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열두째 주간

1. 교회의 기초(마 16:13-20 찬송가 459장 누가 주를 따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인자" 곧 “Son of Man"은 다니엘에서 예언한 것처럼 유대인들이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와서 제자들에게 메시야라고 지칭하는 인자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고 있는가?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고 있는가?
빌립도 가이사랴 지방에는 우람하게 지어진 이방신전이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헤롯왕가의 부하 직원들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지방은 로마의 권력의 종교기관인 이방신전과 로마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헤롯가의 충복들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이 곳은 인간의 출세와 성공의 지름길로 가기 위해서는 로마로 통하는 길이 보이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도 로마의 권력에 버금가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의 지지율이 유대 사회 안에서 급증할 때에 로마의 권력을 능가하는 정치적 메시야를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권력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메시야 칭호에 해당하는 인자를 자신과 일치시면서 그 인자인 자신에 대하여 사람들의 여론이 어떤지 물은 것입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사람들의 여론에 의하면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다른 선지자 중의 하나에 속한다는데 일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론에서 지지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예언자이상의 인물임에 일치된 여론이라고 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세상여론과 별도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신들을 향하여 갑자기 쏘아붙이는 예수님의 질문에서 제자들은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용감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베드로의 입으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마가복음과 겹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마가복음에서 다루었던 예수님의 정체성에 머물지 않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서 베드로의 답변에 대하여 예수님의 추가적인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제가 전환됩니다. 중요 점은 예수님의 정체성에서 교회의정체성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4 복음서에서 나타나지 않는 에클레시아 교회라는 단어가 마 16:18, 마 18:17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런데 여기서 반석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트라는 에클레시아와 함께 문법적으로 여성형 명사입니다. 베드로는 남성인가요? 여성인가요? 예수님께서 메시야 고백을 하는 베드로에게 남성명사 페트로스라는 이름을 주었으나  교회는 여성명사인 페트라 위에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베드로는 장차 메시야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대표자임을 의미한 것입니다. 교회는 메시야를 고백하는 자의 믿음 위에 세운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믿음의 고백자들이 모인 모임이지 건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에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능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베드로의 메시야 고백 이후에 마태복음에서만 교회라는 말이 등장하고 교회에 대하여 강조적으로 정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그리스도의 정체를 알게 된 베드로는 그 믿음의 고백 위에서 이제 교회의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위임을 받은 베드로와 교회는 세상 속에서 있는 음부의 권세를 정복하는 권능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은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메시야 고백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권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14장 26절에서 제자들이 탄 배가 갈릴리 바다 복판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접근해 오셨습니다. 상징을 풀면 악한 세력을 정복하시는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로 잠시 후에 물에 빠지게 된 사건이 되었지만 그러나 주님의 명령대로 물위로 걸어갔습니다. 메시야를 믿고 고백한 베드로 역시 주님처럼 악을 짓밟는 권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마태복음의 교회의 상황이 악의 세력들에 의한 박해로 인한 분열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 박해받는 교회가 왜 분열되었는가? 그 교회의 분열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메시야를 믿는 그들이 주님의 명령보다 세상명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양은 메시야를 믿는 자들이었으나 공적으로 메시야를 고백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샤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마음에 믿는 것을 입술로 고백하기 어려운 단계의 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를 생활의 중심부에 모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이익과 손해에 대하여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야를 따른다는 이유로 세상의 압박이 오면 메시야 따르는 일을 접어두고 세상명령을 더 중시한다는 표현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구성원들이 중요보직을 맡은 지도층이 되었을 때에는 세상의 박해는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의견이 양분되고 메시야 중심의 결정보다 이익을 따른 결정에 표를 던지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 구성원들이 지도자를 중심으로 메시야를 모시고 메시야의 메시지와 명령대로 순종할 때에 교회를 힘들게 하는 세력이 물러가고 교회에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그 배 그 교회에 올라탄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세상의 권세와 독립적인 재판권을 가지며 자체적으로 징계권도 가지게 됩니다. 이 교회는 천국 열쇠를 가진 기관이 됩니다. 교회는 천국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위임받고 교회는 매고 푸는 권세를 가지고서 세상을 다스려 나가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8-19절)”.
그러나 교회는 권력을 남용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세는 세상권력에의 의지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도전의 능력을 가질 때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기에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매고 푸는 권세를 가진 교회(마 16:13-20 찬송가 210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인자" 곧 “Son of Man"은 다니엘에서 예언한 것처럼 유대인들이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와서 제자들에게 메시야를 지칭하는 인자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는가?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는가? 빌립도 가이사랴 지방에는 우람하게 지어진 이방신전이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헤롯왕가의 부하 직원들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지방은 로마의 권력의 종교기관인 이방신전과 로마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헤롯가의 충복들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이 곳은 인간의 출세와 성공의 지름길로 가기 위해서는 로마로 통하는 길이 보이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도 로마의 권력에 버금가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의 지지율이 유대 사회안에서 급증할 때에 로마의 권력를 능가하는 권력자를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권력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메시야칭호에 해당하는 인자를 자신과 일치시면서 그 인자인 자신에 대하여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사람들의 생각은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다른 선지자 중의 하나에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마가복음 8장과 공통부분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마가와 달리 여기서부터 베드로가 누구인지 그리고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천국 열쇠를 주리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베드로와 교회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정체를 알게 된 베드로는 그 믿음의 고백 위에서 이제 교회의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위임을 받은 베드로와 교회는 세상 속에서 있는 음부의 권세를 정복하는 권능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세상의 권세와 독립적인 재판권을 가지며 자체적으로 징계권도 가지게 됩니다. 이 교회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진 기관이 됩니다. 교회는 하늘나라로부터 모든 권세를 위임받고 교회는 매고 푸는 권세를 가지고서 세상을 다스려 나가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8-19절)”.
그러나, 교회는 권력을 남용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세는 세상권력에의 의지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도전의 능력을 가질 때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기에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롬 12:1-8 찬송가 327장 주님 주실 화평)


바울은 자신과 기독교인들을 제사장으로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치라고 합니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것을 강조적으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입으로는 기독교인이라고 사람들 가운데서 등록 교인된 것을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지배가치에 의해 영향을 받아 만들어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치적 민족적 그리고 사회적 가치관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을 이 세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자신앞에 드려지는 제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유인즉 여기에는 타성에 젖은 생각을 따를 뿐 마음에서 새로움이 솟아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고정된 사고의 틀에 갇혀있고 변화없는 생활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생활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에서부터 새로움이 솟아나는 생활입니다. 이 마음에서부터 새로움이 솟아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개인의 온전성 뿐만 아니라 건강한 공동체를 위한 기초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법규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사랑과 은혜 복음에 기초한 성숙, 선과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절)” 사랑을 믿는 것이 이들 모든 것에 대한 열쇠입니다. 그것을 침전시키는 것이 영적 여행의 핵심부에 있습니다.

 

4. 정체성교육의 중요성(출 1:8-20 찬송가 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견제하여 학대할수록 번성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근심하였습니다. 그 때에 왕은 바로의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 건축을 시작하였고 그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활용하였습니다. 그는 감독들을 세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을 엄하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애굽 왕은 히브리 산파십브라와 부아를 불러다가 히브리여인이 해산시에 여자 아이만 살려두고 남자아이들은 죽이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남자 아이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산파를 동원한 애굽왕의 남아 살해 음모극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세상 권력자 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17절)”. 그들은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입니다. 목숨을 건 산파들의 결단이 아니었더라면 이스라엘은 역사에 사라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씨는 보존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가 다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20절)”
그러나 애굽왕의 압제적 환경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애굽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이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용감한 지도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 구원자를 구원자를 탄생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애굽 왕의 내부인들에게 개입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왕자를 낳지 못하는 바로왕의 공주가 남자 아이를 필요하게끔 하였습니다. 물속에 떠내려 오는 갈대상자속에 한 히브리 아이가 공주의 시녀의 눈에 발견되었고 그 이야기가 공주의 귀에 들렸고 공주가 그 아이를 데려오라 명했고 그리고 그 아이를 젖먹일 사람으로 왕궁으로 소환된 자가 모세의 친모였습니다.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어 애굽왕실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으나 모세는 애굽인의 정체성보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소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애굽의 왕실문화속에서 자라난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 구원자로서 이스라엘 정체성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는가? 모세의 유모로서 바로의 공주에 의해 소환된 모세의 친모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외적으로는 애굽 왕실 교육 문화속에 자라나고 있었지만 그 내면 세계는 친모의 신앙교육의 영향을 입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2:8-9)”

 

5. 감사해야 할 이유(시 124편 찬송가 585장 내주는 강한 성이요)


다윗의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어에서 오늘 시는 순례 또는 예배 의식과 관련된 것을 추측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아니었더라면 사람들이 올라와서 우리를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이 우리를 순식간에 삼켰을 것입니다. 그때에 강물들이 우리를 덮쳤을 것입니다. 그 때에 강물이 우리 영혼 위로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 때에 교만한 강물들이 우리 영혼위로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들의 먹이가 되도록 그들의 이빨에 내어주지 않은 하나님이 복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물에서 벗어난 새처럼 벗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물이 찢어졌고 우리가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 신뢰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상황이 떠오릅니다. 요셉을 모르는 애굽왕이 등극했을 때 이스라엘은 극심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새로 출생하는 이스라엘의 남자아기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바로의 명을 받았던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기에 아기들을 살려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그들에게 베풀지 않았더라면 역사에 이스라엘이 애굽땅에서 벗어났다는 기록은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았다면 모세가 애굽왕실에서 바로공주의 아들로 입양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모세의 모친이 함께 애굽 왕실로 모세의 유모로 소환되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진 모세로 성장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씨를 보존시키고 번성케 하시기 위해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삶의 현장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의 영웅 모세를 성장시키신 이후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하는가?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구원하시고 우리와 늘 함께 하고 계심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지시고 죽음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1. 매고 푸는 권세를 가진 교회(마 16:13-20 찬송가 210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인자" 곧 “Son of Man"은 다니엘에서 예언한 것처럼 유대인들이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와서 제자들에게 메시야를 지칭하는 인자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는가?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는가? 빌립도 가이사랴 지방에는 우람하게 지어진 이방신전이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헤롯왕가의 부하 직원들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지방은 로마의 권력의 종교기관인 이방신전과 로마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헤롯가의 충복들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이 곳은 인간의 출세와 성공의 지름길로 가기 위해서는 로마로 통하는 길이 보이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도 로마의 권력에 버금가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난 예수님의 지지율이 유대 사회안에서 급증할 때에 로마의 권력를 능가하는 권력자를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권력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메시야칭호에 해당하는 인자를 자신과 일치시면서 그 인자인 자신에 대하여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사람들의 생각은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다른 선지자 중의 하나에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마가복음 8장과 공통부분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마가와 달리 여기서부터 베드로가 누구인지 그리고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천국 열쇠를 주리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베드로와 교회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정체를 알게 된 베드로는 그 믿음의 고백 위에서 이제 교회의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위임을 받은 베드로와 교회는 세상 속에서 있는 음부의 권세를 정복하는 권능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세상의 권세와 독립적인 재판권을 가지며 자체적으로 징계권도 가지게 됩니다. 이 교회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진 기관이 됩니다. 교회는 하늘나라로부터 모든 권세를 위임받고 교회는 매고 푸는 권세를 가지고서 세상을 다스려 나가게 될 것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8-19절)”.
그러나, 교회는 권력을 남용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세는 세상권력에의 의지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긍휼과 용서와 사랑과 도전의 능력을 가질 때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기에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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