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아홉째 주간

1, 오병이어 기적의 원리(마 14: 13-21 찬송가 198장 주 예수 해변서)


카트린 스톡킷의 소설 뉴욕 타임즈 베스터 셀러 the help가 영화로 상영되었습니다. 몇 일 전에 그 영화를 집에서 인터넷으로 보았습니다. 이 영화가 오늘 본문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오늘 본문에서처럼 일어나는 사건은 1960년대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남부 도시에서 곧 영적 사막지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와 사장들 그리고 왕따 당하고 있는 여학생들에 대한 폭력 문화가 만연했습니다. 이 사막에서 3명의 여인들이 자신들이 목격하고 당한 차별의 경험과 용기를 모으기로 영감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책을 쓰겠다는 책의 저자에게 사실을 알리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 밝혀진 후에 그들이 당할 불이익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블린이라는 한 가정부가 경험을 폭로하기로 용기 내었을 때 미니라는 가정부도 동참하여 책 쓰기가 진전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저자는 그들을 넘어 수 천 명에게 도전하고 영감을 불러일으킬 책을 만들려는 영감을 받습니다. 이 소설은 백인과 흑인 두 여인들의 특별한 사례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들은 세 여인들이 만드는 책의 프로젝트에 반응하여 그들의 환경과 편견의 감옥을 너머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책의 이야기를 다 폭로하지 않고도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누군가가 남용적인 관계를 떠나도록 영감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밖에 다른 사람은 인종차별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겠다고 영감 받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누군가를 해고하지 않아야겠다는 영감을 받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새로운 출발을 해야겠다는 용기를 얻습니다. 이것이 내가 말할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작은 책에서 나온 많은 자양분입니다.
세례요한의 장례를 마친 후에 5000명의 장정이 예수님을 따라 찾아오게 된 곳은 빈들이었습니다. 빈들에 모여 예수님으로부터 치료를 받고 있는 중에 해가 저물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모인 무리들의 저녁식사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에수님에게 부탁합니다. 지금 있는 자리가 빈들이고 무리들에게 저녁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 마을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들이 저녁식사를 각자 해결하도록 동네로 돌려보내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부탁을 받은 예수님의 반응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명령은 제자들이 즉석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상식적 계산에서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없는 현실을 뻔히 알고 있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궁금증이 나는 것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먹일 자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닌가? 제자들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 아닌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제자들이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1분에 한명씩 만나 준다고 생각할 때 6000명을 만난다고 하면 약 100시간입니다. 24시간을 나누면 약 4일입니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을 하루 중 12시간이라고 할 때 약 8일입니다. 1명과 진료하는 시간을 1분이라고 가정할 때 5000명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약 1주일 정도 걸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료하는 입장에서 무리들을 긍휼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을 흩어 보내지 않고 모인 자리에서 가르침과 치료를 주시겠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제자들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겨우 이것밖에 없는 데 어떻게 5000명의 무리를 먹일 수 있겠습니까? 질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계산과 일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으로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은 감사했습니다. ‘축사하시고“란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라도 가져왔으니 감사합니다.
오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가? 안 듣는가? 그들은 듣습니다.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관계는 들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나타나는 기적

예수님이 명령하기를 ”너희들이 먹이라“ 그리고 ”그것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에게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그같은 믿음으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고 예수님이 주신 조각을 제자들이 나누어 주었는데 그들이 모두가 다 배불리 먹고 12광주리에 남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용기 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바쳤으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져 온 것 아니겠습니까?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도시락을 제자들 앞에 가지고 왔고 그것을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생활 속에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변화가 잘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남들 눈치보고 있습니다. 남 하는 것 따라 할려고 합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먼저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예수님께 가지고 온 것은 큰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 많은 사람 가운데 이것 가지고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는 것은 믿음의 용기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의 용기가 있는 곳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감동을 주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 뭐라고 하십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가져오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겨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가져오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너희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한 것이지 없는 것 가지고 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명령은 무엇인가요? 너희에게 있는 그것을 가지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하찮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앞에 가지고 올 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 가지고 어디에 쓸까 하고 포기하기 잘합니다. 그것이 불순종입니다. 그래서 가져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라도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내게로 가져오라

인종차별 반대운동이 성공이 된 것은 인종차별당한 경험을 용기있게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용기있는 사람 때문에 “The help”의 작가가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책을 출판한 후에 그 운동이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되고 그 작가는 취업이 되어 뉴욕으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섬기는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혼자서 먼저 예배 나오고 먼저 봉사하려면 서먹서먹합니다. 새벽기도, 저녁 기도회 모임, 새벽 밴드 설교에 댓글다는 일을 용기내어 내가 먼저 동참하는 사람이 생겨날 때에 여기에 영향을 받아 하나가 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님께서 일으킬 줄 믿습니다.

 

2. 검은 성찬과 주의 성찬(마 14: 13-21 찬송가 198장 주 예수 해변서)


헤롯이 자신의 생일날에 검은 성찬(Black Eucharist)를 베풀고 세례요한의 목을 베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검은 성찬은 사탄숭배자가 사람의 생명을 의도적으로 빼앗기 위한 술책으로 진행됩니다. 이 성찬의 주인은 사회를 공포분위기로 몰아갑니다. 그들의 운명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던 세례요한의 처형에 반응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은 따로 배를 타고 빈 들로 철수 했습니다.
빈들에 남자 장정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에게서 그들이 현장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처형되자 마다 그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 계신 빈 돌로 몰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세례요한의 장례 미사(예배)에 참석하러 온 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세례요한의 장례 후에 위로 미사(예배)를 위해 먼저 도착한 것입니다. 빈들에서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현장치료와 위로를 받는 사이에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었을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해가 저물었고 그곳이 식당도 없는 빈들이기 때문에 많은 무리들에게 식사제공이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저녁식사를 위해 모두 마을로 돌려보내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부탁을 듣고서 예수님은 그들을 보낼 필요 없다고 하시면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다수의 의견을 무시하고 도리어 부탁하는 제자들더러 그 많은 백성들을 직접 먹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제자들의 마음이 분주했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평안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숨은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제자들은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예수님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령을 내려 무리들을 잔디 위에 앉히게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축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모인 장정 5000명을 비롯한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15000명 가량의 무리들이 모두가 다 배불리 먹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한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입니다. 제자들로서도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시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어떤 방식이었는가?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뒤로 하고 그들에게 있는 것을 예수님께 바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제자들 모두가 자기 주장을 멈추고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떡을 받아드는 순간 제자들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누어 주는 떡을 받는 사람들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죽음의 검은 성찬과

생명의 빈들의 만찬

그런데, 제자들로부터 작은 떡 조각을 받은 그 무리들이 어떻게 배부르게 되었는가? 헤롯이 준비한 잔치가 검은 성찬이었다고 한다면 빈들에서 떡 조각으로 무리들을 먹이신 것은 무엇인가? 주님의 만찬이자 장차 메시야잔치를 미리 맛보는 거룩한 성찬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떡을 먹은 제자들과 무리들은 주님이 베푸신 성찬식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들이 먹고 만족한 떡은 생명의 떡이시고 영생의 양식인 예수그리스도의 살이었습니다.

 

 

3. 이스라엘의 복(롬 9:1-5 찬송가 347장 허락하신 새 땅에)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9장은 객관적인 글이라기 보다는 바울의 개인적인 요소가 많이 담긴 글입니다. 9장에서 나타난 바울이 기울이고 있는 주된 관심사는 무엇인가? 1절에서 바울은 자기에게 큰 근심이 있고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마음에 큰 근심거리요 고통이 되는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의 전제는 바울은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몹시 사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 민족이 대단히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같은 전제를 두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서로 동일한 차원으로 몰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이 유대인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바울이 주장할 때에 그것은 결코 유대인들을 폄하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선언하는 것입니다. 유대 기독교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온 두 가지가 바울에게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율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바울이 자기 동족을 배반하였다는 것입니다. 9장에서 이것을 지혜롭게 변명하는 것이 바울의 목표가 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받은 복이 특별하다고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4-5절)”. 이 논증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양자됨이 영광과 언약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과 조상들이 그들의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물이자 특권으로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셨다는 점입니다. 이렇게하여 다른 이방민족보다 이스라엘이 으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 것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버리지 않은 것과 같다고 바울은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복주시는 것이 결코 이스라엘을 지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님을 논증합니다. 이스라엘이나 다른 이방민족이나 모두가 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았을 뿐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에서 외롭다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평등한 자녀도 됩니다. 그러나, 만물 위에서 찬양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신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양자됨과 영광과 율법과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4. 광야로부터 나오는 말씀(창 32:22-31 찬송가 280장 천부여 의지없어서)


야곱은 외삼촌 라밥의 집에서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 가는 중에 있습니다. 많은 양떼들을 거느린 종들을 제 1진으로 먼저 보내고 그 다음을 따라 제 2진으로 자신과 아내들과 자녀들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보낸 사자들을 통해서 형 에서의 군대 400명이 야곱에게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진행 중에 날이 저물 때에 종들과 가축들 그리고 아내들과 자녀들이 얍복강을 건너가게 한 후 야곱은 얍복 나루에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어둠이 짙어질 때에 그곳에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야곱은 밤새도록 그 사람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그 사람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야곱 그 사람이 자신을 축복할 때까지 그 사람을 붙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람이 야곱을 축복한 후에야 야곱은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씨름하였던 그 사람이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29-30절).” “대면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파나(פָּנָה)”와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אֵל)”의 합성어인 브니엘이라고 한 것이 야곱과 씨름한 그가 하나님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이전에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갈 때에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돌아올 때까지 지켜 줄 것이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31: 13)”. 밤에 나타나 야곱과 씨름한 분은 다름 아닌 야곱을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보호자가 되시기로 약속한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야곱이 자신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세상길로 가다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돌아오는 우리에게 이런 시험이 찾아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뒤에서는 20년간 섬겼던 외삼촌이 그를 몰아내었는가 하면 그가 돌아가는 고향길에는 형 에서의 군대가 야곱의 앞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야곱은 가까운 가족들과 원수관계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습니다. 야곱이 처한 자리는 형과 외삼촌 사이에서 오는 인간적인 두려움과 염려에 사로잡힐 수 있는 자리입니다. 야곱이 인간의 문제에 파묻혀있는 이 때에 하나님은 낯선 사람으로 가장하여 야곱과 씨름한 것입니다. 야곱은 고양이 피하려다가 호랑이 만난 격이 된 것입니다. 오늘 얍복강에서 야곱이 만난 상대는 지금까지 만났던 형과 외삼촌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야곱에게서 힘을 소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얍복강에서 씨름한 사건은 이전에 아주 큰 두려움으로 느꼈던 형 에서와의 대면이 훨씬 가볍게 느끼도록 했습니다. 얍복강에서 야곱과 씨름을 하신 하나님은 야곱을 바꾼 것입니다. 얍복강 사건은 인간적 계산으로만 문제해결에 집중하던 야곱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에게 집중함으로써 해결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복으로 주실 뿐 아니라 자손을 많게 하시리라는 말씀을 신뢰토록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밤에 갑자기 찾아온 하나님과의 대면이 야곱에게 축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첫번째로 야곱은 외롭게 혼자 남게 되는 자리를 피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곳이 히브리어로 “말씀”의 의미인 “다바르”와 “으로부터”의미인 “민”의 합성어인 미드바르(מִדְבָּר)입니다. 영어로 “Desert” 곧 광야, 빈들입니다. 그는 외로운 자리를 지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니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야곱은 씨름을 피하지 않고 목적을 가지고 상대와 적극적인 씨름을 하였습니다. 야곱은 그가 사람들과 사이에서 얻는 이익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에 더 집착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4-26절)”

 

5. 장기화된 고난에서 살아남기(시 17:1-9, 15,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시인은 원수에게서 그의 목숨이 표적의 대상이 되어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 처하여 있습니다. 조직적인 힘을 가진 원수의 공격을 피하려는 인간적인 노력과 궁리에도 불구하고 묘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사태는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시인이 일시적으로 도피생활에 성공할지라도 원수의 압제의 장기화 때문에 장기적인 도피생활이 가져 오는 심리적 부담이 심해질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 표현 속에서 볼 때 시인은 원수로부터 공격을 받을만한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그가 이유없이 당하는 공격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억울한 감정 그리고 원수에 대한 분노의 감정에 빠질 수 있는 처지에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편에서 시인은 원수의 압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있습니다. 원수가 공격할 뿐 그는 입술의 말로 반격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시인이 자신을 공격해 오는 원수에 대하여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원수의 공격에 대해 수세적 처지에 있을 뿐 적극적 반응을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이 잘못이 없음을 호소하고 있고 울부짖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원수의 공격 때문에 그의 마음이 심한 충격과 고통을 받고 있지만 그는 원수에게 직접 대응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음소리를 내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까요? 자신의 옮고 그름을 인간들이나 세상의 법정에서 판결받기 보다 하나님 앞에서 판결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재판관임을 그가 믿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2-3절)”
그런데 시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자신의 송사를 자신있게 맡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송사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은 말 못하는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증거로서 시인은 다음의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귀(1절)”,“주의 눈(2절)”,“주의 입술(4절)”, “주의 오른 손(7절)”. “주의 날개(8절)”
게다가 시인은 하나님이 피난처요 구원자임을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한 자들로 부터 자신을 구원하고 보호하고 변호해 주실 것을 시인은 소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6-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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