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권 교수의 문화 산책-이야기 머문자리(1)

 

운현궁 정문

 

운현궁(雲峴宮) 소회(所懷)

서울에서 3시간여의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자연스레 운현궁으로 가게 되었다. 수차례 방문한 일이 있었으나 이번 방문은 꽤 오래간만이다. 길이 변하기도 했으나 자주 다니지 않아서인지, 안내를 잘못 보았는지 모르나 좀 헤맸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그 앞에 운현궁이 있다. 모르면 힘이 든다. 계단을 올라서 지상으로 나오니 운현궁의 담장이 보였다. 참 오래간만이다.

 

현 운현궁 건물 배치도(자료 출처: 운현궁 안내)

 

보기: ① 수직사 ② 노안당 서행각 ③ 노안당 ④ 노락당 남행각 ⑤ 노락당  ⑥ 노락당 북행각 ⑦ 이로당 동행각 ⑧ 이로당 ⑨ 유물전시관 ⑩ 기획전시실

 

한때 조선을 호령하던 흥선(興宣) 대원군(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집이고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1863.12~1907.7)의 생가로 알려졌지만 생가 자리는 현재 현 운현궁 터 밖에 있었던 모양이다. 운현궁은 고종의 등극(登極) 후 궁(宮)에 준하는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이는 고종이 즉위한(1864, 고종1년) 이후 대왕대비가 대원군을 우대하여 호조에 명함으로 노안당(老安堂)과 노락당(老樂堂)을 건립하고 “운현궁(雲峴宮)”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노안당 서행각과 출입문

 

노안당은 흥선 대원군의 사랑채로 주로 대원군의 거처였다고 한다. 고종의 섭정으로 그가 집권한 10여 년 이곳에서 정치 활동을 했던 곳이다.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로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노락당은 1866(고종 3년)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嘉禮)를 올린 곳이다. 이 두 건물의 규모와 건축양식은 궁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운현궁 노안당

 

노안당(사적 제257호)은 논어(論語)에서 온 말로 “노인을 공경하며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이다. 1864년(고종1년)에 완공하였고 평면은 T자형으로 온돌과 마루로 구성되었고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공간이 구성되었고 목조 건물로 세부 기법은 궁궐에 버금가는 품격을 갖추었다.

 

노안당 북편과 노락당 남행각 사이, 뒤에 보이는 양관은 1900년대 초에 지은 운현궁 건물

 

노락당(사적 제257호)은 운현궁의 안채로서 노안당과 같은 해인 1864년(고종 1년)에 건축했다. 규모는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평면은 일자형인데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로는 온돌방을 두고 앞뒤로는 툇간을 둔 궁궐 내전 평면과 유사하게 구성되어있다. 세부 기법은 조선 말기 궁궐건축기법에 버금가게 하였다. 노락당 동쪽 통로로 이로당에 연결된 점도 특색이다.

 

고종과 명성 황후의 가례가 치뤄진 노락당

 

노락당은 1886년(고종 3년) 고종의 가례를 올린 곳이고 가례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가 운현궁을 방문할 때 거처로 사용하여서 별궁이 되었고 새로운 안채가 필요하여 1869년(고종 6년) 이로당(二老堂)을 건축하게 되었고 그 뒤편에 영로당(永老堂)도 건축하였다.

 

운현궁 동쪽면 노락당과 이로당을 연결하는 통로가 열려있다.

 

이로당(사적 제257호)은 고종 가례 이후 새로운 안채가 필요해져서 1869년(고종 6년)에 건축했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ㅁ자형의 건물이다. 실내는 마루와 온돌로 구성되었고 궁궐과 비슷한 평면구조와 창호, 차양 같은 세부 기법은 노락당과 같은 수준으로 건축되었다. 이로당을 지을 때, 영로당이라는 건물도 지었는데 현재는 운현궁 밖에 있으며 김승현 가옥(민속문화재 제19호)으로 알려져 있다. 영로당은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의 별당 사랑채로 지었다고 한다.

 

이로당과 동행각, 동행각을 통해 노락당과 연결한다.

 

현재 운현궁은 서울시 소유로 문화재로서 시민에게 개방되고 있다. 역사 공부를 하려는 시민과 외국인들이 많이 찾고 있으며 약간의 휴식 공간도 있고 유물전시관과 기획전시실을 통해서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다.

 

운현궁 담장 넘어로 지붕이 보이는 영로당 건물, 이재면의 사랑채였다.

 

흥선 대원군이 고종의 섭정을 한 시기(1863~1873)는 유럽 특히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이 무르익어가고 자유주의 무역이 일반화되어 가는 시기이다. 증기기관(蒸氣機關)에 의한 대량생산과 증기기관 기차(汽車), 증기선(蒸氣船) 등이 제작되어 세계가 좁아지는 때이다.

영국은 18세기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산업혁명을 계기로 하여 제국(帝國)으로 커가는 시기이고 영국의 산업혁명의 여파로 유럽 국가들과 일본과 소련 등에서도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시기이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이동 시간이 단축되고 이에 따라서 세계가 좁아지게 되었고 자국 영토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영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은 유럽 사회의 변화는 물론이고 아직 산업에 눈을 뜨지 못한 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무 준비도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와 접하게 되었으니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고종 황제 재위 시기와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는 급변하는 세계였고 세계 변화에 관해 지식도 부족하고 대응 방안 역시 미흡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조(朝鮮朝)를 지배해온 사상은 성리학(性理學)인데 이는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일삼아 실생활에 연결되지 못하였다. 이런 사상이 새로운 사상 유입을 부정(否定)하게 되고 나라의 살림은 피폐해져 가게 했다.

 

운현궁 유물전시관에는 고종과 대원군 관련자료가 전시되어있다.

 

조선은 16세기 말 왜란(倭亂 1592~1598)과 호란(胡亂, 1636.12~1637.1)이라는 국난(國難)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의 무기력함을 잘 나타냈고 국민의 생활은 피폐해 져갔다. 정약용을 위시한 실학사상이 대두되 실증주의적이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이루려는 기풍이 일어났지만, 성리학자들에 의해 모두 죄인으로 유배나 처형을 당하게 된다. 과학화의 기회는 사라지고 산업이나,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공리공론을 일삼는 동안 세월은 지나가서 무력한 조선이 19세기를 맞고 과학화되어가는 서구(西歐) 앞에 민낯을 보이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 역시 이런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변화에 대해서도 알 리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나라를 지키는 길이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여겼을 것이다. 조선조 후기 정치지도자들의 안목은 세계 변화를 잘 몰랐을 것이고 이에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쉬운 일이다. 실학사상이 받아들여지고 학문이 실생활에 접목되었다면 우리도 19세기에 어엿한 능력 있는 국가로 열강 앞에 우뚝 섰을 것이다.

흥선 대원군은 내치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것도 사실이지만 급변하는 외세에 대해 대응하지 못한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운현궁 노안당을 바라보면서 160여 년 전 흥선 대원군은 이 방에서 무엇을 추구하고 백성의 생활 향상을 위해 무엇을 궁리했을까? 궁금해진다. 나라의 지도자는 국민의 안위와 직결돼 있다. 한 지도자가 바른 생각을 하고 가야 할 길을 알며, 이를 추진할 능력을 갖추었다면 이는 모든 국민의 행운일 것이다.

나는 운현궁을 찾을 때마다 지도자의 자질은 무엇일까? 자신의 안위를 위해 권력이나 유지하려 한다면 국민은 어찌 될까? 복 받은 나라는 어떤 지도자가 있었을까? 늘 아쉬운 마음으로 그 캠퍼스를 떠나곤 했다.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 가례 관련 이미지]

 

명성황후의 수납채 의식의 복식
가례 절차, 육례
고종 황제와 명성 황후의 친영례 복식; 고종 황제의 면복(冕服) 명성황후 적의(翟衣) 모습

 

가례(嘉禮) 예식

왕실 혼례(婚禮)로서

1. 별궁(別宮)에 사자를 보내 청혼을 하는 의식 납채(納采)

2. 대궐에서 예물을 보내는 납징(納徵)

3. 길일을 택하여 길일(吉日)을 알려주는 고기(告期)

4. 왕비 책봉의식인 책비(冊妃)

5. 왕이 별궁으로 왕비를 맞으러 가는 친영(親迎)

6. 왕과 왕비가 술잔을 나누고 첫날밤을 지내는 동뢰(同牢)

이상 육례를 치렀다.

 

육례를 치른 후

1. 왕실 웃어른께 인사를 드리는 조현례(朝見禮)

2. 백관의 하례를 받는 진하의례(進賀儀禮)

3. 종묘에 고하는 묘현례(廟見禮)로 가례 의식을 모두 마치게 된다.

왕비되는 일이 무척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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