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근희 목사의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사순절 순례”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9:57)

● 말씀 묵상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9:57~62)

예수님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 순례길에 오르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생명길로 들어 선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겠다고 따라나선 사람들의 동기, 자세, 결심을 재점검하도록 유도하신다. 예루살렘 순례길이란 좁고 험한’(7:13-14) 십자가의 길이기에(9:23) 아무나 쉽게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걸어갈 수 있는 그런 길은 아니다. 세 사람의 제자 후보생들이 등단한다. 한 사람은 자원자이고 다른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초대하셨다. 과연 누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 순례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첫째 후보생: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57)

누가는 혹이” “어떤 사람이a certain man”(공동·표준) 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태는 한 서기관이라고 밝힌다(8:19-22). 예수님께서 각종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죽은자를 살리는 등의 기사와 이적을 행하며 명성과 인기가 급상승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왕으로 삼겠다는 움직임까지도 있었다(6:15). 급기야 수도 예루살렘으로 상경 길에 오르시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이 앞다투어 예수님과 함께 가겠다고 나서는 것이리라. 상경길을 등극길로 착각한 듯하다. 예수님의 친 (12) 제자들까지도 그리 생각했었으니까(20:20-24). 예수님께서 등극하시면 한 자리 차지하여 세도를 부리려고 예수님을 따라나서겠다는 심산이다.

예수 믿으면 축복받는다는 허황된 기복신앙prosperity faith으로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국교회에서 삼박자 축복”(삼박자 구원론)이 신자들을 얼마나 매혹시키는가를 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믿게만 만들면 된다는 식의 복음 전도라면 할 말이 없다. 육신적인 안락과 물질적 번영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한 서기관이라고 밝힌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어떤 사람이라고 적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어떤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 아닐까? “어떤 사람이 아니고, 바로 ” “x x”가 예수님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표준) 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냉담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58)

예수님과 함께 노숙자homeless, 나그네, 순례객, ‘광야 길을 걷는 것이 곧 제자의 길임을 다짐하는 말씀이다. 제자도의 댓가cost of discipleship를 치를 각오가 서야 한다. “self”와 내 안락comfort”에 집착하면 순례길에 오를 수 없다. 나를, 자아를 내려 놓아야self-denial 한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9:23).

나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보이는 것들이 있다. (예루살렘을 향해) 앞서가시는 예수님이 보인다. 그분을 따라 생명길로 들어서야 한다. (오늘은 사순절 둘째 날이다. 사순절은 내려놓기’ ‘비우기를 연습하는 기간이다.)

 

둘째 후보생: 첫 번째 제자 후보생은 자원자였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초대하셨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

마태는 이 사람이 제자 중 하나라고 밝힌다(8:21). 그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어떤 고대 사본에도 주여가 있음) 부르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에 속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후보생은 예수님을 따라나서기 전에 먼저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삶의 우선순위priority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어느 길로 갈까를 망설이고 있다. 결단을 미루고 망설이는 태도를 보면서 차차 차차 하다가 앗차한다는 옛말이 생각난다.

그가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한 말은 그의 부친이 이미 죽어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부친이 작고했다면, 그가 그곳에 가지 않고 예수님 주변에 있었을리가 만무하다. 연로하신 부친이 집에 계신데 그분이 사망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고하면 그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에 다시 와서 예수님을 따라 순례길에 오르겠다는 말이다. 일반 상식적으로, 윤리 도덕적으로, 더욱이 (동양의) 효 사상으로 보면 당연한 논리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한층 더 냉혹하다.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60)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죽을 것을 기다리느라, 해야 할 일들을 뒤로 미루면 안된다. 바로 지금 죽음 곧 사망을 향해 가던 인생길을 돌려 생명길로 들어서라는 말씀이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향해 가야 한다. 사후 처리(치료)보다는 사전 예방과 (건강) 관리가 필요하듯이 말이다. (근래에 들어 자연치유’ ‘대체의학운동이 확산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들은 늙어 가는 것으로 (인생길을) 서글퍼 하지만, 생명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익어 가는 것으로 감사하게 된다.

죽음을 향해 가던 과거의 삶에서 이젠 생명을 향한 길로 가야 한다. 과거가 내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 과거를 끊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오래된 습관·버릇을 하루아침에 단절할 수는 없다.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 이민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 중의 하나가 과거(한국에서의 삶)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과거에 사로잡히면 이민 생활에 적응하기 어렵다. 과거에 매인 사람들은 꼰대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말씀에서 (누가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후에 영혼이 가는 하늘 나라(천국·천당)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0b-21).

이 말씀은 다른 복음서들에는 없는 누가복음 특유의 하나님의 나라설명으로 후에 눅 17(34) 묵상에서 더 음미하게 된다.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와 다스림이 있는 곳,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실현되는 곳, 주님 예수와 동행하는 인생길을 뜻한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말로 전파하기보다, 내가 몸소 그 길, 생명의 길, 하나님의 나라의 길로 걸어가는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 과거에 걷던 그 (죽음) 길에서 돌이켜 새 길, 주님 예수와 동행하는 순례길로, 지금 들어서야 한다.

 

셋째 후보생: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61)

이 후보생 역시 삶의 우선순위priority가 바르지 못하다. “나로 먼저하게 하소서.” 라고 했는데 가족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Good-bye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가족 식구들의 허락, 승인을 받고 나서 예수님을 따라나서겠다는 말이다. 가족관계를 중요시하는 것은 옛날 유대인들 못지않게 우리 한국 사람들도 강하다. 여기서 가족의 승락을 받겠다는 태도는 사실 주위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습성의 표현이다.

동양인들이 다 그렇다지만, 유독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남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쓴다. 한국 사회를 체면 문화라고 부른다. (심리학에서 대체로 서양은 Guilt Culture, 동양은 Shame Culture로 구분) 주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나, 뭐라고 말할까에 민감하다. 말하는 것,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 심지어 옷 입는 것까지도 위신, 명분, 체면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해야 하고,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유교의 영향으로 시작된) 관혼상제冠婚喪祭 또는 경조사를 과도하게 치르느라 허례허식虛禮虛飾에 빠지기 쉽다.

이렇게 지나친 체면문화는 한국인의 행복지수저하를 초래하는 큰 병폐라고 사회학자들이 지적한다. 체면이 극도로 손상되면 극단적 선택까지도 불사한다. OECD 국가 중에서 한국이 자살률 제1위가 되어, “자살 공화국이라는 체면 구기는 별명까지 붙었다. (“체면 문화는 미국에 있는 한인 이민 사회에도 별 다를게 없는 현실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남의 일에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크다. “남 말 아니면 할 말이 없다는 옛말이 있을 정도로, 남의 일에 간섭하고 참견하려 든다.

요즘은 SNS를 통해 온갖 악플로 연예인들, 운동 선수들, (유명) 인사들을 공격하고 악평하고 가짜 뉴스까지 퍼뜨려 명예를 훼손하는 일들이 빈번하다. “악플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인사들(특히 연예인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도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62)

당시, 예수님의 이런 경고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생명길로 들어섰지만 뒤돌아보다가실격된 롯의 아내의 일화를(19:26, 17:32)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갈 때도 (수시로) ‘뒤돌아보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치던 일을 익히 알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을 주셨다.

지금이야 한국 농촌도 기계화 되어 소에 쟁기를 채워 논밭갈이 하는 것을 볼 수 없지만, 불과 3~40년 전만 해도 쟁기질이 농사의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이스라엘 땅에도 소가 쟁기를 끌어 밭갈이하던 시절이었다. 쟁기를 잡고 밭갈이하는 농부가 뒤를 돌아보면, 갈팡질팡하여, 똑바로 밭이랑을 낼 수 없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자동차 운전대를 잡고 자꾸만 뒤돌아보면 사고를 낼 것이다. 누가 나를 따라오는가 뒤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이 응원하고 손뼉쳐 주는가 뒤돌아보고, 여차하면 돌아서려고 뒤돌아보면, 주님을 따라가는 순례길을 올바로 걸을 수 없다. 예수님을 따라 생명길, 순례길을 가려면 뒷문을 닫아야한다

“Burn your bridges!”

 

●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3명의 제자 후보생들이 예수님의 매정하리만치 냉담한 답변을 듣고, 어떤 결단을 내렸을까 추측해 보라. 예수님을 따라 순례길에 올랐을까, 아니면 포기하고 뒤돌아섰을까?

2. 한국 사회의 체면 문화가 순례 여정에 미치는 장단점을 생각해 보자.

3. 예수님의 가르침과 동양(한국인)의 효사상은 상충되는 것일까?

 

● 기도

주님의 부르심과 초대를 받고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로 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분별력과 용기를 위하여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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