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열째 주간

1. 풍랑에서 살아남기(마 14:22-33 찬송가 371장 구주여 광풍이 일어)

요나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다시스로 도망하려고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났습니다. 그는 다시스 행 배 삯을 주고 그 배를 탔습니다. 그 배가 바다 한 복판에서 큰 폭풍을 만나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공들이 두려워서 각각 자기 신들을 부르고 배에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선장이 요나를 깨웠습니다. 너도 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 우리 모두 각각의 신들에게 부르짖었느니라
그리고 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온 것인지 제비를 뽑자고 하였습니다. 그 제비가 요나에게 걸렸습니다. 사람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이냐? 네가 어디서 왔느냐? 네 생업이 무어냐? 네 민족이 어디냐?”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천지의 창조자 하늘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사실은 그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이 배를 탔노라.”
우리가 네게 어떻게 하랴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잔잔하리라. 그래서 그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니 바다가 잔잔해 졌다는 이야기입니다(욘1:15).

오늘 본문은 요나의 이야기와 공통점이 많습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무리들을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난 후에 예수님은 무리들을 보내고 난 후에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갔고 그 사이에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먼저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를 출항한 제자들이 탄 배가 바다 한 가운데서 밤 3시경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배에서 선장노릇을 한 사람은 베드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타지 않은 그 배가 바다 한 복폭에서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이 몹시 당황했습니다. 배에 물이 차오르고 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물을 퍼내고 노를 젓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 한 복판에서 배는 위태로웠습니다. 그 때에 바다위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다위로 걸어오는 존재를 유령인줄 알고 더 두려워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소리가 들렸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제일 먼저 반응을 하였습니다. “주여 만일 당신이 주시거든 나에게 명령을 내려 물위로 걸으라 하소서” 그 때에 예수님께서 명령하여 “걸어 오너라”고 하자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걸어가던 베드로는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님만 바라보아야 할 베드로가 바람과 물결을 보고서 물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다급하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손을 내미는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한 말씀을 듣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상당히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갈릴리 바다로 가야하지만 상징을 풀게 되면 우리 현실과 밀접한 이야기입니다. 상징적 의미를 풀면 이렇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는 교회입니다. 물은 악한 세력입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세워져 있습니다. 세상은 악의 세력이 꿈틀거리는 곳입니다. 세상은 정치를 통해서 세상을 움직이는데 그 밑바닥에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악의 세력이 꿈틀거리는 세상 속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잠간 사이에 교회는 악의 세력들에 의해 큰 시험을 만났습니다. 잠시 동안 예수님 모시지 않았는데 그 가정에 큰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잠시 동안 예수님 떠나 있었는데 그 교회에 큰 시련이 찾아온 것입니다. 잠시 동안 예수님 의지 하지 않았는데 그 나라에 큰 재난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악의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어느 한 순간도 우리가 방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찬송대로 늘 깨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교회가 편안한 때는 없었습니다. 교회가 승리할 것인가 함몰될 것인가 이것은 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마치 바다위에 떠있는 배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깨닫고 다른 배를 탔을 때에 하나님은 바다에 바람을 잔잔하게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깨닫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신앙고백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할 때에 시련이 그쳤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상황에서 풍랑의 원인이 무엇인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여있는 공동체에서 서로 간에 사랑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하는 적대관계로 갔을 때 오는 분열의 풍랑이었습니다.

풍랑이 잔잔해 진 때가 언제인가? 예수님이 배에 올라오시고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을 때에 바람이 그쳤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용서하고 관용하고 사랑할 때에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나라에 바람이 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 용서, 치료, 그리고 도전입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예수님 능력입니다. 주님을 모심으로써 주님의 능력 긍휼과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체험하고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풍랑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2. 물 위를 걸으시는 야웨(마 14:22-33 찬송가 371장 구주여 광풍이 일어)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산에 혼자 계실 때 제자들이 탄 배가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는 중에 바람을 만나 물결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배와 제자들이 구원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배가 물결로 고난을 받을 때에 밤 사경에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로 향하여 오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물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오인하여 무서워 소리 질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의 음성을 제일 먼저 알아들었던 베드로가 외칩니다.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여 물위로 걸어가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자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가면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내미는 손을 붙잡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 매우 상징적 의미를 담은 기적 이야기입니다. 상징적 의미를 풀면 이렇습니다. 물은 악한 세력입니다. 제자들이 탄 배는 교회입니다. 잠시동안 예수님없이 제자들이 섬기는 교회가 악의 세력을 만나 큰 시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악의 세력을 짓밟으시고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교회로 접근해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접근해 오심에도 불구하고 유령으로 오인하여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먼저 알아본 베드로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심을 믿고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이렇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여기에서 “내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 영어로 “I am"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있는 자“ 곧 야웨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77편에서 야웨 하나님은 물 위를 걸으시었습니다(시 77:19).

베드로가 예수님을 의지하여 악의 세력을 잠시 이겼으나 다시금 시험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시고 교회에 오시니 시련이 멈추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잠시 예수님이 계시니 않는 사이에 교회는 무슨 일로 시련을 겪었는가?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 사랑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하여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악의 세력에게 휘둘려 시험에 든 모습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오셔서 악의 세력을 정복하고 교회 안에 분열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 주님의 능력은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권세를 입은 주님이었습니다. 그 주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긍휼, 용서, 그리고 치료와 도전이었습니다.

 

3. 노예로 팔려간 이유(창 37:1- 4, 12-28 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가족 간에 불화가 있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간에 불화가 있었고 에서와 야곱 사이에 불화가 있었고, 그리고 오늘은 야곱의 아들들과 요셉사이에 불화가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는 아우 요셉을 시기하는 형들은 드디서 외딴 빈들 골짜기에 요셉을 애굽 상인들에게 팔아 넘깁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낳았던 이삭의 후손입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땅에 티끌같이 자손을 번성케 하시기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대로 주시 자손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사랑받는 아들 요셉이 왜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해야 하는가요? 노예의 신분으로 애굽에 도달하게 된 방식에 의하여 요셉은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고 있었다는 나중에 나올 중요점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애굽으로의 이동의 수단 노예의 신분이라는 이해로서의 중요성에 있다기 보다 나중에 권좌에 오르게 될 전주곡으로서 중요성에 있습니다. 요셉은 애굽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시금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만난 사람중에 만난 왕의 측근들이 요셉에게 꿈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셉은 그들 중 왕의 측근으로 복권이 된 한 사람의 소개로 바로 왕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로의 꿈에 대한 명해석자로 인정받고는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노예가 이웃 강대국의 총리가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길이 여기에 작용한 것입니다.

야곱 자신과 그 자녀들의 성격에서 의로움과 성실보다는 속임수와 증오와 시기심이 더 돋보입니다. 의롭지 못하고 불성실하게 보이는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 것인가? 그들이 구원을 받고 복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의 의로움과 성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일찍이 애굽에 보낸 것은 고난기에 처하게 될 야곱과 그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생육과 번성의 복 그리고 가나안땅의 복이 성취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41-43절)”

 

4. 바른관계의 중요성 (롬 10:5-15 찬송가 520장 듣는 사람마다 복음전하여)

바울은 유대 기독교인들로부터 민족의 배반자요 성경을 무시하는 자라고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가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요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 아니었습니까? 율법과 유대민족을 위해 충성했던 그가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보물을 하루아침에 버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도 자기 동족도 그 마음에서 버린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한 길이라면 저주를 받아 지옥에까지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유대 기독교인들로 부터 율법과 성경을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는 것인가요?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던 바울이 그가 경험한 막다른 골목을 돌파할 길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율법을 지키는 삶에서 발견한 가장 큰 문제는 율법이 작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아끼고 자랑하는 자동차가 갑자기 운행중에 시동이 꺼지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면 우리는 그 차를 사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까? 새차를 구입하려는 사람에게 그 차가 좋으니 그 차를 사라고 권장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율법을 따라 변화된 삶을 살려고 하지만 노력을 할수록 그에게 변화는커녕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한발자욱도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율법이 작동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왜 율법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율법이 우리 마음 바깥에 있고 우리 마음 가운데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였는가? 그렇습니다. 그 새로운 길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우리와 함께 거주하는 하나님의 창안품입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바른 관계형성을 할 수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길입니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믿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설교하는 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입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교하는 설교자로 위임받은 자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3-15절)”

 

5. 노예에서 총리로 (시 105: 1-6, 16-22, 45,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시인은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고 합니다(105:1-4).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하신 일과 판단을 기억하라고 합니다(5절).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기적과 그 입의 판단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기적과 입의 판단을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과 하신 언약을 천대에 걸쳐서 영원히 기억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8-10절)”.

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에 대한 기억의 의미는 무엇인가? 비록 자기 백성들이 불의하고 불성실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의와 성실 때문에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족장들이 거룩한 백성들이지만 그들의 가족사를 들여다 보면 시기와 질투와 속임과 싸움으로 인한 분열이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가 그리하였으며 야곱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요셉을 그의 형들은 시기와 미움이 가득차서 애굽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족장들의 후손에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의와 성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성실이 그들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시기와 투쟁가운데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하나님이 그런 방법으로 애굽에 그를 먼저 보낸 것입니다. 노예의 신분으로 출발한 요셉을 하나님은 애굽 땅에서 총리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제 2인자로 만드신 후에 야곱과 그 자녀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금 그들을 인도하여 그들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이 앞서 보낸 요셉을 통해 나그네신세가 된 야곱과 자녀들을 구원하심은 그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그를 그의 집의 주관자로 삼아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18-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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