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근희 목사의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사순절 순례”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9:51)


말씀 묵상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9:51-56)

살아 숨 쉬는 사람은 누구나 길을 간다. 인생길이다. 그 길은 오직 한 번만 걸어, ‘다람쥐 쳇바퀴 돌듯매일 반복되는 삶 같지만, 한 번 지나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빨리 뛰든, 느리게 걷든, 모든 사람에게 하루 24시간이 고루 배정되었다. 수명壽命의 길이는 각기 다르지만, 일생뿐인 것은 동일하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생길을 걷고 있는 것만은 자명한데 길 가는 사람에게는 목적지가 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어떻게 갈 건지가 분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길에서 방황하게 된다. 유수流水 같은 세월에, ‘정처 없이그냥 떠내려가게 된다.

예수님께서도 그 길을 걸으셨다. 종교적 용어로는 순례길이다. 목적지가 분명해서 순례길이라 부른다. 목적지가 분명하면 그 길을 가는 이유 또한 확실하다. 예수님의 목적지는 예루살렘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이다. 십자가 곧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이지만 예수님은 그 십자가 죽음을 넘어 부활과 승천을 향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51)

얼핏 인생길의 종착지가 죽음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인생의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것, 곧 사망死亡이다. 인생무상,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염세적 인생관이다. 물론 죽음으로 인생길이 끝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그 너머에 목적지를 둔다. 낙관론이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저 너머, 곧 부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승천까지 연결된다.

예수님의 인생 순례길은 기약期約, 곧 약속된 길이었다.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누구와 맺은 약속, 누가 정한 기약일까? 하나님과 맺은 약속이요, 하늘 아버지께서 정하신 기약이다. 그러나 이것에 집착하면 숙명·운명론에 빠지기 쉽다. 누가복음이 기록될 (로마제국) 당시에 편만했던 희랍신화에서 처럼 인간의 모든 것은 신들의 계략plot과 장난play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인생길이란 신들의 인형극puppet show에 불과하다는 말이 된다. 인간이란 운명의 꼭두각시puppet일까? 하기야, 기독교 신학 중에도, 영생永生 얻을 자와 영벌永罰 받을 자가 운명지어졌다는 예정론predestination이 우세하기도 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셨다. 에덴동산에 있는 금단禁斷의 실과를 따먹을지 말지, 우리 인간들에게 선택권을 주신 것이다. 인생 여정에서 어떤 길로 들어설 것인가는 우리 각 사람이 결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선택의 결과를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나는 이 길, 저 길, 어느 길을 택해야 할까?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선언하셨다.

그 길, 그 생명 길로 들어서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그 길이 과연 어떤 길인가,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 가를 음미하기 위해 이 (40) 묵상을 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그 길, 순례길을 선택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갈 것을 굳게 결심하셨다. 그 길을 오늘 떠나신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 그분과 함께 그 길을 가자.

본 묵상록을 사순절에 맞추어 사용할 경우, 오늘이 사순절 첫날, 성회 수요일이다. 사순절이란 부활주일 직전 40일간을 뜻한다. 7주간이지만 주일(일요일)을 뺀 40일이다. 성회 수요일Ash Wednesday은 이름 그대로 재Ash를 가지고 이마에 십자형 성호를 찍으며,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9)를 선포한다. 재는 참회를 상징하여, 한 줌의 흙(먼지)으로 돌아갈 인생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보여준 생명 길을 걷기로 다시 다짐하는 의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순례길을 떠난다.

현대의 저명한 성서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걸으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순례길을 영적靈的으로 2의 출애굽 여정2nd Exodus Journey”으로 (N.T. Wright ) 이해한다.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공관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마지막 순례길을 소개하는데, 마태와 마가는 2장씩 할애하여 간략하게 기술하지만, 누가는 장장 10장에 걸쳐 상세히 기록함으로, 누가복음서의 중심부를 이룬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고향)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걸으면서 순례자의 참모습을 보여주셨다. 그 거리가 80마일(133km)이니 걸어서 4일이면 충분한데, 예수님 일행은 40일에 걸쳐 각동 각처를 돌며(10:1) “하나님의 나라Reign of God” 도래를 선포하셨다.

성경은 정확히 밝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 직전에 유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하며 마귀에게 시험받으셨고(4:1-2), 부활 후 승천까지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르셨던(1:3) 사실 등을 견주어 볼 때,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순례길 역시 40일로 추정할 수 있다. 더욱이, 예수님의 마지막 순례길을 영적으로 2의 출애굽여정으로 이해할 때, “첫 출애굽40년을 40일로 축소하여 (상징적으로) 실행하였다는 사실 또한 감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복음의 기록(9:51-19:40)40편으로 나누어, 순서대로, 주제에 따라, 한 장 한 절씩 음미하게 된다. 40일 묵상으로 나눈 것은 2의 출애굽여정으로 불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순례길이 40일에 걸친 대장정이므로 그 과정을 따르려는 것이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예수님의 예루살렘 순례길의 서막을 여는 매우 경이로운 사건, 변화산일화를 통하여 예수님의 순례 여정의 목적과 성격을 밝힌다. 마태와 마가는 변화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씀하거늘”(17:3, 9:4)이라고 간단히 소개할 뿐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는 변화산에 출현한 모세(첫 번 출애굽의 주역이며 율법의 대표)와 엘리야(메시아의 선봉이며<9:11> 선지자들의 대표)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9:31)라고 대화 내용을 알린다.

여기 별세하심은 성경 원어 엑소도스exodos”의 은유적 표현으로 신약성경에 단 두 번 사용되어 별세, 죽음으로 번역되었다(9:31, 벧후1:15). 그러나, “엑소도스의 원뜻은 길 떠남, 여정departure, journey”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뜻하는 용어이다(11:22 참조).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탈출의 기록인 구약성경 2번째 책이 출애굽기Exodus”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정은 단순한 순례길이 아니고, 새롭고 진정한 의미의 출애굽 여정의 재연이다.

첫 번째 출애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셨고, 두 번째 출애굽으로 순이스라엘을 세우시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걷게 되는 예루살렘 순례길은 (영적인) “출애굽광야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길, 순례길로 들어서는 초장부터 반대와 장애를 접하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도 순례길로 들어서는 첫날부터 반대와 배척을 당하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사마리아인들이)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9:53).

갈릴리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이스라엘 땅의 중부지역인 사마리아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민족·인종적 반감의 골이 깊다. 역사적으로 보면, 722BCE, 북조 이스라엘이 앗시리아Assyria에 함락되자 사마리아에는 이방 인종들이 들어와 혼혈사회가 되었고, 더욱이 이방 종교까지 들여왔기 때문에 정통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이방취급하게 되었다. (남조 유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도 사마리아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모조리 축출시켰다.)

결국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적대감을 가지고 상종을 금하게 되었다(4:9 참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 땅의 한 마을에 들어가려 하자 거기서 배척당했다. 첫 출애굽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돌격해 오지 않았던가! 외관상으로는 인종적이고 민족적 감정을 이유로 예수님을 배척한 것 같지만, 내면, 곧 영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5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다. 인류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트기 위해 가시는 길이다.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곧 생명길을 배척한 것이다. 원래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이 세상이 영접하지 않았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1:11).

(이방)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생명길에 합류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생명길을 배격한 것이다. 이 사태를 지켜본 제자들이 격분한다. 의분을 일으킨다. 성격이 벼락불같아 천둥의 아들”(보아너게, 3:17 표준)이라는 별명을 가진 두 사람이 발끈한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

아니, 지금, 이 분, 예수가 누구신데, 사마리아 것들이감히 누구를 배척하는 거야! 천벌을 받아 마땅하지! 성질 급한 천둥의 아들만이 아니고, 그 누구라도 버럭 화를 낼 만도 하다. 눈엣가시 같은 사마리아인들(군인 100)에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 태워버린사건이 이미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있었다. (왕하 1:10-12,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54절에 엘리야가 한 것처럼이 있음. 공동·표준) 여기서도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악감정이 토로 되었다.

그런데 과연 구세주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죄인들에게는 벼락불의 저주를 내려야 마땅할까? 그렇다면, 벼락불 내릴 일이 얼마나 많을까 상상해 보라. 벼락불을 사주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다. 어떤 고대 사본들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타이르셨다.

가라사대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55절 각주)

예수님을 따라 생명 길을 갈 것인지, 다른 길을 택할 것인지는 각자가 결정할 일이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각 개인이 져야 하기 때문이다. 억지로, 강제로, 폭력을 사용해서 반대, 저항 세력을 꺾으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 일행은 함께 다른 촌으로 가셨다(55).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이 열리기 마련이다. 우회detour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라면, 약간의 우회도 큰 도움이 된다. 전화위복이 되기도 한다.

생명길, 순례길에 오르는 그 순간부터 반대와 저항, 심지어 박해가 있기 마련이다. 그 길은 지금껏 걸어 온 길과는 전혀 다르고 생소한 길이기에 안팎으로 밀려오는 저항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길이 생명길이기에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찬미하며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순례길, 생명길을 가는 것은, 거듭 말하지만, 죽음을 향하여 가는 인생길만은 아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주 예수와 동행하는 길이기에 지금 여기서here and now부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익히며, 또한 실제로 살아내게 된다.

생명길에 들어 선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오늘부터 예수님을 따라 40일 동안 순례길을 걸을 때 우리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목표가 점점 분명해질 것이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2. 예수님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순례길을 2의 출애굽여정으로 이해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3. 인생길을 순례길로 걸어가는 훈련을 40일 동안 하게 되는데, 지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정진할 방법은 무엇일까?

 

●기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우리 주님의 순례길을 따라나서게 저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40일 동안 한 눈 팔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걷게 하옵소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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