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근희 목사의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사순절 순례”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6-37)


 

●말씀 묵상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25-37)


오늘은 그 유명한 “선한 이웃Good Neighbor”,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크리스천들은 물론 불신자들까지도 잘 알고 널리 사용되는 내용이다. 미국 사회에서는 그 이름으로 불리는 자선단체, 병원, 구호 기관들이 많이 있다. (심지어 주마다 The Good Samaritan Law도 있다.) 한국에도 “선한 이웃”이란 뜻의 “선린 xx학교”가 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그 원래의 뜻이 왜곡 내지는 퇴색되어 사용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율법사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율법사란 유대교 율법을 (모세 오경을 613 계명으로 요약) 연구하고 가르치며 전수하는 임무를 가진 율법 전문가로서 바리새파에 속하기 마련이다. (서기관과 혼용되기도 함. 막12:28, 마22:35) 율법사nomikos는 영문 성경에 Lawyer로 번역되지만, 현대식 변호사나 법관은 아니고, 성서(구약) 신학자라 할 수 있다. 유대교 율법에 능통한 특수 신분이다.

이런 율법사가, 젊은 선지자로 급부상하여 백성들의 인기몰이를 하고 있어 유대교 어른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예수님에게 까다로운 질문을 한다. 진리 탐구가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의 허구성을 드러내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

이런 질문은 질문자 자신이 ‘답’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며, 어떻게 대답해도 ‘올무’에 걸려들게 유도하는 교묘한 질문이다. 율법사라면 대게 나이도 지긋하고 고위 신분일 터인데 (이제 서른 갓 넘은) 젊은 청년 예수에게 “선생님Teacher·Master” 이라는 존칭을 사용한 것이 좀 이색적이다. 예수님 앞에 올무를 놓으려는 속셈만이 아니고, (오랫동안)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던 문제를 예수님 앞에 넌지시 털어놓고 그 해답을 찾으려는 의도 역시 엿보인다. (나이 많은 산헤드린 관원 니고데모가 야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랍비”와 “선생”이라고 부르며 고민거리를 털어놓은 것을 보라. 요3:1-10). 

그 당시 유대교 신앙(신학)에는 “영생”(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나라”, 특히 “사후에 들어가는 천국”이란 무척 생소하고 낯선 개념들이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그리스도=구세주)는 현세에서 억압자 로마군을 무찌르고 평화의 나라 곧 다윗 왕국을 복원하는 “다윗의 자손” 해방자였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자칭하는 예수가 나타나서 기사 이적을 행하여 각종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심지어 죽은자를 살리는 권능을 보이고 더욱이, “하나님의 나라” 도래를 전파하니, 내심 그에게, 아니 그의 새로운 가르침에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율법사들과 바리새파 동료들이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니, 그에게 올무를 놓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자기 자신의 깊은 고민거리를 해결해 보려는 의욕이 일었을 것이다.

“영생을 얻는다”는 영문 성경에는 주로 Inherit ‘상속하다’로 번역되며, (상속 중) 한 몫을 ‘차지하다share’, ‘소유하다’는 의미를 가진 (희랍어) kleronomeo다. 또한, 한 몫을 차지함과 동시에 특권privilleges을 누리며 그 일에 참여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러므로, (누가의 하나님의 나라 신학을 바로 이해하려는 우리는) 여기서 그 율법사의 질문을 달리 이해하면 좋겠다.

“예수 선생님! 당신이 전파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한 몫을 차지하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전파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기를 소원하는 뜻으로 받아야 한다. 그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현명하게 대처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

직답을 피하고 질문자 스스로가 답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유대교 랍비들의 토론 방식이다. 율법에 기록된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기록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같은 대화가 마가<막12:28-34>와 마태복음<마22:37-40>에도 나오는데, 물론 다른 상황이지만, 거기서는 예수님께서 즉답하신다.) 율법 전문가다운 대답이 나온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절) 

신명기 6:4(Shema)과 레위기 19:18을 요약한 내용이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신 것으로 전한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선지서의 골자이다.” 마22:40, 공동) 예수님께서 매우 만족해 하시는 대답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28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영생”이란 아예 언급조차 없다. 단지, “그리하면 살리라Do this and you will live.”고 말씀하셨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율법사가 말하는 영생이란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 누릴 생명이 아님이 분명하다. 거기에 예수님께서도 동의하신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바로 그곳에 실현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 곧 영원에 잇대어 사는 생명이 영생이요, 그것이 “지금 여기서”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시간의 양적quantity 개념이기보다는 질적quality 개념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의 둘이 아니라 하나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요1, 4:20-21).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수직관계),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수평관계) 삶이 의義, righteousness를 이루는 삶이요, (누가의)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삶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란 올바른 관계right relationship,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이웃과의 바른 관계를 뜻한다. (유교 사상에서도 義란 올바른 대인관계를 뜻한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이라 함은 야훼(여호와) 곧 “스스로 있는 분I am who I am”(출3:14)을 뜻하며, 이웃이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뜻한다. (후에 더 음미하게 된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이 율법사는 자만심에 도취하고, 드디어 바리새인의 본색을 드러낸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성경은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wanting to justify himself” 이런 질문을 했다고(29절) 밝힌다.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 자기들만이 옳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독선獨善, self-righteousness과 아집我執에 몰입되어 있는 것이 바리새파의 고질이었다. 율법사는 바리새적인 의를 과시하려고 예수님께 반문한다. 그들의 병폐인 위선을 잘 아는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직답을 피하고 우회적으로 비유를 말씀하였다. 그것이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다. 

“선한 사마리아인A Good Samaritan” 이란 그야말로 형용모순oxymoron이다. 당시 이 비유를 듣던 유대인들에게는 사마리아 사람이란 모조리(무조건) 나쁜 사람, 죄인, 악당, 이단의 대명사로 통했다. 사마리아인 앞에 “선한good”이란 형용사가 붙을 수 없었다. 성경에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는 이름을 붙인 바가 없고, 후대에 붙여진 명칭이다. 사실, 그 비유의 본래 의도에서 벗어난 왜곡된 명칭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30-34)  

이 비유를 해석하는데 있어 상당한 오해와 곡해가 있어 왔다. 가장 오래되고 대표적인 해석방법은 우의적寓意的, allegorical 해석으로 Irenaeus, Clement, Origen 등 교부들이 사용했고 Augustine에 와서 정점을 이룬다. 이 우의적 해석에 약간의 영해(영적인 해석)라는 기법을 첨가하여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가령,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아담, 예루살렘=하늘 도시, 여리고=죽음의 도시, 강도들=마귀·사탄, 제사장=구약(율법), 레위인=구약의 사역자들 (예언자들), 사마리아인= 예수 그리스도, 주막=교회. 

이러한 비유 해석은 다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이 비유를 기록한 누가의 본 의도를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를 있는 그대로 음미해 보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약 17마일·28km 거리) 매우 험준한 비탈길로 맹수나 도적떼를 만날 위험이 많은 곳이다. 예수님께서 이곳 지명을 언급한 것은 당시의 청중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위험한 길’을 가는 여행자(나그네)를 암시한 것이다. 인생길에 누구나 당할 수 있는 바로 그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 “마침by chance” 그 현장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 참상을 보고도 못 본 척, 모르는 척, 그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다. 누가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이 그냥 지나갔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지만, 일반 상식적으로 추측하건대, 그 제사장은 피 흘린 자, 더욱이 시체를 접하면 ‘부정’하게 되는 의식예법celemonial law(민19:11)에 따라, 율법을 철저하게 문자적으로 준수하려는 ‘근본주의’ 종교인의 전형적인 태도를 보인다. 

또한, 두 번째로 등장하는 레위인은 성전(제사)의 ‘도우미’ 역할을 맡은 자들로, 그들 역시 직업적 종교인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남의 수하에 있으면서 상사가 시키는 일job description에만 충실하다 보니 융통성 없는 기계적 인간으로 된 것 같다. 현대 기계문명의 발달로 매우 편리하고 풍요로운 삶이 되었지만, 기계화된 사회가 점점 인정人情이 메마르고, 인간미가 퇴락하고 있다.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로봇robot 인간으로 굳어진 인간상을 보인다. 타인의 참상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메마른 인간성이다.
 

세 번째는 천만 뜻밖의 “사마리아인”이 등장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나 돼지처럼 여기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에서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 ‘못 본 척’ 지나갔으니, 아하, 이 사마리아 놈이야 돕기는 고사하고 못된 짓이나 안하면 다행이지, 하고 잔뜩 벼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인간 이하로 여겼던) 그 사마리아 인간이 인정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누가는 이렇게 전한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33절. 표준)  

“측은한 마음compassion”이 인간미의 근원이다. 고사성어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남의 불행에 ‘애간장이 타는’ (스프랑크논= compassion) 어진 마음씨이다. 남의 불행을 보고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을 불인지심不忍之心 이라 한다. 20세기 우리 민족의 스승으로 존경받던 함석헌 선생은 우리 한국인의 본성을 어진仁 마음이라 했고, 불인지심의 근본으로 “차마 못 하는 마음”이라 가르쳤다. 이웃의 어려움에 ‘애간장이 타’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정성껏 돕는 인정, 곧 사람다움의 모범이 사마리아인이 보여준 마음씨이다. 어질 인仁자 풀이를 사람 인人자를 넷(4획人人人人)으로 늘여 놓고 이렇게 교훈한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사람다움, 인간다움, “…다움”의 회복이 누가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영생)에 참여하는 자, 곧 예수님과 함께 걷는 순례자의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의 비유란 예수님의 윤리관으로 선행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지금 여기서here and now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완성은 아닌already but not yet것에 유념해야 한다. 그것이 누가의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의 신비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별개의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그 사랑이 실현되는 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최종 심판자로 서신 주께서 선언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0, 45).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 하고 되물으셨다.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37절)  

율법사의 대답에 예수님의 말씀이 정곡을 찌른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순례길, 생명길로 들어 선 제자된 우리들의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에서 “내가 누구의 이웃입니까?”로 바뀌어야 한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누가의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연관성을 되새겨 보자.
2.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될 수 없었던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3. (함석헌 선생의) “차마 못하는 마음仁”과 (예수님의) ‘이웃 됨’은 동의어인가?
 
●기도

나의 제자된 삶을 뒤돌아 보며, ‘모든 율법과 선지서의 골자’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는 제자다운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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