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열한째 주간


1, 구원자를 감동시킨 기도

( 마 15:21-28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헤럴드 경제지에 지난 13일 보도된 내용입니다. 지난 8월 11일 경기도 이천시 율면 오성리 마을회관 옆에서 복구 작업을 하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무너져 내려앉은 창고 잔해 옆에서 한 마리의 어미 개가 슬피 울며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어미개가 파고 있는 땅을 파내었더니 그곳에 1-2개월 된 강아지 2마리 가 있었습니다. 강아지 2마리를 구조한 마을 주민들이 그 다음날 동물 보호 센터로 이 어미 개와 강아지를 보내려고 자동차 시동을 걸었는데 기어 조작이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어미 개가 또 슬피 울면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고 힘을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동차에 내려서 주민들이 다시금 어미개가 땅을 파는 자리로 가서 흙을 거둬내었더니 새끼강아지를 발견한 곳에서 3m 떨어진 데서 1-2개월 된 강아지 2마리가 산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새끼를 살리겠다고 슬피 부르짖는 어미 개 모성애에 감동된 주민들에 의해 새끼 강아지 4 마리는 생명을 되찾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계 지역까지 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두로와 시돈 지방입니다. 예수님은 경계를 넘어가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 경계를 넘어 온 가나안 여인이 딸에게 걸린 귀신을 쫓아내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경계 안에서만 예수님은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유대 문화권에서만 복음을 전하겠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경계 밖에 있는 여인이 유대경계를 넘어서 유대 문화권에 넘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한일입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 경계를 넘어와서 가나안 여인이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 뒤에서 부르짖을 때에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청하기를 그 여자를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문제 해결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8절)”
예수께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사역을 하도록 보냄받았다고 하셨는데 이방 여인인 가나안 여인이 어떻게 문제 해결을 받게 되었는가?
이 여인은 유대 경계 저편에서부터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고 경계를 넘어 온 것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경계를 넘어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경계를 넘어온 그녀의 행동이 불법이라는 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유대 경계선을 넘어 침입자로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하는 담대함을 보였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유대인들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경계를 넘어서 유대 경계 안에 머물고 있는 예수님에게까지 접근할 수 있었는가? 그녀가 오로지 귀신들린 딸이 귀신에서 해방되어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을 보기 위해 혼신을 다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딸의 영혼이 구원받고 건강 회복만 된다면 목숨까지도 내어놓겠다는 믿음으로 다윗의 자손에게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인즉 이 여인은 예수님의 사역의 범위에서 벗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상황에서 예수님의 선교사역은 유대인의 경계 안에서만 하도록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자녀란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개란 이방인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방인과 거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방의 경계를 넘어 유대의 경계 안으로 침투하여 예수님에게 찾아온 가나안 여인과는 예수님은 거래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28절에 보면 놀라운 장면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하셨던 예수께서도 “네 믿음이 크다”고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했습니다. 도대체 이방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의 칭찬을 받고 있는가? 예수님의 하신 말을 그대로 보면 이방 여인이 귀신들린 딸의 문제를 가지고 와서 해결받은 것이 맞습니다. 이 여인이 문제해결을 받게 된 원인이 믿음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이 여인은 다윗의 자손 메시야를 기다리고 찾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그 메시야가 유대경계 안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방 경계 접근지역까지 예수님이 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녀는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그 메시야 앞에 온 것입니다. 이 여인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서까지 소문을 듣고 메시야 앞에 온 이유는 그녀의 귀신들린 딸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딸의 병을 포기하지 않고 치료받게 하겠다는 간절함이 그녀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메시야의 나라 유대 백성들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 곁에서 말씀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을 바라보고도 믿기는커녕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쏟는 열정에 비하여 돌아오는 복음의 열매는 너무나 미미했습니다. 지금은 이방과 맞닿은 변경지역까지 오게 된 것도 유대인들로부터 거부를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혀 새로운 장면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전혀 수고하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은 데 소문으로만 다윗의 자손이 왔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맺고 있는 복음의 열매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여인을 칭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방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주시는 다른 메시지란 무엇인가? 유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방인조차도 딸의 귀신들린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국가의 변경지역을 넘어서까지 메시야 앞에 나아와서 문제 해결을 받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까이에서 늘 말씀들을 수 있고 치료받을 수 있고 귀신에서 해방 받을 수 있는 당사자들은 메시야에 대한 반응이 시큰둥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 경계 안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기는커녕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도 경계를 넘어서 메시야를 믿고 문제 해결을 받고 가는데 예언자의 예언대로 메시야를  수 백 년 동안 기다려 왔던 유대인들이 그들 곁에 온 메시야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15장에서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1-2절)”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유대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고 있다고 들어온 민원을 따라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서 증거를 찾고는 예수님에게 비난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도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고 하였습니다(8-9절).
유대인 지도자들을 향하여 장로의 전통을 더 중시한 나머지 더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전통을 지키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된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유대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다가 철수하여 온 장소가 두로와 시돈입니다.
마태상황에서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가까이에서도 메시야를 거부하고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메시야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창피한 일인 줄 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2.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 마 15:21-28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예수님께서 경계지역까지 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두로와 시돈지방입니다. 예수님은 경계를 넘어가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경계를 넘어온 가나안 여인이 딸에게 걸린 귀신을 쫓아내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경계안에서만 예수님은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유대문화권에서만 복음을 전하겠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경계 밖에 있는 여인이 유대경계를 넘어서 유대문화권에 넘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한일입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문제해결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 여인이 문제해결을 받은 것인가?
이 여인은 경계를 넘어서까지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온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메시야로 알아본 것입니다. 그녀는 믿었고 요청을 한것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8절에 보면 놀라운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는데 여자의 믿음의 태도를 여기에서 네 믿음이 크도다고 했습니다. 여인의 믿음을 보고 예수님이 칭찬을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어떻게 된 것인가? 자체로만 보면 이방인이 믿음이 좋아서 치료받았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여인이 경계를 넘어와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고 치료받고 있는데 그 경계 안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유대인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창피함을 알아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상황에서 그렇습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은 타성적인 믿음으로 살게 되면 피부적으로 그 능력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교회로 돌아와서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능력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교회안에 있는 우리들은 그를 보면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여인의 소원을 쉽게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절하며 곧 경배하였고 그리고 도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인이 떡을 취하여 자녀에게 주는 것이지 개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서 여인의 하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자녀가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먹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녀를 보고 “네 믿음이 크다”고 한 것입니다. 경계안에 있는 사람들도 먹지 않는데 경계 밖에서 들어와 그것을 먹기를 간청하였고 부스러기기라도 먹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에 있던 사람이 먹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메시지는 “부끄러운 줄 알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경계 안에 있는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가지고 온 큰 양식에 대하여 고마음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여인에게서 믿음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은 누구신가? 경계를 넘어 이방지역까지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우리에게 메시야가 큰 양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식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기 위해 경계를 넘어오신 주님의 양식을 고마움과 은혜로 받아들이는 칭찬받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섭리신앙의 유익 (창 45:1-15 찬송가 301장)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미디안 상인과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려 애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수 년이 흘러가는 사이에 요셉은 바로의 시위대장집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가게 됩니다. 감옥에서 술맡은 관원장이 자기가 풀려나면 요셉을 감옥에서 풀어주겠노라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꿈해석대로 그가 복권하여 술맡은 장관이 되었는데도 2년의 세월동안 요셉을 잊고 살았습니다. 요셉이 미디안상인과 이스마엘 상인에 의해 애굽으로 노예의 신세가 되어 팔려가는 사건과 술맡은 장관의 복권과 함께 출옥을 기대했던 요셉을 그가 망각한 사건은 요셉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이 영역은 오직 하나님만의 활동영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하나님의 비밀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적 예측불가능의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섭리 속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노예의 신세로 애굽으로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요셉에게 보여준 꿈이 있습니다. 그 꿈에 의하면 형들이 요셉에게 세 번 절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보여주신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예의 신분이 되어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팔리게 한 것입니다. 노예가 된 요셉은 바로왕의 시위 대장 집에서 총무가 되었다가 성폭행의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갑니다. 감옥에서 요셉은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 복권된 술 맡은 관원장이 2년간이 나 잊고 있었던 요셉을 기억해내고 바로 왕 앞에 서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바로앞에 세우기 위해 여러 사건들을 통해 감옥까지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감옥에서 나와 무릎 꿇은 형들 앞에 서 있는 요셉은 어떤 지위에 있습니까? 요셉은 애굽에서 제 2인자인 총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를 미워하고 노예로 팔아 념겼던 형들을 향하여 그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두려워 떨고 있는 형들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절)” 과거에 자신을 미워하였고 죽이려고 하였고 그리고 노예로 팔아넘겼던 자들을 애굽의 최고 권력자가 된 요셉이 어떻게 이렇게 용서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가? 그가 인간적인 감정과 생각으로 형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7-8절)”


4. 긍휼의 거절과 긍정의 결과

(롬 11:1-2, 29-32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바울에 대한 세 번째 공격은 바울의 복음은 그의 유산과 그의 민족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는가?”라고 질문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바울 자신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며 베냐민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의 복음에 반응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남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반대자들로부터 다음의 반문을 사게 됩니다. 복음에 반응한 자 이외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버림받을 수 있단 말인가? 바울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떤 부모도 자식을 버리지 않듯이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복음에 반응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이방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이스라엘인들을 잠시 가두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을 거절할 때에 하나님의 긍훌은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는 기간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선택의 수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 이후에 그 긍휼을 이스라엘이 받아들이는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이방인들도 자만하지 말고 복음에 충실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그런데 이스라엘이 긍훌을 거부한 것처럼 긍휼을 입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나님의 긍휼을 거부하면 이스라엘이나 선택의 수에 들어온 이방인이라도 잘리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다 하나님의 긍훌을 입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1-31절)”


5. 참 순례자의 모습 (시 133편 찬송가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이 시의 표제어는 히브리어로 “שִׁיר הַֽמַּעֲלֹות לְדָוִד (쉬르 하마알롯 르다윗)”으로 “다윗의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עָלָה(알라)”는 “올라가다”라는 의미로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중이거나 순례에서 돌아오는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시인은 순례객의 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모든 동포가 순례중 하나되는 모습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유월절, 속죄절, 오순절, 초막절 등 유대인의 절기 때에 순례합니다. 순례에서 정점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에 참여여 하나님의 임재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자리에서 성소를 출입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 제사장입니다. 그 중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의 출입을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직을 수행하는 제사장의 수염에 머리로부터 부어진 기름이 흘러내리는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아론은 모세의 형으로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이 부어지고 수염까지 내려오는 모습은 제사직의 기능이 중단하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시인이 형제가 동거함과 제사장의 직능이 살아있음을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회복을 보는 순례객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든지 본토 유대인이든지 모두에게 아룸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되는가?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이 살아있음은 오늘날 교회의 기능이 살아있음을 말합니다. 순례자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이 교회를 출석할 때 서로 다른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모습이 세상에서 어떤 것보다 아룸다운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하고 섬기면서 하나되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은 오늘 시인이 노래하는 형제의 동거함의 아름다움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사모하며 순례하는 순례자처럼 교회를 사랑하며 모이기를 힘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