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은혜 보좌 앞에 나갈 필요성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경우를 매 순간 만나게 된다. 시험을 칠 때 필요한 도움이 있고 배를 타고 항해할 때 필요한 도움이 있고 배우자 만남을 위한 도움 등 도움이 필요하다. 사업 번영, 매입과 매매, 출입, 건강 회복 등 생활에 도움도 필요하며 출산의 안전, 하나님 능력, 자녀 성장과 교육 등을 위한 도움도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지도 요청하지도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도움을 얻지 못한 것은 구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구하지 못함은 내가 이런 주제에 이런 것을 감히 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자기 연민 때문에 구하지 못하고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구해도 얻지 못함은 잘못된 동기로 잘못된 방법으로 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구해 놓고도 얻지 못함은 하나님이 설마 이것까지고 주시겠는가 하는 의심과 불신 때문이다. 즉 인생사 매사에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실제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음, 잘못된 동기의 구함, 의심과 불신, 그리고 자격지심 등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우리의 삶에 직면하는,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분의 신성하신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축복과 특권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마치 충분한 돈이 들어있는 계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마음껏 수표를 발행하고 돈을 인출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은혜의 계좌를 언제든지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우리가 전혀 요청하지 않고 활용하지 않아도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문제를 해결하시고 선한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도움을 주실 때 우리가 그것을 요청하고 간구하고 힘써 구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B. 은혜의 보좌에 나가는 통로인 기도
우리가 기도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항상 부닥치는 문제가 있다. 이미 확고하게 정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어찌 인간이 간청하고 기도하여 그 뜻을 변경시킬 수 있는가 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기도”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일들에 대하여 모두 다 작정해 두셨다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무엇인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고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기도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것을 굳이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가 벌써 다 알고 계심을 알면서 내게 필요한 것을 그 앞에 또 번거롭게 내어 놓을 필요가 있겠는가?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고 하셨지 않은가? 이 문제를 어떻게 우리가 이해하고 해결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알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그가 아시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하나님께 정보를 드리고 지식과 사실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필요함을 그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다 알고 계심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가 찬송하고 감사하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감사하기를 기대하시는 것과 똑같이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을 통하여 그 자체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찬송이 되고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신뢰하는가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 기도에 대한 명령을 말씀하고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항상 기도하라”(눅18:1),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약5:15),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6)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뿐인가! 우리의 완전한 모델이요 모범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기도의 인물이셨다. 그분은 바로 참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러면서 그분은 참사람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특히 그분은 공생애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셨고 그분의 생애의 운명도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마치신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는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과 의도를 결코 변화시킬 수 없고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과 목적을 새롭게 만드시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는데 그것을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작정하신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으나 그들이 복음 전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도록 작정하셨다.
복음은 주님의 영원하신 뜻을 성취하시는 방편으로 작정하셨듯이 기도 역시 또 다른 방편들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은혜의 보좌인 하나님께 나아가 드리는 기도는 그 분의 영원하신 작정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도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과 작정을 성취하는데 사용하시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으셨다. 참으로 모든 것이 우연히 또는 숙명적 필요에 의하여 생긴다면 그런 경우의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의 성취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이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여러 사건들의 차례 속에 들어있는 한 과정임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방편인 기도가 필수 요건임을 밝히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방편
예를 들면 엘리야는 하나님이 비를 주실 때가 거의 되었음을 알았지만 그는 곧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기도하였다(약5:17,18).
다니엘도 포로 생활 70년 동안 이루어지는 줄 이미 알고 있었지만 70년이 거의 다 될 때, 가만히 있어도 70년이 하나님의 시간 때에 이루어지지만 그는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였다(단9:2,3).
예레미야에게도 29장 11절에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12절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이 평안을 주시겠다고 이미 약속해 놓으시고 또한 약속하여 놓은 것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에스겔 36장에도 하나님께서 미래의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밝은 전망을 말씀하셔 놓고도 37절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영광의 부활을 하실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시고 요한복음 17장 5절에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다.
C. 기도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통로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은혜 보좌 앞에 나가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1) 기도는 하나님께 존귀함 드리는 영광의 표시
하나님은 참으로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계시는 분이심을 우리로 통하여 인정받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 분이 우주를 주관하고 통치하는 분이심을 인정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로 통하여 주님이 경배 받으시며 그분께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기도는 바로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예배의 행위이다.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다. 기도는 그의 거룩하고 크신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기도는 그의 선하시고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도는 그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의지에 복종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기도는 곧 우리가 그분을 의존한다는 표시이다. 기도는 그분의 능력 앞에 우리의 겸손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도는 주님이 바로 우리의 축복의 근원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그분을 그만큼 신뢰하는 것이므로 그분이 그만큼 기뻐 받으시고 그만큼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2) 기도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고귀한 방편
은혜와 믿음은 말씀을 통하여 생성되나 기도를 통하여 실제적 믿음도 연단된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는 역사하게 된다. 기도가 단순히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으로서 만족보다 기도는 바로 필요의 공급자이신 주님을 만나는 위대한 통로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비롭고 은혜로운 세계를 체험하고 믿음의 비밀을 가지게 되고 영적으로 속사람이 성숙하게 되는 방편이 된다.
3) 기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축복의 통로
히브리서 11장 말씀에 믿음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자이심을 믿는다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를 통한 문제 해결은 바로 우리가 언제나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아하, 지난번에 그처럼 어려웠던 일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간구하였더니 해결되었다”.라고 감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번 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지 하는 믿음이 생기게 한다.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를 통하여 우리가 겸손해지고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나아갔더니 이런 축복을 받게 되었다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과 세상에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할 수 있는 증거의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D. 기억해야할 두 개의 보좌: 은혜의 보좌와 심판의 보좌
성경에는 몇 가지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예가 나온다. 그 중 하나가 요한계시록 6:16-17에 보면 하나님께서 진노와 심판의 보좌에 앉아 계신 모습이 나온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보좌를 볼 때, 산과 바위들에게 자기들 위에 떨어져 하나님의 얼굴과 진노로부터 자기들을 가리워 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또 다른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이 이사야 6장 5절에 나온다. 거룩하고 위엄으로 가득찬 보좌이다. 이사야가 이 보좌를 보는 순간 하나님의 위엄에 눌린 나머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외쳤다. 그러나 본문에 나온 보좌는 은혜의 보좌이다. 이것은 계시록에 나오는 진노와 심판의 보좌도 아니며 이사야6장 5절에 나오는 거룩하고 위엄에 찬 보좌도 아니다. 오직 은혜의 보좌이다.
죄인인 우리가 진노의 보좌를 바라볼 때 두렵고 떨리고 더욱이 공포까지 느낄 수밖에 없다. 또한 거룩하고 위엄에 찬 보좌를 생각할 때,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들은 더럽고 누추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더욱 자책하고 자학하고 자기 연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은혜의 보좌를 생각할 때 비록 나 자신은 연약하고 부족하고 실패하고 넘어져도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용납하고 우리를 감싸주고 치료해 주고 격려해 주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자신의 추하고 약한 모습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진노를 바라보고 벌벌 떨기보다는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은혜 보좌가 있음이 정말 감사하다. 우리가 또한 은혜 보좌에 조건 없이 나갈 수 있어 감사하다. 우리는 은혜 보좌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어 감사하다. 그리고 은혜 보좌에 내리는 축복이 너무나 후하셔서 감사할 뿐이다.
은혜의 보좌와
심판의 보좌
E. 은혜의 보좌의 특별한 은혜들
1) 기도문과 기도 내용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내가 드린 기도 내용에 실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실수조차도 하나님은 은혜로 덮어 주시고 내가 기도하려고 하는 그 중심의 마음을 보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 자체에 얼마나 결점과 오점과 모순의 얼룩이 많이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어눌한 기도, 우리의 논리성 없는 기도, 우리의 더듬는 기도, 우리의 핵심을 내놓지 못하는 기도 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은혜의 보좌 앞에서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문과 기도 내용과 기도 순서와 기도의 기술성과 무관하시다.
만약 폭군의 보좌 앞에서 탄원하는 자의 말투나 솜씨에 결점이 드러나면 무엄하다 하여 당장 그 앞에 쫓겨난다. 은혜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세상의 군주와 달리 자기 자녀들의 결점 있고 부족투성이인 부르짖음을 가혹하게 흠을 잡지 않으신다.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완전하고 완벽하게 자신의 공로로 그 기도를 효력 있게 바꾸어 놓으신다.
마치 찌꺼기가 낀 물이 정수기에 통과하여 맑은 물이 되듯이 우리의 기도조차도 그 기도에 부족과 허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은혜의 보좌 앞에서 기도한 것이기에 우리 주님은 미숙하고 연약한 우리의 기도를 가혹하게 비판하지 않으시고 은혜의 보좌에서 은혜롭게 기도를 받으신다. 그러기 때문에 은혜의 보좌이다.
2) 기도자가 가진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좌 앞에 나오기에 너무나 부당하고 부적합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정말 세리처럼 토색하고 십일조를 떼어먹고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짓을 한 우리의 모습들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뻔뻔스럽지만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분의 보좌가 율법의 보좌나 심판의 보좌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은혜의 보좌는 우리의 행위와 모습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은혜의 보좌는 우리의 과거의 행위에 초점을 두지 않으시고 현재의 우리의 마음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의 보좌는 나가는 자의 공로나 행위나 행적을 보지 않으시고 나가는 자가 누구의 이름을 힘입어 나왔느냐를 보신다. “누구든지 나와도 좋소”. “죄인 괴수가 나와도 좋소”. 은혜의 보좌는 단지 예수 이름을 믿는 초대장만이 있으면 만사형통이다. 인자한 아버지와 같이 가슴에 품는 은혜의 보좌이기 결코 채찍들고 내리치는 폭군의 보좌가 아니다.
3)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풍성한 보좌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 주시는 은혜가 후한 보좌이다. 주님의 보좌는 모든 은혜의 보좌이다. 그 보좌에는 그분의 포도원에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롭게 하루 분의 품삯을 주시는 은혜로운 포도원 주인이 앉아 계신다.
그 보좌에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오셔서 구속의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분이 앉아계신다. 범죄하여 포로로 잡혀있던 이스라엘에게 주님은 은혜의 보좌에 앉으셔서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 말씀하셨다. 그 보좌에는 실패한 베드로를 오히려 회복시켜 오순절의 능력있는 주인공이요 능력의 사자로 쓰신 후하신 주님이 앉아 계신다.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은 세상 끝날까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시겠다고 거듭거듭 약속하신 주님이 앉으신 보좌이다.(신31:6, 8, 시94:14; 사42:16; 히13:5). 은혜의 보좌에 앉으신 그분은 ”은혜를 베풀기 위해 기다리시는(사30:18) 우리의 아버지시요 아들인 우리를 결코 대적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롬8:31).
4)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넘치는 보좌이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갈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긍휼과 은혜는 무한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잘 나타내 주는 동의어이다. 이 말을 꼭 따로 생각해 본다면 긍휼은 고난을 당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며 은혜는 무가치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불행한 일을 만나고 곤란한 일에 당면하였을 때, 먼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을 초월하여 담대히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때를 따라 우리를 돕기 위하여 은혜를 베푸신다. 필요한 능력, 감당할 수 있는 여건, 회복할 수 있는 기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 의지할 수 있는 믿음, 부르짖을 수 있는 외침을 주신다.
5) 은혜의 보좌는 대제사장이 계시는 보좌이다.
우리가 어떠한 상태로 어떤 문제로 주님의 도움을 바라보고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때 거기에 우리보다 먼저 들어와 계신 분이 있다. 또한 그분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신다. 그분이 누구이시며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분은 위대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성경 히7:24-25에 알 수 있다.
구약의 제사장은 “코헨”이란 말이다. 그 뜻은 다리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자, 다리가 바로 제사장이다. 그러나 그 제사장 역시 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다리요 오직 완전한 다리되시는 참 중보인 우리의 대제사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참 생명의 길이요 진리요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구약의 제사장들과 비교할 수 없는 크고 완전한 제사장이다. 그분은 가장 의로우신 대제사장이시며 가장 능력있는 대제사장이시며 가장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죄인된 우리는 반드시 대제사장의 중보의 힘을 입어야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위해 가장 완전한 속죄제를 드림으로서 우리를 넉넉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가장 의로우신 제사장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가장 합당한 분이시며 그분은 가장 능력있는 대제사장으로서 단번에 속죄제사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분이시며 그분은 가장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끝까지 우리를 책임질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제사장이 계신 보좌는 은혜의 보좌요 우리가 그 은혜를 힘입어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6) 은혜의 보좌는 우리의 고통을 체휼하신 보좌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대제사장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또한 히4:15에 보면 이중 부정문을 써서 강한 긍정을 나타내는 말씀이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정말로 체휼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는 말씀이다. 체휼이라는 말은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다는 헬라어 “쉼파세오”에서 온 말이다. 체험을 통한 깊은 동정을 말한다. 체험해 보았기에 깊은 연민과 공감과 동정을 느낀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인간의 도덕적, 육체적 약함을 몸소 체험하시고 그러한 인간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게 되는 인간에 대하여 느끼시는 깊은 동정심을 말한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은 우리의 연약을 동정하실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일 뿐 아니라 결코 동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분이다는 말씀이다. 또한 그분이 동정하시는 것이 당연할 뿐 아니라 동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F. 연약을 체휼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은혜의 보좌에 계신 주님을 어떤 분으로 설명하고 있나?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이 어떤 것들이기에 그가 우리가 당한 고통과 시련과 아픔을 다 공감하시고 동정해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나?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은 시험을 받으셨다고 했는데 과연 예수님이 우리가 경험한 모든 일을 다 하셨다는 말씀인가? 모든 종류 하나하나를 다 경험하셨다는 말보다 예수님도 모든 다양한 모습으로 시련을 겪으셨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다양한 방법으로 유혹 혹은 시련을 당하셨다. 그분은 가난하게 태어나셨다. 그분은 가족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셨다. 그분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곤욕을 치루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당하셨다.
아마 누가복음 2장 이후에는 요셉에 대한 기록이 언급되지 않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아마 예수님께서도 30살 전에 육신의 아버지를 잃은 쓰라린 슬픔을 맛보셨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분이 우리가 보통 경험할 수 없는 최고의 시련을 당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신 것이다(마27:46).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고통을 당하는 느낌은 무엇인가? 내가 혹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지는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다. 그런 느낌은 정말 고통스럽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느낌이지 실제는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실제로 버림을 받으셨던 분이시고 그 버림의 아픔이 얼마나 아픈가를 실제로 당해 보신 분이시다.
이사야서 53장 3절에는 주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로 말씀하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한 체휼하신다는 것이다. 결코 우리의 아픔과 고통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주님께서는 생소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우리의 당면한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어두운 그늘 아래 한숨을 쉬고 고통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그곳에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의 문제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우리에게 구원과 회복과 은총을 베푸시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우리의 문제를 내어 놓기에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소경 바디매오의 병고침의 사건을 생각해 보자.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죽어가는 오빠를 살리기 위하여 발버둥쳤던 베다니 자매들을 생각해 보자.
마지막 한숨을 몰아쉬는 사랑하는 딸을 가진 회당장 야이로를 생각해 보자. 이들은 모두 우리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자신들에게 현재 직면한 고질적인 인생 문제를 해놓았다. 그들의 죽음과 아픔과 눈물을 체휼하신 주님은 그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바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가 무엇인지 체험한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근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할 수 있고 또 체휼하고 싶어하시는 대제사장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체휼(體恤) 처지를 이해하여 불쌍히 여김.
대제사장이 있다는 사실뿐 아니라 담대히 그분 앞에 우리의 조건을 보지 않으시는 은혜의 보좌 앞에 우리의 인생의 짐을 들고 나아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우리가 도움을 요청할 때 우리의 필요를 후하게 채워주신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약함 중에 더욱 겸손히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우선은 변화와 응답이 없는 것 같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족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신다. 하나님은, 그만큼 위대하고 선하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과 그분에게 나아가는 자에게 상을 베푸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를 기뻐한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를 믿고 누리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이다. 우리에게는 은혜의 보좌가 있다. 언제든지 어디서나 누릴 수 있는 보좌이다. 이 보좌 앞에 누구나 조건없이 나갈 수 있다. 때로 대제사장 예수가 먼저 와 계심을 믿고 나아가자.
G. 은혜와 능력의 근원인 보좌
히4:15-16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우리가 취할 태도에 대하여 성경은 잘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은혜의 보좌란 무엇인가? 이것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되시는 주님이 계시는 곳을 좀 더 우리가 가시적으로 느낄 수 있는 표현법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주시는 분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지 그 보좌 자체가 아님은 분명한 사실이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이요 말씀을 깨닫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겸손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자녀에게 은혜롭고 후하게 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필요와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겠다는 약속,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겠다는 약속, 모든 환경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하게 이루게 해 주겠다는 약속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본향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여 영화롭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 등등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들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이 약속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우리의 행동이나 성취나 공로 등의 조건을 따라 좌우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훈련을 받고 헌신하고 희생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런 것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나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한 전제나 조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신명기 8:17-18을 보자.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재물을 얻었을까 하노라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니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날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때로는 우리의 수고를 통하여 무엇을 조금 얻는 것 같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경우 우리의 수고와 전혀 관계없이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축복을 누리게 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옳은 말씀이다.
은혜의 보좌에 계신 주님은 언제나 그분의 긍휼과 은혜에 풍성하심에 따라 축복들을 주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수고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공로를 의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온전히 의뢰하는 법을 배워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는 우리의 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의 보좌에 계신 주님께 후하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의해서 사는 삶의 즐거움과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다원화 사회 특히, A1 시대에 외면당하고 핍절한 영적 사막화 시대에 절대 필요한 복음의 핵심이요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근원인 것이다. 갈한 영혼을 적시기에 충분한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생수를 마시길 축원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