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여덟째 주간

 


1.소리없이 쑥쑥 자라는 잡초

(마 13: 31-33 찬송가 242장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시간 날 때마다 집 근처 산책로를 따라 산책을 합니다. 삼산동에서 계양체육공원으로 이어지는 서부간선로입니다. 요즈음에 비가 온 후에 산책길을 따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쑥을 비롯하여 잡초들은 원기 왕성하게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에 어떤 주인이 겨자씨 한 알을 자기 밭에 심었다고 합니다. 겨자씨를 본 적이 있습니까? 배추씨나 무씨보다 작습니다. 볼펜으로 점을 찍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겨자씨입니다. 이 작은 씨가 나중에 가장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천국 비유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가장 작은 씨가 가장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겨자씨는 곡식인가? 잡초인가? 잡초에 속합니다. 진달래와 같은 관목에 해당하지만 겨자는 잡초입니다. 그러니까 겨자씨는 잡초의 특성을 가진 것입니다. 잡초는 일반 곡식보다 생존능력이 탁월합니다. 게다가 잡초는 성장속도가 빠른 것이 특징입니다. 예수님이 비유의 소재로 사용하는 겨자씨는 성장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른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누룩을 천국 비유의 소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누룩은 오늘날 이스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루 세 말에 그 이스트를 소량을 넣고 반죽하여 빵을 만들 때 약 600명분의 빵이 된다고 합니다.

겨자씨와 누룩 둘 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겨자씨 씨 중에 작은 씨이지만 성장속도가 빨른 것입니다. 반면에 누룩의 적은 양이 가루에 섞고 반죽을 했을 때 많은 양의 빵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작고 적은 양이지만 파급효과가 엄청나다는 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천국의 비유에서 어떤 의미인가? 복음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은 세상 모임 중에 가장 작은 모임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덜 받고 무시당하는 모임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이 작은 모임은 다른 어떤 모임보다 성장속도가 빠르고 파급효과가 놀랍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모임이 성장한 후에 큰 모임으로 되는 것은 사람들의 상식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데 가장 큰 나무가 된다고 하니 현실적으로는 과장법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정말로 이것은 과장법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과장법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2000년 동안 지나온 기독교 역사를 볼 때 과장법은 아닌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제자들은 미약했으나 복음이 로마에 전해지고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당시에 복음을 가진 사람들인 제자들에게는 믿기 어려울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 수가 적어 조직력도 없고 재정능력도 부족하여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데 그 작은 모임이 어떻게 가장 큰 모임으로 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의 계산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 메시지가 겨자씨 비유 속에 숨은 비밀입니다.

그 다음에 겨자씨와 누룩의 공통점이 무엇인가요? 심겨진 씨와 가루에 섞인 누룩은 감추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장하고 그리고 부풀어 오르는 것입니다. 전혀 예기치 않는 곳에서 자라나고 부풀어나고 있습니다. 이같은 성장과 부풀리는 작용을 누가 일으키는가? 인간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활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겨자씨에서 무엇을 통해서 활동을 하십니까? 씨의 생명력을 통해서 활동하십니다. 겨자씨의 특성이 잡초성입니다. 잡초가 왜 빨리 자라는가? 논밭에 곡식보다 잡초가 빨리 자라납니다. 생명력이 곡식보다 더 좋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건강한 사람은 무엇을 먹든지 잘 먹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음식을 보고도 잘 먹지 않는 사람입니다. 돌보지 않고 버림받은 사람은 살기 위해서 힘껏 찾아먹는 것입니다. 잡초가 그런 것입니다. 돌보지 않고 버림받은 잡초는 살아남기 위해 물을 찾아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영양분을 섭취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어떤 자가 되어야 하는가? 야성을 가지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겨자씨처럼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작고 미약한 자들이지만 복음을 의지하고 생존을 위한 몸부림치는 활동이 2000년을 이어온 기독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선진국인 서양과 미국에서 온 것이지만 출발은 거기로 부터가 아닙니다. 사실은 그 출발점은 작고 미약한 복음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였습니다. 그 작은 자들이 전파한 복음이 로마와 이방으로 전달되었고 급기야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고 로마가 분열하여 서구 유럽 국가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겨자씨 천국비유에서 예언의 성취 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겨자씨가 성장한 나무에 새들이 와서 깃들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새는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가? 새 한 마리는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마리 새란 이방 나라를 의미합니다. 새들이라는 이방 나라들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믿은 어부들 창녀출신 죄인 출신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이방의 큰 나라들이 그 복음을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요? 인간의 계산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무엇으로 가능한가요? 하나님으로는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증거가 있기에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 당시 사람들은 이 말이 믿어지지 어려웠을 것입니다. 서구 유럽이 미국이 복음을 믿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겨자씨가 성장하여 된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새처럼 복음의 가지에 깃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범사의 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환경을 보면 두려움이 많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가장 작은 씨지만 성장한 후에는 가장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가장 작은 씨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복음의 씨를 받아들인 우리들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두려운 환경에 놓여있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큰 나무가 된다는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임이 성장한 후에는 가장 큰 나무가 되게 하실 것을 받아들이면 소망이 있습니다. 주보 표면에 그림은 무슨 그림같습니까? 지구를 덮은 겨자나무를 그려놓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작은 자의 모임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뒤집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와 누룩비유는 우리의 일상을 뒤집어서 상식을 뒤집어서 놀라운 일을 보게 합니다. 작고 힘없는 자리에서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큰 비젼을 가지도록 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웅크리고 있는가요? 우리는 왜 작다고만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생명력이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생명력이 내 속에 들어와 나를 급속도록 성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 복음의 생명력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모이고 뻗어 나가는 것이 성장입니다. 확신가지고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 간증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의 잡초성

(마 13: 31-33, 44-52 찬송가 251장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겨자씨는 심길 때는 작은 씨였는데 자란 후에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누룩의 적은 양을 가루 세말 속에 넣고 반죽하면 60명이나 먹을 수 있는 분량의 빵이 만들어집니다. 미미한 것이 큰 나무가 되고 소량이 많은 빵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미하고 소량에 불과한 겨자씨와 누룩을 소재로 하여 천국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천국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땅속에 심기어진 미미한 겨자씨와 가루세 말 속에 감추어진 소량의 누룩을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겨자씨는 땅에 떨어지면 사람의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가 심겨진 후에 성장속도는 다른 모든 풀들을 훨씬 앞지릅니다. 성장한 후에는 큰 나무가 되어 나무 가지에 공중에 나는 새들이 와서 둥지를 짓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무시당하고 버림받고 어둠에 파묻혔고 새로운 생명으로 돋아나고 있는 겨자씨”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 역시 미미한 존재로 무시당하고 버림받고 감옥에 갇히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전파된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약 250년 동안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복음 지진 자들음 박해하던 그 로마가 복음화 되고 급기야는 로마가 기독교국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겨자씨가 심겨지고 성장한 후에 큰 나무가 되었을 때 새들이 와서 깃들게 된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새의 상징적 의미는 이방나라입니다. 이방나라가 번성하게 된 복음의 영향력아래서 혜택을 입고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번복과 영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겨자씨에서 급속도록 성장하여 이방국가까지 모여들게 한 이 큰 나무의 본래적 성격은 백향목이 아니라 겨자나무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복음으로 출발하여 번성한 나라는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백향목같은 교만한 존재가 아니라 이방인과 이방나라를 상징하는 새들까지도 접근하기 쉬운 겸손함을 지진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겨자씨가 초고속 성장을 하게 된 것은 겨자씨가 가진 잡초성(Weediness)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야생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농부가 밭을 일구고서 뿌려놓은 곡식은 성장속도가 일정하고 느린 반면에 들판에 버려진 채로 자라난 잡초들은 곡식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록 금새 무성해집니다. 버림받은 잡초가 금새 무성해 지게 되는 그 잡초의 특성을 잡초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이 잡초성과 같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잡초성을 지니셨는가? 당시에 기득권 사회의 눈에 예수님은 반항적이고 당돌하게 보였던 점이 잡초성입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와 진리의 길을 고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부터 “너희는 세상의 소금, 너희는 세상의 빛”라는 명령을 들었던 제자들 역시 그 잡초성을 전달받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잡초성을 지니고 있었을 때에는 핍박과 박해를 받을수록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성장해 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겨자씨 비유가 제자들에게처럼 적용되어 기독교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단 그 예수님에게 있었고 제자들에게 있었던 잡초성을 우리가 상실하지만 않았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31-34절)”


3. 7년을 수일같이

(창 29:15-30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야곱이 도착한 곳은 하란 땅 외삼촌 라반의 집이었습니다. 도착하여 야곱이 라반의 양떼를 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외삼촌이 불러 품삯을 야곱과 계약하게 됩니다. 그 때 라반은품삯으로 두 딸 중 하나를 주겠다고 약속하였고 야곱은 그 중 둘째 라헬을 선택했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열심히 양떼를 치고 봉사하기를 7년이 지났습니다. 약속대로 라반이 그 날 밤에 야곱에게 딸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딸은 야곱이 원하였던 라헬이 아니라 언니 레아였습니다. 라반이 바로 변명을 했습니다. 그 나라의 풍습에 첫째를 두고 둘째를 먼저 보내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또다시 7년을 봉사하여 라헬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그리고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야곱은 다시금 라반을 위하여 7년을 더 섬겼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하여 외삼촌 집에서 봉사하며 보낸 세월이 자그마치 21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21년의 세월이 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7년씩 세 차례를 봉사하였는데 그 7년을 그는 수일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야곱이 21년이란 긴 세월을 외삼촌 집에서 힘든 노동을 하면서 보냈는데 그가 그 긴 세월을 수일처럼 여기며 즐겁게 보낼 수 있었는가?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29:20).” 개역개정판 “며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에카드(אֶחָד)”의 의미는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21년이 하루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하바(אַהֲבָה”로서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은 신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변함없는 사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마음에 솟아나는 이 사랑은 야곱의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야곱에 이같은 사랑을 선물로 주셨는가?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같이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그 약속을 야곱을 통해서 성취하기 위해 야곱에서 사랑의 마음을 주어 힘든 봉사도 즐겁게 감당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4. 죽음보다 강한 것

(롬 8:26-39 찬송가 399장 어린 양들아 두려워 말아라)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중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것을 바울에 대한 비난의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도로서 그에게 어려움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참사도라면 모든 일이 어려움없이 순탄해야 되는 것 아닌가?

바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곤경에 처한 자신의 자녀들에게 성공의 지름길을 제공함으로써가 아니라 곤경에 처한 우리들과 함께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연약함에 빠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자격에 큰 흠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연약함에 빠진 우리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곁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절)”. 왜냐고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기까지 희생시키셨기 때문입나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절)”.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중에 고난을 당하는 당사자인 바울은 고난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대적할 자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3-34)”.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사랑관계를 끊은 것은 어떤 것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고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 때문에 바울은 적대자들이나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바울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돌보시는 이가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절)”.


5. 땅을 기업으로 받은 이유

(시 105:1-11, 45 찬송가 393장 오 신실하신 주)

시인은 백성들에게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가 하신 일을 만민에게 선포하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라고 합니다. 시인이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노래하고 그 하신 일을 만민에게 선포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행한 모든 기이한 일들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행한 기이한 일들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한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을 기억하며 그 기억하는 것을 이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을 기억하고 있음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언약을 어긴 백성들이 불성실한 반면에 백성들과 언약을 기억하고 계심은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역사를 이삭의 역사를 야곱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백성들도 그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양식을 공급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분깃으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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