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권 교수의 문화 산책-이야기 머문 자리(2)

 

북촌 한옥청에서 옛 것을 배우고 있는 한복을 입은 초등학생들
북촌 한옥청에서 옛 것을 배우고 있는 한복을 입은 초등학생들

우리나라의 전통 가옥을 한옥(韓屋)이라한다. 7, 80년 전만 해도 서울의 가옥은 모두 한옥이었고 초가(草家)가 많았고 기와집은 많지 않았다. 서울뿐이겠는가 조선 팔도 모두가 한옥이었다. 북쪽 지방에서는 너와()를 쓰기도 했다.

초가는 볏짚으로 이영을 만들어 빗물이 스며들지 않게 지붕에 얹는다. 볏짚이 잘 썩기 때문에 거의 2, 3년에 한 번은 새 이엉을 이어야 한다. 그러니 수고가 많았다. 그러나 가을에 새 지붕을 이어 놓으면 노르스름한 따뜻한 색채가 무척 아름다웠다. 이런 집은 서민들의 집이고 집의 크기도 작은 편이다. 볏짚은 우리나라 서민가옥의 대표적인 지붕 재료이다. 초가집은 조형미, 색 감정, 부드러운 질감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볏짚을 쓰는 것이 보편적이고 이외에도 보릿짚, 억새, 갈대, 왕골, 창포, 삼대 등을 쓰기도 한다.

한국인의 집 초가(草家) 자료출처: https://search1.kakaocdn.net/argon/0x200_85_hr/6K2TlSNz2TC
한국인의 집 초가(草家) 자료출처: https://search1.kakaocdn.net/argon/0x200_85_hr/6K2TlSNz2TC

너와(너새의 변한 말) 지붕은 남쪽 지방에서보다는 북쪽 지방에서 더 많이 사용한 것 같다. 너와는 나무로 기와를 만든 것이라 하면 좋을 것이다. 너와를 강원도 지방에서는 느에 또는 능에 라고도 한다. 너와는 지름 30이상의 나뭇결이 바르고 잘 쪼개지는 적송 또는 전나무 등의 나무줄기에서 밑둥치와 윗부분을 잘라낸 다음 토막을 내서 사용하며 쪼개는 방향은 생목(生木)이 서 있던 향의 동서(東西) 방향에 평행이 되도록 잘라서 사용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홀 선교사가 맹소녀 오봉래를 가르쳤던 집인데 이 지붕이 너와이다. 1894년 5월 15일, 이집은 평양 여의원(女醫院)으로 쓰였다. 사진에 쓰여진 글씨는 홀 여선교사가 이 집에서 평양여의원을 시작한 일을 친필로 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홀 선교사가 맹소녀 오봉래를 가르쳤던 집인데 이 지붕이 너와이다. 1894년 5월 15일, 이집은 평양 여의원(女醫院)으로 쓰였다. 사진에 쓰여진 글씨는 홀 여선교사가 이 집에서 평양여의원을 시작한 일을 친필로 쓴 것이다.

기와집은 기와를 지붕에 얹은 집을 말한다. 기와는 찰흙이나 시멘트로 구운 것이고 규격을 잘 맞추어 얹기 때문에 빗물을 잘 흘려보내서 집을 보전하는데 무척 유용하다고 보인다. 따라서 내구성도 있어서 실용적이지만 값이 비싸서 서민들은 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와집은 양반 또는 재력가의 집이고 초가는 서민의 집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기와가 들어온 것은 고구려 초기인 것 같다. 그러니 벌써 2,000여 년 전의 일이다.

신분이나 재력에 따라서 기와의 색을 달리하기도 했다고 한다. 보통은 검은색 기와이지만 유약을 사용해서 청기와를 사용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비교적 기와집은 넓은 편이어서 안채와 사랑채를 갖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부부의 생활공간을 달리했던 것 같다.

북촌 한옥청에서 내려다본 북촌의 기와집(도시형 가옥)
북촌 한옥청에서 내려다본 북촌의 기와집(도시형 가옥)

아쉬운 것은 한옥이 우리나라에서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초가를 찾아보기 어렵고 기와집은 좀 남아있지만, 대부분이 사라졌다. 이제 한옥을 민속촌 같은 데 가야 볼 수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현재 우리의 상황을 보면 거의 아파트가 주된 주거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옛 한옥은 사라져간다. 대부분이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생각이 좀 더 깊은 곳에 머문다면 그리 잘한 일은 아니라 생각된다.

서구의 주거형태를 보면 어떤 시사(示唆)를 얻게 된다. 혼자 지내는 사람이나 결혼 초에는 아파드 생활을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 좀 자라면 대개는 주택으로 이사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공간이 필요하다. 땅도 필요하고 자라나는 식물도 꽃도 모두 아이들 정서에 없어서는 아니 될 것들이다. 아이가 자라서 대학을 가고 독립해서 나가면 그때 좀 더 관리가 쉬운 아파트나 콘도 같은 곳에서 살게 된다. 주거에도 사이클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북촌의 한옥마을 관광지도, 노란선이 한옥이 형성되있는 라인이다. 자료출처: 서울시 주택정책실 한옥정책과
북촌의 한옥마을 관광지도, 노란선이 한옥이 형성되있는 라인이다. 자료출처: 서울시 주택정책실 한옥정책과

서울의 북촌 한옥마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북촌은 종로와 청계천을 중심으로 볼 때 북쪽에 있다 하여 북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다. 현재 서울시의 종로구 가회동, 계동, 삼청동, 원서동, 재동, 팔판동 일대를 포함한 34만여 평의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비교적 잘 보존된 한옥을 만날 수 있고 조선 시대 양반들의 주거지로 길과 물길 등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전통기능 보유자와 예술인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건축가, 미술가들의 작업공간이 열리고 다양한 갤러리, 음식점, 카페, 부티크, 아트숍 등을 쉽게 만나게 된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북촌문화센터, 북촌한옥역사관, 북촌한옥청, 북촌생활사박물관, 북촌마을안내소 등을 운영하고 있어서 자료를 얻기에 불편함이 없다. 이런 건물은 대부분 한옥을 이용하고 있어서 한옥 내부를 관찰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초등학생들이 문화체험을 위해서 이런 곳을 방문하는 모습이 간간이 눈에 뜨인다.

북촌 문화센터로 사용하고 있는 한옥, 비교적 규모가 큰 집이고 기와와 담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북촌 문화센터로 사용하고 있는 한옥, 비교적 규모가 큰 집이고 기와와 담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북촌 한옥마을은 일본강점기 만세운동이 있은 뒤 1920년대부터 서울(당시는 경성부)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택이 모자라 건축붐이 일어난 모양이다. 그래서 북촌의 한옥은 서민형 주택(도시형 한옥)이라 할 것이다. 일인들이 남산 근처에 웅거하다가 점차 북쪽으로 이동하는 조짐이 있어서 건축업자 정세권(鄭世權)은 북촌에 있던 부호들의 큰 집을 작은 필지로 나누어서 도시형 한옥을 지었다고 한다. 한옥을 지음으로 일인들의 접근을 막는 효과가 있었고 정세권은 이렇게 번 돈으로 조선어학회 건물을 기부하였고 조선말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하니 조선집 지어 얻은 이익을 다시 우리 민족에 환원하는 민족사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북촌의 한옥은 민족정기를 불어넣는 문화사업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북촌7. 북촌은 산자락에 형성되어 있어서 언덕에 지어진 집들이 있다. 골목길을 보라
북촌7. 북촌은 산자락에 형성되어 있어서 언덕에 지어진 집들이 있다. 골목길을 보라

정세권의 조선집 짓기는 북촌의 ㅅ자형으로 이루어져 띠가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관광 지도에서 노란 선을 따라 한옥이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고 이 선이 대략 ㅅ자형이다. 그림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노란 선을 따라서 방문자가 한옥촌을 보게 되어 있고 출발은 북촌문화센터에서 하고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김성수 가옥과 북촌한옥역사관을 경유하여 중앙고등학교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다가 바로 남서향 골목길로 들어서면 북촌한옥청(-사이)이 있어서 옛날 처네, 뽈기, 아얌/조바위, 장옷, 족두리, 남바위 등을 볼 수 있고 여기 지대가 높아서 한옥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북촌로(비교적 큰길)을 건너서 계속 걸으면 북촌 한옥밀집지역을 만나고, 에서 맹사성 집터를 만나고, 에서 북촌생활사박물관을 만난다. 그리고 남하해서 동아일보 창간사옥(創刊社屋)에서 끝나게 된다.

이 한옥은 한옥청으로 쓰이는 집인데 마당에 물두멍이 있어서 땅 팸을 막기 위해 지붕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받는다.
이 한옥은 한옥청으로 쓰이는 집인데 마당에 물두멍이 있어서 땅 팸을 막기 위해 지붕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받는다.

20세기 초 우리나라가 곤경에 빠져있을 때 나름대로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서 애쓴 분들이 있었고 시대변화는 새로운 문물을 요구하게 되고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에게 도시형 가옥이 필요했고 이런 집은 북촌뿐 만이 아니라 서울 일원에 건축되어 어려운 가옥문제를 해결하는 단초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길가 한옥을 개조해서 구멍가개를 열었다.(계동길)
길가 한옥을 개조해서 구멍가개를 열었다.(계동길)

나는 북촌길을 걸으면서 우리 것은 무엇이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 가를 생각했다. 오늘 옛것을 쉽게 버리는 세태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옛 조상들의 문화를 잘 보존하여 새 세대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문화는 무엇인가! 선조의 지혜가 후세대에 전달되는 것이 아닌가, 재미로, 즐기기 위해서 북촌길을 걸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길에서 느끼고, 깨닫는 것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글과 사진. 김정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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