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진나라가 패망하고 초나라가 건국되었을 당시에 있었던 일화가 있다. 이때의 정세는 한나라 왕 유방과 초나라 패왕(覇王) 항우(項羽)가 각기 천하를 다 제 손에 넣고자 서로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서 한신(韓信)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그는 처음에 초나라에 속해 있었으나 그곳의 많은 장수들이 그가 아무리 훌륭한 작전을 제안해도 들어주지 않자 한나라로 가버린 호기 어린 장부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나라에서조차 그의 능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군량을 관리하는 직책을 얻어 한 귀퉁이에 물러나 초야에 묻히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정승의 자리에서 정사를 아주 지혜롭게 잘 다스리던 소하(蕭何)의 눈에는 한신의 비범함이 유독 돋보였다. 앞을 멀리 내다보고 일을 처리하는 것부터 매사에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거나 행동하는 한신의 태도를 소하는 유심히 관찰하며 지켜보았던 것이다.

당시 전세는 점점 한나라에게 불리해져 갔고 병졸들은 하나 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한신도 심령에 변화가 일어 몰래 그곳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소하는 급히 왕께 보고하고 한신의 뒤를 쫓았다. 소하는 극구 한신의 뒤를 추적하여 그를 데리고 돌아왔다.

그때 왕은 "병졸들은 고사하고 도망친 장군들만 해도 십만이 넘는데 그까짓 병졸 하나는 무엇에 쓸려고 쫓아 갔었오?" 라며 몹시 분노하며 소하를 책망했다. 소하는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그렇습니다. 도망친 장군들은 많지만 한신만큼은 이 땅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기에 그랬습니다."

"대왕께서 현재의 나라로 족하시다면 다르겠거니와 동방으로 진출하여 더 많은 영토를 다스릴 비전을 가지고 계신다면 한신이야말로 왕 곁에 반드시 두어야 할 인재입니다. 한신을 얻으시는 것은 대왕께서 천하를 얻는 첫 번째 단계로 소인의 눈에는 여겨집니다."

너무도 진지하고 간절한 소하의 간청에 왕은 한신에게 장군의 반열에 임명했다. 그러자 소하는 정색을 하며 한신에게는 그 정도의 직위보다 더 비중이 있는 자리에 임명하심이 옳을 것이라는 간청을 드렸고, 결국 왕은 한신에게 군부의 최고 자리인 대장군에 임명했다.

그 이후 한신은 혁혁한 공을 세워 한나라에 지대한 공헌을 하여 소하의 안목이 정확했음을 역사에 남겼다. 어떤 사람이 최고 지휘부에 있어 최선의 리더십을 발휘하느냐 하는 문제는 어떤 미래를 열어가느냐 하는 실제와 직결되기에 매우 중요하다.

중직에 사람을 등용하는 실제는 미래의 비전 성취와 실패를 갈라 놓는 실로 중차대한 숙제이기에 심사숙고해야 함이 옳다.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다. 그래서 소화와 같은 안목이 한신이라는 인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안목은 이해 내지는 손익 관계를 초월해야 한다.

우리 인간의 계획을 친히 개입하셔서 관장하시고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께서도 역사의 현장에서 당신이 쓰시고자 하시는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통해 일하신다. 심지어 바벨론 유수에 고통당하는 유다 민족을 구원하여 새 예루살렘을 회복하시기 위해 이방의 고레스를 선택하셨다.

이방 세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당신과 당신을 믿고 따르는 교회와 성도를 박해했던 유대교의 열성분자 사울이라는 청년을 선택하셔서 사도 바울로 들어 쓰시고 그를 통해 이방 선교의 포문을 열었고 오늘의 세계복음화의 길을 열었다.

바울 역시 전도 복음 사역의 동역자로 골로새 교회에 두기고, 오네시모,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 등을 천거하였다(골 4: 7~10). 로마교회에 뵈뵈 자매를 추천했고,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집사 부부 등 많은 분들의 문안 인사를 소개해 주었다(롬 16장).

그러나 현실은 국가적으로 소화와 같은 안목을 가진 자가 전무하다. 설사 있다 하여도 그 안목 자체가 빛을 볼 수 없는 희한한 세상이다. 종교적으로 그렇다. 교계적으로 바울과 같을 안목을 가진 지도급 인사들이 어디 있으며, 교회다운 교회가 어디 있는가?

성경적 영성의 진정한 마인더를 목회 현장과 성도들의 생활 전선에 던져 주는 주님의 목소리가 어디 있는가? 번영신학과 기복 신학의 울타리 안에서 현상의 숫자놀음으로 성공의 잣대를 온누리에 군림하는 현실이 아니든가? 세리의 기도가 사라지고 바리새인의 기도가 각광을 받고 있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니든가?

신령한 안목에서 정욕은 설자리가 없어야 옳다. 이해관계의 사욕이나 손익관계의 물욕이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굴지의 교회를 만들고 싶다는 야망부터 버려야 옳다. 다양한 은사를 선물로 받아 예수님을 능가하는 능력을 받아 교회 성장 주의를 꿈꾸는 영성주의도 버려야 옳다.

과거 나무뿌리를 뽑을 정도로 기도에 몰입하여 능력을 받아 영의 세계를 지배할 꿈을 키워주었던 한국 교회 강단의 미래인 오늘의 한국교회가 보이지 않는가? 목회에 실패한 한 노종의 넋두리라 여겨도 좋다. 성경의 안목과 시각으로 아무리 오늘을 긍정하려 전전긍긍해 봐도 주님은 고개를 흔드신다.

오직 한 군데 긍정하는 곳이 있다. 로뎀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에게 세미하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 그것이다. 미래를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사람들 칠천 명의 희망이다. 현대 교회나 한국 교회의 미래도 마찬가지다. 시대를 리더 할 한신과 같은 역할은 굴지의 매머더(mammoth) 교회들이 아니라 그 숲에 가려져 보이질 않으나 세리와 같은 기도의 사람들이 아닐까?

아직도 이 지상 교회가 처한 배경에는 이스르엘이 이스라엘로, 로루하마가 루하마로, 로암미가 암미가 될 남은 자, 곧 영적 인재들이 있기에 미래 교회는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다. 주님은 이 시대와 미래 교회를 위해 금, 은, 나무, 질그릇이 아닌 당신이 쓰시기에 합당한 "깨끗한 그릇"을 찾으신다(딤후 2:20~21). 그대는 "주님 저 여기 있어요"라고 힘차게 손을 들 수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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