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호 박사와 함께 가는 누가복음 산책 (70)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2. 엠마오 두 제자(24:13-35)-말씀과 부활하신 예수

2) b. 예수를 모름(16), b'예수를 앎(28-32).

두 제자는 예수와 동행하면서 그분이 예수인 줄 알아보지(mh ejpignw'nai/메 에피그노나이) 못합니다. 눈이 가리웠기 때문이라 본문은 말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자, 눈이 밝아져(dianoivgw/디아노이고)’ 예수를 알아봅니다(ejpevgnwsan/에피그노산). ‘밝아져는 신약에 8번 나오는데, 마가의 1번을 제외하면 모두 누가-행전에 나옵니다. 24장에는 이 단어가 3번 나옵니다. 눈이 밝아지자예수를 알아보고(31), 성경을 풀어주자마음(kardiva/카르디아)이 뜨거워지고(32), 마음(nou'"/누스)열자성경을 깨닫습니다(45). 눈이 밝아지고, 성경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는 것은 서로 연결된 개념입니다.

마음으로 번역된 45절의 누스는 세계와 존재를 이해하는 사고 기관으로서의 이성 혹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스토아(stoa)에서 누스는 신과 연결되며, 헤르메스(Hermes)누스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에픽테투스(Epictetus)누스를 하나님의 본질이라 말합니다. 눈이 열리고, 마음(누스)이 열리고 마음(카르디아) 뜨거워져야 예수를 알고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예수를 알고 성경이 보인다 

누가복음의 저술 목적이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ejpignw'/"/에피그노스) 하기 위해서(1:4)인 점을 생각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떡을 떼어 주어 알게 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초기 유대문헌에서 떡은 토라의 은유로 사용됩니다. 떡을 떼어 줌을 성찬식과 연결시키는 학자가 많습니다. 누가도 떡을 떼는 것말씀을 연결해 말합니다(2:42). 떡을 축사하고 그들에게 주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제자가 예수를 알아본다는 누가 서술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된 창세기의 언급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자,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었다는 것을 압니다(3:6-7). 먹음으로, 가르침을 받음으로 눈이 떠지고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을 연결해 볼 때 무엇을 먹고, 어떤 가르침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타락할 수도,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요한복음은 예수를 생명의 떡’(6:33,35,48,51)이라 말합니다. 이 생명의 떡을 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하며 기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2:42; 20:7).

Supper at Emmaus by Caravaggio, 1601
Supper at Emmaus by Caravaggio, 1601

24장의 가장 독특한 점은 예수를 예수로 알아보자, ‘예수가 보이지 않았다는 표현입니다.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지만 예수인 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눈이 밝아져 예수인줄 알아봅니다. 닫힌 눈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를 보아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가 자기들이 알던 나사렛 예수와 달랐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과거의 의식과 시각만으론 부족하고, 새로운 차원의 의식 변화와 영적 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가 자기가 알던 그 예수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예수께서 사라졌다는 표현은 기독교 세계관에서 매우 낯설고, 오히려 불교적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사도행전의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 이야기에도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8:39).

불가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 합니다. 만난 부처에 매이지 말고 부처까지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부처를 찾고, 믿음으로 부처를 따라가, 부처 있는 곳까지 가 부처를 만나야 하지만 부처를 만나면, 그 부처마저 죽이고 부처를 넘어서 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 배가 필요하지만 강을 건넌 후까지 그 배를 이고 지고 가려해서 안 된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두 제자는 자기의 길, 엠마오의 길로 가지 않고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두 제자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는 것,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가는 보여주고자 합니다(참고 바울의 다메섹).

 

3) c. 예수와의 대화(17-27)-말 걸어오는 예수.

이 단락은 엠마오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예수의 2개의 짧은 물음(17a,19a)과 그에 대한 두 제자의 긴 대답(17b-18, 19b-21), 그리고 부활에 대한 다른 이들의 경험(22-24)과 예수의 말씀해석으로 구성됩니다(25-27).

두 제자는 예수의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예루살렘에서 되어진 일, 곧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로 말합니다. 이런 견해는 당시 일반 대중의 의견과 일치됩니다(9:8,19). 사람들은 그런 예수가 이스라엘을 속량해 주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은 이 예수를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합니다. 누가는 예수 죽음에 대해서 대제사장과 관리들의 책임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났습니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분명하게 죽었다는 말이며, 더 이상 살 수 없으며 자기들의 소망도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이 때문에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며 대화하면서 슬퍼한 것입니다.

두 제자는 어떤 여자가 자기들을 놀라게 한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그가 살아났다는 천사의 나타남을 봅니다. 그런데 자기들 중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갔지만 여자가 말한 대로 예수를 보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이런 두 제자를 예수께서는 미련하며 더디 믿는 자라 부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스도(메시야)가 고난 받는다는 것은 당시 유대인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여러 번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했습니다(7:25; 22:15; 24:46). 사람들은 고난을 죄와 연결해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선지자의 말을 더디 믿고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고난에 대한 이런 생각을 거부하며(13:2), 오히려 고난을 영광과 연결시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에 관한 말씀을 누가는 4번 말합니다(9:22; 18:32-33; 24:7, 26). 그리고 예수는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부터 성경에서 자기에 관한 것을 설명합니다(27). ‘설명하다‘diermhneuvw/디엘메뉴오로 신약에 6번 나옵니다(누가-행전2, 고전4). 사도행전은 번역하다(9:36)’로 고린도전서는 모두 통역하다로 번역합니다(12:30; 14:5,13,27).

 

3.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24:36-49)

누가는 24장에서 부활을 점층적으로 기술합니다. 여자들은 무덤에서 만난 천사로부터 죽은 예수가 살아있다는 것을 듣습니다(1-12).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와 시몬에게 나타나고(13-35), 열한 제자와 함께한 자들에게 나타납니다(36-49).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평강을 기원합니다. 평강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그날 천사가 목자에게 예수의 탄생을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말하였던 말입니다. 부활의 주, 영광의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평강을 기원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놀라고 무서워합니다. 부활하신 주를 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두려워하다는 원어로 혼란스럽다는 의미의 ‘taravssw/타랏소로 수동태일 때는 혼란(무질서)에 빠지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이 부활하신 주를 만남으로 오히려 무질서 상태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는 자기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고, 나를 만져보라고 말합니다.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직접 경험하게 함으로 혼란을 없애주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합니다.

예수께서 저들에게 먹을 것을 찾았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시고, 말씀합니다. 24장에는 떡과 말씀(30,35)과 생선과 말씀(42-47)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오병이어 이야기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미지 출처 : 프리바이블 이미지
이미지 출처 : 프리바이블 이미지

‘5개의 떡하나님 말씀으로 물고기 2마리예수에 대한 신앙고백/메시야고백으로 연결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덤에 간 여인들이 천사로부터 들은 말(7)과 예수께서 하신 말(46)은 거의 같습니다. , 무덤에서 만난 천사가 여인에게 한 말은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27)와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47)고 말합니다. 죽음과 삶, 고난과 영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제자들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아버지께서 약속하시고 보내실, 위로부터 오는 능력의 덧입혀짐을 위해서 이 성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할 때 나사렛 회당에서 읽은 말씀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4:18a)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령 부음이 있어야 사역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물라는 것은 약속하신 성령부음을 통해 능력의 덧입혀짐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 부활의 증인으로 사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증인은 누가복음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예수의 이 선언 이후 사도행전에서는 중요한 단어가 됩니다.

 

성령의 덧입혀짐을 사모하며

예루살렘에 머물라

4. 베다니와 예루살렘(50, 51-53)

예수께서 베다니까지 이들을 데리고 가 축복합니다. 베다니의 실제 위치와 관련한 논의들이 있지만 유의미한 내용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각을 달리해 이곳 이름의 의미 고난의 집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중요하였습니다. 24장은 그리스도 고난과 부활을 말합니다. 고난의 집인 베다니에서 예수께서 승천합니다. 사람들을 축복하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집니다. ‘올려진다‘ajnafevrw/아나페로로 누가복음에서는 여기에서만 사용됩니다. 특이한 점은 미완료 시상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승천과 관련된 용어가 두 개 나옵니다(ajnalambavnw/아날람바노/1:2,11, ejpaivrw/에파이로/1:9). 예수께서는 승천과 관련해 예루살렘 행(9:2632:19:12: 22:69: 24:26)을 결심하였고, 목적지에 이르러서 승천합니다. 예수 사역이 마무리되고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증인의 시간입니다. 약속한 것이 보내지고, 이 능력을 덧입혀질 때까지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