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따라 걷는 인생길 순례길_유근희목사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19:28-31)


 

●말씀 묵상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19:28-40)


 

드디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당도하게 된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걸어오신 (영적인)2의 출애굽여정을 완성하신 것이다. 예수님 일행은 갈릴리에서 출발하여(9:51) 사마리아를 지나, 요단강 건너편 이방 땅페리아를 들러서, 다시 요단을 건너 여리고를 거쳐, 이젠 2마일(3.3km) 남겨놓은 곳, 감람산까지 오셨다. 우리는 오늘 멀고도 긴 순례길의 정점인 예루살렘 입성의 일화를 묵상하게 된다.

39일에 묵상한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지금껏 동행한 제자들을 앞서서 가시기시작하셨다(28). 예루살렘 입성을 기점으로, 이제 곧 제자들은 주님 없이 (아니, 앞서가셔서 보이지 않는 주님의 뒤를 따라) 제자도의 순례길을 스스로 걸어가야 함을 암시暗示하는 것이다.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2 출애굽 여정The 2nd Exodus을 예루살렘 입성으로 완성한다.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여 기독교회는 전통적으로 종려 주일Palm Sunday로 지키고 있다. 서방교회는 “The Triumphal Entry”(개선입성)로 부른다. 사복음서 모두가 수록한 사건은 단 두 가지, 오병이어 기적과 오늘 다루는 예루살렘 입성뿐이다. 그만큼 예루살렘 입성은 예수님의 메시아(구세주) 공표로서 지극히 중요한 사건이다.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구원사救援史가 이곳, 여기서 이루어지는 예루살렘 입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주도면밀히 계획하고 진행하심을 엿볼 수 있다.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29-32, 개정)

 

감람원은 예수께서 습관을 따라(22:39) 자주 기도하러 가시던 동산이다. 특히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며 울부짖던 곳이다(22:42).

무릎을 꿇고밤새워 기도하기를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될정도로 간절히 부르짖던 곳이며(22:44), (부활 후) 승천하신 산이다(1:12). “여호와의 날에 열국을 호령하기 위해 메시아가 임하실 곳으로 예언된 특별한 산이다(14:4).

벳바게는 고고학적으로 정확한 위치를 입증하지 못하며, 단지 이곳에서만 언급된 마을이다. 베다니는 예수님의 총애를 받던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살던 마을이며, 특히 주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곳으로(11:43) 유명하다. 이 둘 중 어느 마을로 제자 둘을 보내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예수님께 친숙한 마을인 베다니였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우리는 범상치 않은 몇 가지 내용을 접하게 된다.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30b).

나귀 새끼colt라지만, 매여 있는 것을 보면 아주 어린 망아지같지는 않고, 상당히 자란 나귀지만,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unbroken 야성wild 나귀를 뜻한다. 마태는 어미 나귀와 새끼를 함께 끌어오는 것으로 전한다.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21:2b).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는 이유를, 스가랴 선지의 예언의 성취임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시온 딸에게 알려라. 네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그는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타시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21:5, 공동. cf.9:9).

(고대 중동지방의) 왕들은 전쟁에 나갈 때는 말을 타고, 평화 시에는 나귀를 타곤 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에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원하는 바, (로마)군을 무찌르고 다윗 왕국을 회복할 정치적메시아가 아닌, 평화shalom의 왕으로 오신 것을 상징한다.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신다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도 처녀의 몸에서나셨고, (아리마대)요셉의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19:41)에 묻히셨던 일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더욱 특별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사람을 태워본 경험이 없는, 길들여지지 않은, 풋내기 나귀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오늘 우리 순례자들), 이제 후로는,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가야 하는데, 그들은(우리는 더더욱)잘 길들여지지 않았고, 그래서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31:18) 상태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어린 나귀는 예수님을 잘 태우고 입성하였다. (할렐루야!)예루살렘 입성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사건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나귀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밝히지 않지만, 그에게 사용할 암호password까지도 주어 보내신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31-34)

 

주께서 쓰시겠다는 그 암호가 통하고, ‘나사렛 예수가 아닌 주님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 그 주인은 분명 예수 신봉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 유대 시골에서 나귀는 그 집의 재산목록 제1호였을 텐데,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선뜻 내놓을 수 있는 그 믿음과 용기가 대단하다. 십자가 처형을 받게 될 대역 죄인에게 부역附逆했다는 누명을 쓰고 당하게 될 고난을 모를 리가 없었을텐데도 말이다! 그런데, 잠깐! 주님의 그 암호가 오늘 나에게도 통할까 진솔하게 답해보자.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 준비가 갖추어졌다.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35-36)

 

유대인들의 겉옷(외투)은 낮에는 몸을 감싸 보호하고 밤에는 이불로 사용하였다. 나귀를 끌고 온 제자 둘이 자기의 겉옷을 나귀 위에 얹어 안장으로 만들고 그 위에 예수님을 태우고 앞으로 진행하자, 다른 제자들도 자기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다. 겉옷을 길에 펴놓는 행위는 최고의 존경을 표하며 왕적인 우대를 뜻한다. 좋은 선례가 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재빨리 겉옷을 벗어 돌층계에 깔고는 예후를 위에 모시고 나팔을 불며, ‘예후가 왕이 되었다!’ 하고 외쳤다(왕하9:13, 공동).

그런데, 다른 복음서들의 기록은 판이하다. 교회에서 지키는 종려주일Palm Sunday행사에 종려나무palm branches가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언급되었다(12:13). 마태의 다른 나무 가지(21:8), 마가의 밭에서 벤 나무가지(11:8) 조차 누가는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 특유의 정치적 메시아를 상징하는 행렬로 오해받을 소지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누가는 다만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에 초점을 맞춘다.

이제 메시아의 입성 행렬이 시작되었다.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37-38)

 

여기에 누가복음의 특이점이 또 발견된다. 다른 복음서들은 큰 무리가 앞 뒤에서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Save us now)를 외치는 것으로 기록하는데, 누가는 호산나의 외침이 없고, 환호하는 사람들도 큰 무리가 아니라 제자의 온 무리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한것으로만 전한다. (물론, 여기서 제자들이란 열두 사도들만은 아니고, ‘수많은예수 신봉자들을 뜻한다.) 누가는 이방 출신으로 이방 크리스천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유대인 고유의 호산나외침이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될 소지이므로 이를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찬양한 내용에도 누가의 특성이 보인다. 다른 복음서들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시편(118:25-26)을 문자적으로 인용하는데, 누가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예수의 (평화의) 왕이심을 강조 선포한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천사들의 성탄 찬양을 약간 개조하여 인용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의 노래다.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제자의 무리도 외쳤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

이 말씀은 이 땅에 아직 참된 평화가 임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이토록 심오한 뜻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제자의 무리가열성만으로 환영하며 찬송한 것 같다. 아직도 그들 역시 정치적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떻든 심오한 진리를 확실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주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태도가 신앙 순례길의 길잡이가 된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 당시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 곳에서) 예루살렘에 모여든 인파가 2백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예수의 메시아입성을 열렬히 환영하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를 외친 사람들은 (누가에 의하면)제자의 온 무리였지만, (다른 복음서들에 의하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든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그 기이한 광경을 지켜봤을 것이 확실하다.

겉옷을 길에 펴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저 어린 나귀, 길들지도 않은 나귀 새끼를 보라! 놀라고 흥분하여 뛰거나, 겁먹고 뒷걸음질 치다가 예수님을 떨어뜨릴 만도 한데, 어쩌면 저렇게 늠름히 갈 길을 똑바로 갈 수가 있었을까! 이후로는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순례길을 가야 할 제자된 우리 성도들에게 올바른 제자도弟子道의 규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토록 기이한 광경을 지켜본 바리새인들이예수께 항의한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39)

 

그동안 줄곧 쫓아 다니며 예수께 시비를 걸고 반대를 일삼았던 바리새인들의 출현은, 누가복음서에는, 이번 항의로 막을 내리게 된다. 예루살렘 순례길 내내 지겹게도 괴롭혀 온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장 잘 지킨다는 자칭 의인들이 아니었던가! 자기들의 (전통) 교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메시아를 배격하고 심지어 사형장으로까지 몰고 간다. “평화의 왕입성을 환영하며 찬송하는 제자들을 꾸짖어 망동을 막으라는 항의다. “메시아, 으로 환영받는 그분을 겨우 선생으로 얕잡아 부른다. 예수님을 으로 선포하는 개선입성Triumphal Entry행렬로 떠들면 로마의 신경을 건드려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므로 제자들을 꾸짖어 잠잠케 하라는 선의의 조언처럼 들린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메시아의 입성이란 가당찮은 광대극에 불과하다고 조소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기는커녕 제자들의 행사를 인정하고 장려하는 말씀을 하신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40)

 

돌에 관한 해석이 분분하다.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는 시적poetic 표현이며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통용되던 속담proverb이므로 문자적 해석이나 영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돌이란 자연적인(자연 그대로의,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피조물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제자들이 메시아의 입성을 환영하고 찬양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마땅한 도리임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 특히 제자들이 환호하지 않으면 무생물인 돌들이 들고 일어나,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것이라는 의미이다.

지금껏,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16:20, 9:21. cf.3:12)고 엄히 경계하셨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제자의 온 무리가 선포하는 것을 금하기보다는 더욱 권장하는 표현이다. 이제 곧, 주님께서는 왕위를 받으려고 먼 나라로 떠나시고(19:12), 제자들 스스로 순례길을 걸어가야 할 상황에 이를 것을 염두에 두고 이르신 말씀이다.

제자된 오늘 우리들이 이제부터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가 되어,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16:16) 만방에 공표公하며, ‘하나님 나라의 특사特使(cf.고후5:20)들로서 나아가야 한다. 예수께서 떠나신(승천) , 제자들이, 보혜사 성령님의(14:16, 16:7) 인도하심에 따라, 예수님의 산증인들로서(1:8) 순례길을 걸어갔던 기록(누가의 책 제2)사도행전이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산증인들로서 순례길을 걸어가며 제자행전을 써나가야 한다. 이것이 오늘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내는 우리들의 인생 순례길이다. 아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중요성을 요약해 보자.

2.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의미를 되새겨 보며, 늘 우리 성도들에게 암시하는 바는 무엇일까?

3. 예수님을 따라 (40일 동안) 예루살렘 순례길을 잘 걸어온 나 자신을 칭찬함은 물론, 이제부터 내가 제자행전을 써 내려갈 것을 재다짐하자.

 

●기도

 

사랑의 하나님, 인생길, 순례길, 생명길을 우리 주 예수님을 따라 지난 40일 동안 꾸준히 성실하게 걸어 예루살렘 입성까지 이룰 수 있게 하셨음에 진심으로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매일 받은 주님의 교훈을 실행함으로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후로는 예수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로서 우리 스스로 제자행전을 써 내려가도록 성령님 인도하시옵소서. 나귀 타고 입성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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