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세계 선교의 얼굴을 바꾼 인물”, “최고의 설교가”로 평가 받아

지난 14일과 18일 위대한 두 명의 사역자가 우리 곁을 떠나 하나님의 품에 영면했다.

먼저 세계 기독교 선교 단체인 Operation Mobilization(OM)을 설립하고 45년 동안 사역했던 조지 베르워(George Verwer, 1938. 7.3-2023. 4.14. 84)가 사망했다고 OM 본부 및 미국 여러 기독교 뉴스에서 일제히 보도했다.

조지 베르워(George Verwer, 1938. 7.3-2023. 4.14. 84세)
조지 베르워(George Verwer, 1938. 7.3-2023. 4.14. 84세)

그는 414일 저녁 영국 런던 근처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임종했다. 그는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1955년 뉴욕시에서 열린 빌리 그레함 모임에서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헌신했다. 그때부터 세계 선교와 복음화에 헌신한 삶을 살았기에 그는 지난 60년간 세계적 영향력을 북미에 가장 위대한 선교 전략가로 평가를 받았다미국 OM 대표인 앤드류 스코트(Andrew Scott)은 그는 “‘그의 세대에 선교의 얼굴을 바꾸어 놓은 인물’”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OM은 처음 사역을 낡은 밴에 3명의 학생이 멕시코에서 기독교 출판물을 배포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유럽과 전 세계로 진출하면서, 오늘날 5,000명 이상의 OM 사역자들이 약 150개국에서 다양한 부서에서 활동하는 선교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이 후 OM은 청년 선교 단체(Youth With A Mission, YWAM)와 같은 선교 단체와 함께 전 세계에 복음화와 문화 선교 사역에 앞장섰다.

OM 인터내셔널의 로렌스 통(Lawrence Tong) 이사는 "조지는 예수에 대한 열정,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분이었다. 저는 그가 현대 선교의 진로를 바꾼 20세기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믿는다라고 평가했다.

세계지도와 백만 권 이상의 성경책을 나눠주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OM 사역을 은퇴한 후 20년 동안 특별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교회 행사에서 특유의 활력으로 연설했으며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그의 핵심 주제는 메시올로지(messiology)”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실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은혜롭게 용서하고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의 유언적 말을 되새겨 보면, "저는 여전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한 번은 복음을 받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그 메시지를 계속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I’m still mega-motivated to see everyone in the world being given the gospel at least once[to] have the opportunity to hear about saving grace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and I hope I can, right to my last breath, continue to share that message.” 그의 유족으로는 아내 드레나(Drena)와 세 자녀, 그리고 손주와 증손주가 있다.

필자는 이 기사를 소개하면서 작금의 목회 현장과 선교 현장을 보며, 그분의 삶과 생애를 투영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받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 드려 본다.

주여, 저의 남은 생애도 베르워(Verwer)처럼 메시올로지(messiology)의 은혜에 감사하며 남은 생애를 선교학(missiology)을 공부한 자로서 메시올리지(messiology)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드린다

찰스 스탠리 목사(1932~2023.04.18)
찰스 스탠리 목사(1932~2023.04.18)

또한 한국 성도들에게 <하나님 음성을 듣는 법> 등으로 잘 알려지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모든 결과는 그분께 맡기라를 좌우명으로 삼고 한 평생 신실한 목회자로 살았던 찰스 스탠리 목사(1932~2023.04.18)도 현지 시간 지난 418() 90세에 별세하였음을 미국의 주요 언론에서 일제히 보도했다.

크리스천투데이는 스탠리는 애틀랜타 제일침례교회에서 51년 동안 목사로 섬겼다. 그는 이 대형교회가 5000명의 교인이 모이던 1969년 부목사로 섬기기 시작해 약 15,000명의 교인이 모이던 2020년까지 강단을 지켰다. 그는 또한 그가 1972년에 설립한 In Touch Ministries를 통해 매일 라디오와 텔레비전 설교를 진행했으며, 찰스 스윈돌, 빌리 그레이엄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설교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널리 평가되었다.”라고 추모 보도했다.

스탠리의 아들 앤디 또한 애틀랜타의 대형교회 목사이며 많은 찬사를 받는 설교자이다. 그들은 LifeWay Research나 조지 W 트루엣 신학대학원의 현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 목록에 이름을 올린 부자이기도 하다.

또한 스탠리는 도덕적 다수파(Moral Majority)와 기독교 연합의 창립 멤버였으며, 보수파와 온건파 사이 논쟁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남침례교단 총회장을 지냈으며, 50권 이상의 책을 썼다.”고 그의 주요 업적을 소개했다.

스탠리는 1984년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남침례교단 총회에서 같은 끈기를 보여줬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교단 내의 보수파와 온건파의 싸움을 끝낼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의 반대 세력들은 제일침례교회가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공포를 느꼈는데, 한 신학교의 총장은 회중의 자유(침례교단의 중요한 정신 가운데 하나, 크리스천투데이, 역자주)를 침해하면서까지 신학적 통일성을 주장한 스탠리를 포함한 보수파에 대항하는 것을 성전이라 부르기도 했다.

보수주의자들은 특히 신학교와 교단의 공공 정책 단체들에서 주장하는 진보적인 일탈을 자신들은 저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총회장으로서의 첫 번째 해에, 스탠리는 신도들이 여성들에게 안수하는 것을 막는 조치를 지지했다. 당시 남침례교단에는 13명의 여성 담임목사가 있었고, 220명 이상이 안수를 받았다고 소개했다.

아들 앤디 목사와 갈등으로 그의 아들은 제일침례교회를 떠나 노스포인트 커뮤니티 교회를 설립했는데, 그 교회는 구도자 중심의 대형교회로 성장하여, 40,000명 이상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

아버지 스탠리는 교회 내 분쟁, 아내와의 이혼 소송이 있었다. 이 시기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외로운 시기였다고 묘사했다.

처음 몇 번, 밤에 혼자 식료품점에 가고, 혼자 집에 그것도 빈집에 갔을 때, 그것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좋아요, 주님, 이게 제 현실이네요,”라고 말했다. “제 아내는 떠났고, 목사에게 그것은 재앙이었습니다. 교회가 널 해고할 거야.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최악을 생각하거든. 그러나 저희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목사님은 우리가 목사님을 필요로 할 때 항상 우리를 위해 여기 있어 줬어요. 이제 우리가 목사님을 위해 여기 있을 겁니다.’”라고 지난 목회 생활을 회고했다.

이 기사를 쓰면서 한 세기에 영적 영향력을 미쳤던 거장들도 나그네 인생으로 마지막 종착역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뉴스제공: 콜로라도 정준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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