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일곱째 주간


1. 끝에 웃는 복음 사역자(마 13:1-9 찬송가 487장 어두움 후에)

31년 넘도록 우리가 교회를 열심히 섬겨왔는데 숫자적으로 볼 때는 미약합니다. 이것이 성공인가? 실패인가?

씨 뿌리는 비유는 단편적인 설교인가? 많은 학자들은 한편의 설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학자들은 씨 뿌리는 비유로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요약 곧 autobiography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비유 속에서 예수님의 선교는 성공인가 실패인가? 예수님의 평생 동안 선교사역은 실패인가? 성공인가?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그런데, 비유를 보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한 공생애는 크게 4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1기, 제 2기, 제 3기, 곧 아주 중요한 시기인데, 이 시기에는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단계인 제 4기에서 빛을 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들어 가보면 씨를 뿌리는 데 제 1기는 씨가 길가에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산없이 열정으로 오로지 씨를 뿌린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개척교회를 하거나 선교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젊은 날에 하나님께 맡겨놓고 복음사역을 열정으로 하는 것이지 계산으로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단은 첫 단계에서 길가에 뿌려졌고 새가 먹어버린 것입니다. 열심히 씨를 뿌리고 사역을 하였으나 복음이 심겨지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받는 사람과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받지 않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받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날 설교를 받는 경우는 무엇을 말하는가? 은혜받았다고 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꺼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할 때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설교가 거부감이 들었던 이유를 오늘날 설교자에게서 우리가 반응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을 때 청중들 모두가 감동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분노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찔리기 때문에? 거기서 핵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 데 그들이 찔렸다? 이사야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들이 화를 내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할 때 화를 내어는가? 메시야라고 할 때 그들이 화를 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에는 우리의 설교와 다르게 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뼈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내가 메시야다”라는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냐는 구원자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설교자에게서 잘하는 설교, 못하는 설교라고 하는데 그런데, 잘하는 설교는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재미있는 설교 쉬운 설교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를 해달라고 합니다. 정한 시간에 어떻게 하면 빨리 끝나고 재미있게 설교하고 내 귀에 거슬리지 않는 설교를 원하는 것 아닙니까?

교회 와서 누구 만나러 온 것입니까? 설교 잘하는 목사 만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재미있는 말하는 사람은 예능프로그램에 있습니다. 성공강사도 있습니다. 거기에 메시야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 중에는 성공강사처럼 설교하면 좋을 텐데 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는 그런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 목적은 예수가 메시야됨을 받아들이기 위해 온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세례를 주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교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는 중에 길가 밭을 만난 것입니다. 메시야라고 택도 없다 저게 무슨 메시야인가? 우리는 그런 메시야에 관심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새가 씨를 먹어 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 사역을 하십니다. 여기는 어디에 떨어진 것인가요? 돌밭입니다. 처음부터 돌밭이 아닙니다. 그 위에 흙이 덮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믿음으로써 핍박도 받고 어려운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예수님을 믿는 생활을 하는 중에 어려운 일이 생겨났습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면 코로나 19 걸리는 줄 알고 언론과 정부는 교회소모임 금지를 선언하게 되니 교회 가는 것이 꺼려지게 된 것입니다. 핵심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돌밭에 뿌려진 씨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 사역하실 때 어디에 떨어졌습니까? 가시떨기에 떨어진 것입니다.
사막지대에 가면 풀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막지대에 푸른 초장이라는 곳이 바닥에 붙어 있는 잔디를 말합니다. 양들이 그것을 먹고 살고 있습니다. 다윗이 말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그 바닥에 무엇이 있다는 것이죠? 가시떨기도 그렇게 땅바닥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씨가 가시떨기 곁에 뿌려진 것입니다. 비가 오는 우기 철에 가시가 빨리 자랍니다. 그 속에서 씨도 싹이 나고 같이 자라납니다. 그리고 이삭이 팹니다. 문제는 이삭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쭉정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뿌리가 말라 죽은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많이 걸린 것입니다. 이 쯤 되면 그 충격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많은 손실이 있습니다. 시간을 더 많이 쏟아 부었고 기대도 많이 했습니다. 사람들이 열심을 내었고 교회가 부흥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가 분란이 일어났습니다. 분열이 있어났습니다. 문제는 예수 믿고 교회생활을 하는 중에 사람들에게 욕심이 생기 것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며 욕심을 내게 됩니다. 그들의 이해관계와 연결된 기득권의 세력들과 예수님 사이에 갈등하다가 그들은 돈과 이익을 선택한 나머지 예수 메시야 됨을 믿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세 번째 사역이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4단계 중에 세 단계가 날아갔습니다. 우리라면 이쯤 되면 그 사업 계속 하겠습니까? 우리는 몇 단계 쯤 가겠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3단계 이후에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갈 사람 없습니다. 젊은 날이 1단계, 2단계 중년기, 3단계는 인생중반기를 넘어선 것이고 4단계는 인생의 말 년 기에 접어드는데 그 때까지 사업을 추진할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4번째 뿌려진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씨가 좋은 땅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뿌리는 자가 중단하지 않고 계속 뿌리니까 씨가 좋은 땅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하다가 접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중단하지 않고 계속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쉽지 않습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10년간 선교하였어도 한 명도 없어서 철수하려는데 철수하는 그 날에 한 명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를 만나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선교사님이 한 명을 보고 선교지를 떠나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선교가 열매를 맺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 번째 뿌린 후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남아서 네 번째 씨를 뿌렸는데 그곳에서 좋은 땅을 만난 것입니다. 한 알갱이에서 100개가 맺고 또 한 알갱이에서 60개, 그 다음 알갱이에서 30개가 맺은 것입니다.

여기서 의미는 물량적인 것이 아니라 깨달음입니다.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100배 60배 30배 깨달음을 얻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기치 않게 만난 사람들입니다. 어부 출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창녀 출신 막달라 마리아 등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부자가 아니었습니다. 유력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선교사역의 네 번째 단계에 뿌린 씨의 열매였습니다.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은 양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깨달음에 있어서 성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냐가 성공이냐 실패의 기준입니다.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인 것이 가장 큰 성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선교 실패인가? 성공인가?

(마 13:1-9 18-23 찬송가 323장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수정교회 개척하여 31주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교회를 네 번이나 이사하였습니다. 예배당을 시설하는데 투자한 시간과 정력만해도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겸하여 아남인스트루먼트에서 신우회를 조직하고 만 10년 동안 목요일 마다 설교와 상담으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 도덕 윤리 기간제교사로 약 20개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직접 만나 복음을 심는데 보낸 시간이 만 11년이나 됩니다. 오직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여 전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이사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떠나갔습니다. 많은 학생들과도 헤어져야 했습니다. 직장 신우회 멤버들도 학교 신우회 교사들과 도 헤어져야 했습니다. 주변에 남은 사람들이란 지금 수정교회에 참석하고 있는 신자들입니다. 교회 현재 규모만 보면 수정교회는 부흥된 교회는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복음을 위해서 쏟은 시간과 노력에 비해 그 열매가 미약한 것처럼 보입니다. 선교의 실패인가? 성공인가?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수정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하면서 함께 교회를 지키고 있는 가족들이 눈에 보이는 유일한 복음의 열매의 증거입니다.

오늘 씨뿌리는 비유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자서전적 이야기입니다. 비유 속 이야기에서 들어볼 때에 예수님의 선교는 실패인가? 아니면 성공인가? 예수님이 한 복음의 사역은 네 번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세 번은 완전 실패였습니다. 길가 밭에 뿌려진 씨, 돌밭에 뿌려진 씨, 그리고 가시밭에 뿌려진 씨에서는 한 알의 열매도 건지지 못하였습니다. 인생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시간과 젊음을 몽땅 쏟아 부었으나 아무런 소득도 건지지 못한 것입니다. 시간 열정 꿈을 다 쏟아 부었으나 예수님께서 정성껏 심었던 그 씨에서는 아무런 열매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새가 먹어버렸고 두 번째는 뿌리가 타서 말라 죽었고 세 번째는 가시의 기운에 막혀 열매가 되는 줄 알았더니 모두 쭉정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간과 열정과 돈을 투자한 사업가라고 한다면 그 손실에 대하여 사업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네 번째 씨에서 기대를 초월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씨가 떨어진 곳이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 곳에 심겨진 씨에서 곡식이 나왔습니다. 그 씨에서 자라난 각각의 이삭에서 하나는 100배 다음은 60배 그 다음은 30배의 소출을 내었습니다. 이것은 처음에 세 차례나 뿌린 곳에서 보았던 시간 열정 돈의 손실보다 더 큰 보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역을 하면 모든 것이 다 성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복음 사역에 실패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공생애의 4분의 3은 실패의 과정을 지난 후에 마지막 단계에서 기대를 초월한 복음의 열매를 얻었던 것입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8절)”


3. 참으로 여기에 계시도다

(창 28:10-19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장자권을 빼앗긴 후에 노가 극에 달한 그의 형 에서의 공격을 피하려고 야곱은 하란 땅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하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가나안땅을 향할 때 지나온 장소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하란을 향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여행과 정반대의 여행을 하는 셈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야곱도 정처없는 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고 뒤에서 쫓아오는 형 에서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 도망가듯이 가는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걸었으나 날이 어두워 더 이상 여행을 진행하지 못하고 어느 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두려움 속에서 돌을 베개로 삼아 잠자던 야곱은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야곱은 하늘 꼭대기에 닿은 사다리를 타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다리 곁에 자신이 서 있었고 하나님도 그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이 축복하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첫 번째 누워 있는 땅을 야곱과 자손들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자손들을 땅의 티끌같이 많이 주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과 자손들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네 번째로 야곱이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그곳에서 야곱은 “두렵도다”고 외치면서 두려움 때문에 온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꿈속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음성을 듣고 깨어난 후에 그가 이렇게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유는 무엇인가? 이 두려움은 그가 형 에서의 추격을 받을 때 두려움과 비교가 안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전 존재를 흔드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그가 지금까지는 멀리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막연하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연 여기에 계시도다” 여기서 “과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벤(אָכֵן)”은 “정말로,” “확실히,” “참으로”라는 뜻입니다. 이 말 속에 놀라움과 강조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임재를 고백하는 순간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살 만큼 형을 속였던 것에 대하여 철저한 회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그의 불성실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하나님께로 돌이킨 증거로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17-19절)” 일상의 장소가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거룩한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가장 기약없는 곳과 일상적인 곳이 하나님이 임재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후에 하나님 앞에서 성전에서 섬길 것이며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다고 서약을 합니다.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21-22절)”

 


4. 복음 전파자의 보상(롬 8:12-35 찬송가 263장 이 세상 험하고)

우리가 믿음 생활하는 것을 보면 진리대로만 신앙생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기복신앙과 미신적 신앙요소를 많이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이 가보지도 않은 로마에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방문하고 싶은 마음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뒤로 로마에 가서 로마 공동체에서 직접 만나는 일이 있었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로마로 갔으나 죄수의 몸으로 로마 감옥으로 간 것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개척하여 돌보는 교회에서 제기하는 문제에 대하여 반응하여 대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이해 안되는 부분은 바울은 복음전하는 자로서 완전 성공적인 인물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 17-18절에서 보면 바울이 처한 상황이 고난에 있다고 합니다. 그 고난이 미래에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문제는 바울이 고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로마에 기독교인들이 고난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이 처한 현실이 고난의 현실인가?

바울 사도님 당신은 사도가 맞는가요? 아니면 스스로 자기 홍보하고 있는거요? 당신이 전하는 복음을 우리가 믿어도 되겠는가? 하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는가?

일반적으로 복을 받았다는 것은 잘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일이 잘되어 갈 때 하나님의 복을 받았구나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는 어려움이 많다고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의 위험도 있고, 배고픈 날도 많고, 감옥에도 끌려가고, 거기서 매도 맞고,정착된 집도 없고 그리고 가정도 없지 않는가? 이런 내용들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전에 청중들의 이같은 궁금증을 해소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같은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서 변명 또는 해명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자요 사도된 자가 왜 고난을 받고 있는가?” 여기에 대하여 대답을 하게 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17-18절)”. 그러니까 바울은 그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 위축되거나 힘들다고 하지 않습니다. 비록 고난을 겪고 있을지라도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고난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영광을 받을 것이지만 고난도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지금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의 보상은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하기에 황금길을 걸을 것이라고 좋은 집을 가질 것이라고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보상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것은 동참하게 될 예수 부활의 영광입니다.

 


5. 단련의 필요성 (시 139:1-12, 23-24 찬송가 263장 이 세상 험하고)

시인은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시인은 자신이 능히 가까이 갈 수 없을 만큼 높고 기이하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시인은 주의 영을 떠나서는 갈 곳도 없고 피할 곳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올라가도 스올에 내려가도 하나님은 그곳예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시인이 가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항상 시인과 함께 하였습니다. 마치 밀착하여 경호하는 경호원처럼 하나님은 시인 앞과 뒤 그리고 좌우 옆에 임재하시고 계십니다. 비록 시인이 소외를 느끼며 자신과 하나님과 거리가 꽤 먼 거리에 있는 것처럼 느낄 때에도 하나님은 그 멀리서도 시인의 생각을 감지했습니다. 하나님이 멀리서도 시인의 생각을 감지했을 때에 하나님은 멀리서도 시인이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인의 언어로 하는 말을 통역관 없이 다 알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의 앞뒤를 에워싸고 있었으며 하나님은 손을 시인에게 올려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시인을 앞뒤로 에워싸고 그에게 안수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시인에게 안수함으로써 시인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시인을 하나님의 것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른 손으로 시인을 붙들고 인도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께서 금은을 단련하는 것처럼 단련시켜달라고 합니다. 온도 1000도에서 금이 단련되면 불순물이 사라지고 순금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서 금과 은처럼 단련하시어 정결한 생각과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여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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