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여섯째 주간

 

1. 멍에가 중요한 이유( 마 11: 25-30 찬송가 337장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어린 시절 농사짓는 것을 보고 자랐습니다. 봄에 파종할 때나 모내기할 때 밭을 갈아야 하고 논을 갈아야 합니다. 그 때 소가 앞에서 쟁기를 끌고 그 쟁기를 잡고 밭을 갈고 논을 갈게 됩니다. 소의 에너지가 쟁기에 전달되기 때문에 쟁기가 흙을 갈아 뒤집어엎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의 에너지가 어떤 식으로 쟁기에 전달되는 것인가? 소에게 멍에를 씌웁니다. 그리고 그 멍에에 쟁기까지 줄을 매달아 소가 앞에서 끌어당김으로써 가능합니다. 멍에가 오늘날 에너지 변환장치인 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당시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내게로 와서 멍에를 메라고 합니다. 그러면 쉼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멍에를 멘다는 것은 부자유하고 힘든 것처럼 보이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여 그 멍에를 메면 무겁지가 않고 쉽다고 하는가? ‘가볍다’가 아니라 ‘쉽다’입니다. 이것은 영어로 “easy”로서 “용이한” “편리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편리하다는 말입니다.  소에게 멍에를 잘 씌우면 일하기에 용이하고 쉽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이나 당시 사람들에게 누구나 다 산다는 것은 힘든 과정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것을 '고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고생된 인생의 삶의 죄악된 세상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짐은 무슨 짐인가? 당시 유대인들에게 율법준수의 짐입니다. 요즈음에는 코로나 19 때문에 사람들이 언론과 사회로부터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 19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 거리유지 마스크 착용을 해야 한다는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미국의 억만 장자 한 사람은 코로나로 인한 바깥출입의 통제를 받는 중에 우울증세를 보이다가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준수의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 그 세대 사람들에 대하여 16-17절에서 비유로 이야기했습니다. 장터에 앉아 놀이를 하자고 춤을 추고 피리를 불어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금식을 할 때 그들은 그에게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고 귀신들렸다고 했습니다. 메시야가 도래한 이후에 상징적 의미로 음식을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하는지 무엇 때문에 먹고 마시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시야를 맞이하려고 정결케 하는 금식을 하고 있는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메시야 오신 후에 메시야의 잔치를 벌이는 상징으로서 음식을 먹고 마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에서 통제를 심히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죄책에서 해방되었는가? 아닙니다. 그들이 율법의 준수 때문에 더 무거운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름대로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25절에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숨기심을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에게 오지 않아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에게 와서 먹고 마시는 일에 참여하는 어린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까지도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에게로 와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용이하고 가벼운 짐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에게 에너지가 있듯이 사람에게도 에너지가 있습니다. 에너지가 비생산적인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에너지를 소모하여 생산적인 결과가 나오면 그것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죄를 벗고 생산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변화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동의 변화가 없이 주저 앉아있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러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우러나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러나는 선행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과 달리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믿음 사랑 선행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에너지가 내게로 와서 나를 움직일 때에 일이 되는 것입니다. 소의 에너지가 멍에를 통해 쟁기에 올 때 일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따로 일 따로 나 따로 해서는 일이 안됩니다. 하나가 될 때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될 때 가능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구원관계가 될 때 내 속에서 하나님의 에너지가 솟아나서 일이 수월하게 됩니다.

여러분 결혼 생활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결혼한 사람들은 결혼생활이 쉽다고 합니다. 결혼 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혼이 어려운 줄 압니다. 결혼 하지 않은 사람보다 결혼한 사람이 훨씬 더 쉬운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이에서 죄를 처리하고 우리에게 멍에를 메게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것은 하나님의 에너지가 우리에게 와서 전환되는 것입니다.

율법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과 하나 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쉬운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가기 힘든 사람은 수영 못하는 사람입니다. 물속에 들어가는 것이 쉬운 사람은 수영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는 것은 깊은 바다로 가서 수영하기보다 더 힘듭니다. 물가에서 수영을 하면 파도에 휩싸이기 때문에 더 힘들지만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가면 파도를 탈 수 있기 때문에 더 쉬운 것입니다. 헌신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남모르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2. 어린이들이 참여하는 메시야잔치 (마 11: 16-19, 25-30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예수께서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 동무를 부르는 아이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자고 피리를 불면서 동무를 부르지만 아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고 있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유의 핵심은 아이들이 놀이를 하자고 동무들을 열심히 부르고 있지만 아무도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대가 세례요한이 울며 금식을 하고 예수님이 축제의 음식을 먹는 데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설령 반응을 할지라도 핵심에서 벗어난 반응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세대가 세례요한도 거절하고 예수님까지도 거절하기 때문에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대는 왜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을까? 그들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메시지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으로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에게서 얻을 이익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슬기롭고 지혜롭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슬기로움과 지혜가 눈을 가려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눈이 열려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들이 누구인가? 예수님에게 회개로 반응하는 자들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에 참여하는 것이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세례요한이 금식하는 것이 아직 오지 않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음식을 먹는 것은 이미 도래한 메시야의 나라를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먹고 있는 잔치에 참여한 어린아이들은 메시야 잔치에 참여한 메시야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8-30절)”

 

3. 제가 여기 있습니다 (창 24:34-38, 42-49, 58-67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며느리에 합당한 자를 찾기 위해 아브라함은 종을 보냅니다. 그 종이 찾아간 곳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집안이었습니다. 거기에 나홀의 손녀가 리브가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 장차 족장의 어머니 역할을 해야 할 자로 적합한 기준이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유산을 이어받을 자질로서 믿음과 순종이 우선적인 기준입니다.

그런데 리브가에게는 믿음의 용기가 보였고 순종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동물과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많은 점이 아브라함의 종의 보기에 합격점이었습니다.
리브가의 주변에 여인이 많았는데 먼 곳으로 가는 것에 대하여 걱정을 많이 하여 리브가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주변 여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 이삭의 아내로 들어가겠다고 결정을 합니다. (예 제가 여기있습니다(Here I am)”고 하는 리브가의 용단은 마치 하나님의 부름 앞에 “예 제가 여기있습니다(Here I am)"라고 하는 아브라함과 닮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주인의 아들의 이상적인 아내감으로 판단한 요소로서 다음 구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16절)” “종이 마주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17-20절)”

그녀는 외모가 아리땁고 처녀이며 친절하고 관대하고 따뜻한 마음과 결단적인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동물들의 복지에 대하여도 배려심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순종적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재산을 상속한 이삭의 아내요 그리고 장차 12족장 아버지인 야곱,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인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형통한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4. 새로운 결혼관계 (롬 7: 15-25 찬송가 251장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같은 반문으로 그의 논증을 이끌어가고 있는가? 그것은 바울이 혼자서 독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독자들과 대화 속에서 글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독자들이 “율법이 죄냐?”고 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계명들을 가르침으로써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바울의 논증 때문입니다. 청중은 바울이 하는 말을 문자대로 적용할 때에 바울이 성경을 무시한다고 판단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결혼 비유로 우리의 옛 사람은 율법과 결혼을 하였으며 그리고 율법의 자녀로 우리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마치 전 남편이 살아있는 한 어떤 여인도 다른 데로 재혼할 수 없듯이 율법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옛 결혼관계에서 해방될 수 없다고 합니다. 전 남편처럼 옛 생활의 주인에 해당하는 율법이 죽지 않는 한 우리에게 자유가 없고 뿐만 아니라 변화도 없다는 것입니다. “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바울은 지금은 우리가 옛 결혼에서 해방되었고 그 자녀의 굴레에서 벗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도 율법이 죄가 될 수는 없다고 논증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가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하는 도구라고 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은 율법이 우리 속에서 죄를 깨닫게 하는 것만으로는 우리를 살리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깨달은 즉시 그 죄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율법만으로는 죄를 깨달은 즉시 돌아서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또 다른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반복되면 인간은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

그것은 율법과 옛 결혼관계를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결혼관계에 들어오는 일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복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모시는 생활을 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4-25절)”

 

5. 네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시 45:10-17 찬송가 478장 참 아름다워라)


오늘 시편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이야기와 짝을 이루는 본문으로 선택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시가 왕의 결혼식에 대한 시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표제어로도 사랑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의 아내가 됩니다. 그녀의 남편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산의 상속자인 이삭입니다. 이 둘은 12족장의 아버지 되는 이스라엘 곧 야곱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 점에서 리브가는 단순한 여인이라기보다 이스라엘 나라의 국모 왕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가 왕과 왕비를 노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10-11절)“.

이 시의 전반부(1-9절)에서는 왕에게 초점이 맞추어졌다가 중후반부(10-15절)에서 왕비에게로 초점이 옮겨집니다. 그리고 결론부(16-17절)에서 초점은 왕에게로 돌아옵니다. 리브가는 그 가족을 떠나 이삭의 아내가 되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집안의 가족이 됩니다(10절). 아브라함의 종이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12절). 그리고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로 들어올 때에 그녀는 순결한 처녀였습니다(14절).

리브가는 10절에 귀를 기울인 여인이었습니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녀의 백성과 그의 아비의 집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여인이었습니다. 잊어버리다는 말은 히브리어 “샤카ㅎ크(שָׁכַח)”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 아비 집에서 “가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려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리브가는 그의 백성과 아비의 집을 잊어버리고 과감하게 그녀의 백성과 아비 집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이신 이삭 또한 공정, 의로움, 기쁨 그리고 진리와 지혜를 가졌습니다.

왕비와 왕이 가지고 있는 품격인 신앙과 순종 그리고 공의와 진리와 기쁨과 지혜는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우리는 왕비와 왕의 품격이 되는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에 표상으로 삼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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