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12:6-7).


 

●말씀 묵상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12:1- 12).


 

사람들이 그야말로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예수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다고나 해야 할까?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1) 라고 기록하였다. “수만 명이라는 단어 뮈리아스는 숫자상으로 일만을 뜻하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인파를 의미한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수적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신앙의 순수한 동기로 모여든 무수한 인파라기보다는, 바리새파와 율법사(서기관)들의 음모(누룩)에 빠져, 아마도, ‘나사렛 이단의 괴수(24:5 참조)를 보려고 몰려들었던 것 같다.

마가 복음서에 의하면, “큰 무리”,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되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몰려오는 것을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6:34, 44)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여기서(누가복음)는 그 큰 무리의 폭도속셈을 아시고, 그들로 인하여 제자들에게따로 경고의 말씀을 주셨다. 폭도성을 시사하는 표현을 보면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짓밟힐 만큼 되었더니는 한국어로 순화해서 번역되었지만, 원문에는 무리 수만 명이 몰려와 서로 짓밟았다로 기록되었다. 영문번역이 직설적이다. “so that they trampled one another.”

물론,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스피커나 어떤 확성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수만 명이 모여 서로 앞다투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다 보니 서로 짓밟을수도 있었겠지만, 사실인즉, 폭도심리가 노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갈수록 반대 세력이 점점 더 거세짐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경고하신다. 경고이자 격려이다. 격려는 곧 축복이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2:1).

누룩은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 곧 선한 뜻으로 또는 악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기간(7일 동안)에는 무교병만을 먹을 뿐 아니라, 집안의 누룩을 아예 말끔히 치워 버려야한다(12:15, 공동). 이것은 여호와 신앙 외의 다른 모든(애굽)이교의 ()영향을 제거하는 상징이다.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룩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다(13:20-21). 사도 바울은 우리 옛사람의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살 것을 권고한다(고전5:6-8).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누룩은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그 파급(영향)력은 대단하다. 누룩이 빵을 부풀리는 것처럼, “외식의 누룩도 우리로 교만과 허영으로 부풀게 하여 결국 오만과 독선self-righteousness에 빠지게 한다. 독선은 외식과 위선을 낳는다. 외식 또는 위선hypocrisy은 원래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배우를 뜻하는 용어이다. 자기 자신은 숨기고 다른 사람으로 연기하듯이, 속과 겉이 다른 이중인격자를 일컫는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의 외식과 위선에 관해서는(11:37-54) 지난 이틀 동안(11일과 제12일 묵상)다룬 바 있다. 외식을 인하여 호된 질책을 받은 유대교 지도자들, 바리새파와 율법 교사들은 이젠 확연하게 예수님을 극렬히 반대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누룩이 일반 평신도들에게 번져, ‘폭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 외식이지만,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예외는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신다. 오늘날에도 교회란 외식쟁이들이 가득한 곳이라는 비난의 소리가 자자하다. 그럼, 외식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길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외식을 방지하고 피할 수 있는 비결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1. 내면 깊이 숨겨진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2-3).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있다. 이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란 없다. 말은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남의 말은 더더욱 삼가야 한다. 미국 사람들이 농담 삼아 하는 말이 있다. 기밀confidential이란 한 사람에게만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계속하다 보면 금세 온 장안에 다 퍼지게 된다. 깊숙이 숨겨진 것들도 언젠가 드러나게 된다.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면서(11:39) 겉으로는 의로운 척 꾸밀지라도 언젠가는 실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의 죄는 명백해서 재판을 받기 전에 먼저 드러나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나중에야 드러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착한 행실도 드러나게 마련이고, 드러나지 않은 것도 언제까지나 감추어져 있지는 못합니다(딤전5:24-25, 표준).

하나님 앞에는 그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 Coram Deo(코람 데오), 신의 면전에서in the presence of God 진솔하게 행하는 것이 경건이요 참 제자의 길이다. 늘 자기 성찰을 통하여 회개로서 속마음을 씻어내야 외식을 피할 수 있다.

 

2.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4).

제자들을 내 친구들이라 부르신 것이 공관복음가운데 이곳뿐이다. (요한복음에는 3번 나옴, 15:14-15). 스승과 제자의 관계, 또는 주인과 종의 관계보다 더 진하고 운명을 같이하게될 친구로 부르신 것이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풀어 설명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15:13-15).

바리새파와 율법사들을 위시하여 큰 무리가폭도의 조짐을 보이자,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친구인 제자들에게 경고와 격려를 해주신다. 그들이 먼저는 예수님을, 그리고 후에는 예수님의 친구들인 제자들을 핍박하고 급기야 죽이기까지하겠지만, 육신을 죽이고 그 이상은 더 못하는 인간들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신다. 예수님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5).

예수님을 신봉하는 제자들이 고난과 핍박과 죽임을 면하게 된다는 약속은 아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몸소 당하신 고난들이요 선배 성현들도 모두 겪은 시련들이니 우리도 감내할 각오를 다져야 한다. 영생永生과 영벌永罰을 판결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식하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을 의식할 때, 비겁해지고 외식에 빠지게 된다. 앞에서 말한 코람 데오, 하나님 존전에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얼마나 자유롭고 담력있는 고귀한 삶인가! 이것이 지금 여기서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아내는 순례자의 삶이다. 사도 바울은 선언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

제자된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6-7).

복음서 기자들의 익살스러움이 엿보인다. 너무 엄위하고 긴장되는 내용을 전하다가 약간 유머를 섞어 긴장을 풀어준다. 마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10:29)라고 말하는데, 누가는 두 앗사리온을 주면 참새 네 마리를 사고, 거기다가 한 마리를 덤으로 주어 모두 합하여 다섯 마리를 받는다고 익살을 부린다.

앗사리온은 화폐의 최소 단위로서 데나리온의 1/16에 해당하는 동전을 뜻한다. 새 중에 가장 흔하고 하찮은 참새의 생명도 하나님의 창조물로 귀히 여기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인간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된 신도(제자)들이야 얼마나 더 귀히 여기시는지 알라는 말씀이다.

또한,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표준)는 말씀 역시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를 뜻하는 유대인들의 격언에 과장법과 익살스러움을 더한 표현이다. 매일 같이 빠지고 다시 나기를 거듭하는 우리의 머리카락을 셀 수도 없고 셀 필요도 없지 않는가? 실제로 사람의 머리카락을 세어본 연구가에 의하면, 인간의 머리카락 수는 평균 140,000가닥이란다.

흔하고 하찮은 새 한 마리, 그 누구도 신경 안 쓰는 머리털까지도 상세히 배려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배후에 계시니, 세상 염려와 걱정, 심지어 환난, 핍박, 죽음까지도 두려워할 것 없다는 격려의 말씀이다. 지속적인 겁, 두려움, 걱정은 우리 인간의 건강(신체적 그리고 정신적)을 해친다.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며 사랑하심을 확신할 때 겁 없이 당당하게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사도 바울의 외침을 보라.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8:31-37).

 

3. 성령을 의지하라.

외식과 위선이 없는 제자의 길이란 예수님의 참 증인 된 삶을 의미한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8-9).

 

앞으로 임박한, 아니 지금 누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초대교회에 이미 밀어닥친 환난과 박해로 인해 배교背敎하는 일들이 많을 것을 내다보면서 경고하시는 말씀이다. 속에는 악독이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경건한 척 꾸미는 것만이 외식이 아니다. 내면적으로는 예수님을 시인하지만 사람들의 눈초리가 두려워 예수님을 모르는 척하는 것(“은휘”, 19:38)역시 외식이다. 노골적인 박해가 없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당당하게 예수 신앙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 또한 외식이다. 박해나 핍박이 두려워서라기보다, 자신이 떳떳하지 못해 신앙을 숨기려는 자들도 많다.

예수님 자신을 인자人子(사람의 아들, 공동)로 표현한 것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묵시 문학적(7:13) 의미로 해석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1:14) 인간 예수로 오신 그분, “마지막 날 심판주로 임하실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뜻한다.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입으로, 말로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삶으로 실행하는 것을 뜻한다. (고백)과 행실()이 일치하여 제자다운 제자의 삶으로 일관해야 한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천사)들 앞에서 우리를 시인할 것을 약속하셨다. 이러한 경고요 격려의 말씀을 받은 제자들죽기까지충성된 증인으로서 제자도를 걷다가 (대부분)순교함으로써 스승인 예수의 뒤를 따랐다.

 

곧 이어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0).

이 말씀은 주석학자들 간에도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난해구로서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무엇이며, 사함받지 못할 죄란 어떤 것인가를 놓고 해설이 분분하다. 다른 복음서들, 곧 마가(3:28-29)와 마태(12:31-32)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께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신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12:24)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11:15, 9일 묵상)고 비난하였다. 그때 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사함받지 못할 죄에 관한 것이었다.

말로 인자를 거역(부인)한다는 것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26:69-74) 것처럼, 일시적으로 부인하고 곧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지만, 의도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사탄(마귀)의 역사로 매도하고 모독하는 행위는 끝까지 회개함이 없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없다. 그 어떤 죄라도 하나님께서 용서 못할 죄란 없지만,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실 길이 없다. 그것이 사함받지 못할 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선에 빠진 외식과 위선이 그토록 무서운 죄를 범할 위험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비겁한 제자도를 경고하신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11-12).

예수의 증인으로서 모진 핍박과 환난 그리고 투옥까지 당하게 될 제자들에게 미리 경고하셨다. 비겁하게 잔머리굴리거나 꼼수 부릴생각 말고, 보혜사 성령을 의지하고 담대히 맞설 것을 당부하신다. 사도들이 그대로 실천한 것을 누가의 다른 기록인 사도행전에 나타난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4:13).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늘 안일한 태도로 살아서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예수의 참 증인으로서, 반대하고 비방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와 복음을 밝힐 준비를 하며 항상 깨어있는삶을 살아야 한다. 베드로서 기자는 부언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벧전3:15).

외식이나 위선이 없는 제자다운 제자의 길을 가려면, 삼위일체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님과 늘 교통하며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코람 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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