불평할 때면, “뉘들이 가면 지지배들이 아침부터 집에 들어오면 재수 없다고 싫어들 하니, 그래도 고추 달고 나온 니가 가야 한다”고 타이르시곤 하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다지만 가부장적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은 교회 안팎에 편만하다.
마리아와 마르다, 두 자매는 주님을 향한 사랑love과 섬김service의 균형 잡힌 제자도弟子道를 보인다. 얼핏 보기에, 두 가지 성품, 곧 마르다의 활동적 그리고 마리아의 사색적 삶의 태도가 상반되는 듯하지만, 실상은 상호보충적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오늘의 두 자매 일화에서도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없지 않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방문한 예수님
17세기 중반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방문한 예수님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39-42절)

 

마르다의 섬김과

마리아의 경청이

균형 잡힌 제자도

예수님께서 귀빈 접대를 준비하느라 ‘방방 뜨는’ 마르다를 책망하시고, 당신의 ‘발치에 앉아 말씀 듣는’ 마리아를 칭찬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곡해가 시작된다. 손님, 그것도 귀빈 중의 귀빈, 메시아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일행, 최소한 열두 제자들)을 초대해 놓고 접대 준비를 위해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며” “마음이 분주하지” 않을 여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매사에 침착하고 친지 초대를 즐겨하는 내 아내는 손님을 초대하는 그날부터 밤잠을 설쳐가며 음식뿐 아니라 이것저것 집 안 정리까지 최선을 다해 준비하느라 그야말로 “많은 일로” 노심초사한다. 교회 안에서도 봉사를 도맡아 수고하는 고마운 분들이 많이 있다. 만일 그런 분들이 손 탈탈 털고 ‘말씀 듣는 일’에만 전념한다면, 가정과 교회가 제 구실을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제, 제4일 묵상)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며 ‘실행, 봉사, 섬김’을 강조하신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섬김의 봉사’를 과소평가 하실 리가 만무하다. 문제는 마르다의 태도이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성격은 스스로를 상하게 하며 주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기 일쑤다. 같은 일, 수고를 해도 기쁨으로 할 때와 ‘방방 뜨고’ 근심걱정에 싸여 할 때가 전혀 다르다. 더욱이 마르다의 주장질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귀빈들, 예수님(일행) 앞에서 동생 마리아를 망신(면박) 주어 곤혹스럽게 만드는 태도를 보라. 이런 갑질 행태는 다른 교우들에게 상처를 주어 실족케 만든다.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스스로 넘어지는 경우도 보았다.) 내가 말하는대로 하고, 내 방식으로 해야 하고, 나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다름differences’을 수용하지 못하는 독선獨善으로 공동체를 해치기 쉽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 역시 마르다의 “섬김”보다 마리아의 “경청”이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두 가지 덕목이 병행해야만 균형 잡힌 제자도라고 말할 수 있다. 때와 정황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어쩌면 다시 못 볼) 절박하고 참담한 상황이므로, 음식 대접 (준비)보다 말씀 경청하는 일이 우선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마르다와 마리아의 실화를 통해 ‘성차별’ 문제를 암시하는 누가의 신학 사상을 되새겨 보자.
2. ‘균형 잡힌 제자도’가 오늘 우리 교회들에서 권장되고 있는가?
3. 마르다의 ‘갑질’과 배타적 태도와 나는 무관할까? 
 

● 기도

교회 안팎에서 성행하는 성차별, 배타적 태도, 기득권자 갑질 등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해치는 만행을 회개하고, ‘참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요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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