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11:52).


●말씀 묵상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가라사대 화 있을찐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화 있을찐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가지 일로 힐문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11:45- 54).


어제 우리는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위선을 질책하신 말씀을 음미하였다. 오늘은 예수께서 연이어 거기 모인 율법사(서기관)들을 질책하시는 말씀을 묵상하게 된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엄히 꾸짖으시는 것을 듣고 있던 율법사 하나가 항의한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45).

율법사(서기관)들은 유대교 분파는 아니지만, 대다수 바리새파에 속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을 질책하면 서기관들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마태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를 함께 싸잡아 질책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23:1-36).

바리새인들은 거의 모두 평신도이지만 율법사(서기관)는 유대교 율법 전문가로서 현대의 성경(구약)학자, 신학자, 교역자급이다. 서기관들이 율법(모세오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대로 바리새인들이 따르고 지켰다. (모세)율법 전문가를 주로 율법사라 불렀고 , 법적 문서들까지 전문적으로 다루는 경우 서기관으로 분류했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엄한 질책(세 가지, 11:37-44)에 이어 오늘은 율법사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세 가지, 11:45-54)을 음미하게 된다.

1. "가라사대 화 있을찐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

율법사들은(모세)율법 전문가들로서, 열 가지 기본법(십계명)613조로 구성된 율법을 1,100개조로 세분하고 다시 수천 개로 해설하여 바리새인들과 일반 (유대교)신도들이 준수하도록 요구하였다. 그것들을 철저히 지켜야만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바리새인들마저도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겉치레뿐, 내면에는 갖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그들의 외식과 위선을 질책당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렇다면 일반 신도들이야, 율법의 무거운 짐에 억눌려 좌절과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렇게 준수 불가능한 율법의 짐을 일반 신도들에게 지워놓고, 율법사들은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어떤 법이든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율법사 자신들이 만든 법령들이라서 그 허점을 이용하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율법사들의 종교적 횡포요 무지한 신도들의 좌절이었다. 이토록 억눌린 군중을 향해 예수님께서 선언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8, 30).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율법사에 해당하는 신학자들, 교역자(목사·사제)(특히 한국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율법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예를 들면 안식일과 (신약시대)주일을 구분 못하고, 명칭만 바뀌었을 뿐,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키는 주일성수를 강요한다.

주일성수의 정의조차 애매모호하여 더욱 혼란스럽고 신도들에게 지기 어려운 짐으로 작용한다.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에 벌어진 안식일 논쟁 이상으로 주일성수론 역시 신앙 순례길의 걸림돌이 아닌지 염려스럽다. 주일 날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로 기쁨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날일까, 아니면 주일성수라는 무거운 짐으로 억눌리는 날일까 다시 생각해야 할 일이다.

또한, 예배당을 성전이라는 미명을 붙여 우상화하며, 주일 ”(?)예배는 성전에서만 드릴 수 있는 것으로 왜곡한다. 그러다가 (2020년도) Covid-19 Pandemic(코로나 역병 대유행)으로 성전에서 대면 예배로 모일 수 없게 되자 교회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교회는 건물로, 다시 그 건물은 성전으로 왜곡시킨 과오를 깨달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헌금 관계도 그렇다. 십일조와 각종 (특정)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이것 역시 성도들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물이 아닌 지기 어려운 짐이 되지 않았는가! 율법사들을 질책하신 예수께서 오늘날의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화 있을찐저!”를 발하실 것 같아 두렵고 떨린다.

 

2. "화 있을찐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47-48).

선지자는 백성들, 특히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회개하여 돌이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대언자역을 담당한다. 옳은 말이 쓴소리로 들리기 마련이다. 쓴소리를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악인일수록 더욱 그렇다. “쓴게 약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사탕발림의 달콤한 말은 아첨과 아부로서 교만으로 이끌고 결국 파멸을 당하게 한다.

옳은 말과 쓴소리를 잘하는 사람, 즉 선지자들은 당대에 환영받지 못한다. 욕 먹고, 핍박 받고, 매장 당하기 일쑤다.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대언자인 선지자들의 쓴소리를 듣기 싫어할 뿐 아니라 그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급기야 죽이는 일까지 감행하였다. 선지자 생전에는 그 쓴소리가 싫어 귀를 막고, 미워하고, 매장했지만, 없어지고 나니, 그의 말이 옳았던 것을 깨닫게 되어, 그를 기억하고, 기념비를 세우고, 공을 기리게 된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때는 이미 기울었다.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후손들은 그 무덤을 쌓고 기념비를 세우는 어리석고 악한 인간들을 예수께서 탄식하신다. 율법 전문가라는 자들이, 율법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환영하기보다는 도리어 방해하고 핍박하고 죽이는 잔악상을 질책하신다. 과연, 그 조상에 그 후손들!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49).

하나님의 지혜란 태초에 창조의 근원이 되셨고(1:2),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한(2:40) 성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한다. 예수는 보내심을 받은 자임과 동시에 (선지자와 사도들을)보내는 자이다.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과거와, 현재에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인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또한 사도들을 핍박하고 잡아 죽일 미래의 죄악상까지 지적하신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신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50-51).

아벨은 인류의 첫 사람 아담·하와의 차남으로 아직 선지자 제도가 있기 전 인물이지만, 그는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드린 것 때문에 죽임을당했다(4:8-10, 11:4). 인류 역사의 첫 희생자(의인의 피)가 되었다. “사가랴는 영어로 Zechariah로 표기하기 때문에 구약 선지서 스가랴나 제사장 사가랴(세례요한의 아버지)와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께서 언급하신 사가랴는 유다왕 요아스 시대 제사장이었는데 왕과 유다의 죄악상을 지적하다가 살해되었다(대하24:15-22).

아벨 사건이 인류 역사의 처음이었고(창세기), 사가랴 사건은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인 역대하에(대하24:22) 기록되었기 때문에 첫 순교자와 마지막 순교자로 소개된 것이다. 또한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있지만, 영어로는Abel-A로 시작하여 Zechariah-Z로 마치게 된다.( A to Z)

그래서 첫 순교자부터 마지막 순교자까지를 들어 순교한 선지자들을 총칭한 것으로 이해한다. 급기야, 성육신하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 예수까지 처형하게 될, 그 모든 피 값을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심판의 선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어 70CE년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성전이 불타고 백성들은 무자비하게 살륙된 역사를 볼 수 있다.

기억하자. 피 값을 치르게 된 사연을 보라.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죽을 죄를찾지 못하여 풀어주고자 할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선동으로 온 백성이 다고함질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그러자 빌라도가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하였다. 그때 다시 백성이 다 대답하였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27:23-25).

종교 지도자들의 그릇된 판단과 그들의 선동이 얼마나 끔찍한 심판을 불러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3. "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52).

율법사(서기관)(구약)성경전문가(학자)로서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전담하는 종교 지도자들이다. 글을 아는 사람들이 드문 고대 중동(이스라엘)에서 율법사·서기관은 고위 상류층에 속하여 일반 평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식의 열쇠를 소유한 자, 곧 최고 지성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런 율법사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져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공동번역이 잘 표현한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렸고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는 자신도 사용하지 않고, 남들도 사용할 수 없게 한다는 뜻이다. 마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23:13).

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종교 지도자들, 특히 목사인 나의 등골에 진땀이 흐르게 하는 견책이다. 내가 바로 그런 율법사는 아니었는지! 성경(율법) 전문가로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바로 이해했다면, 자기들의 눈앞에 서 계신 메시아를 알아차리고, 영접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그리스도 예수를 비판하고 모함하며 핍박하고 잡아없앨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이 얼마나 끔찍한 악행인가!

성경말씀을 왜곡하여, 사욕만을 챙기며, 힘없고 무지한 신도들에게는 지기 어려운 짐을 지우고, 천국 문을 가로 막고 서 있는 몰각한 목자들(56:11) 이다.

여기서 다시 누가 신학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를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메시아를 부인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또한 백성들이 그리로 들어가는 것도 막고 있는 것이다. 율법사의 왜곡된 가르침을 받은 사람(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0-21).

예수께서 바로 잡아 주셨는데도 믿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한국교회)교인들 대다수는 죽어서 천당 가려고 예수 믿는다고 말한다. 현대 율법사(목사·사제)들이, “지금 여기서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백성으로 풍성한 삶(10:10)을 살아가는 길을 막고, “저 세상적인신앙을 고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누가가 제시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서부터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현대 율법사들인 우리(교회 지도자들), 예수님의 엄한 질책을 다시 경청해야 한다.

"너희 율법교사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52, 표준).

예수님께서 질책하심은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심이지만,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이젠 예수님을 없애버릴 음모를 본격화하기에 이른다.

"예수께서 그 집에서 나오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몹시 앙심을 품고서, 여러 가지 물음으로 예수를 몰아붙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트집을 잡으려고 노렸다."(53-54, 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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