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한계시록 10장에서 사도 요한은 두루마리를 먹고 다시 예언한다(계 10:11).

교회는 복음이 선포될 때 세워진다(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복음이 선포되는 영역은 성전이고,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 영역은 성전 밖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무한한데, 복음을 선포하는 증인은 유한하다(finitum non possit capere infinitum). 그래서 증인의 사역을 측량할 수 있다. 복음의 선포가 미치지 않는 지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현대 정신은 하나님의 영역을 제한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무한성은 고유의 특성이지만, 구원 영역에서는 다르다. 죄는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무한성과 절대성을 주장은 매우 설득력을 갖고 있는데, 죄사함이 없는 체계, 복음선포에 대해서 약화 혹은 부정하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즉 교회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부정하게 된다. 코로나19 이후와 AI의 등장으로 더욱 심각하게 도전을 교회는 받고 있다. 교회에 모여야 할 근거나 당위성이 사라졌고, 설교자를 반드시 세워야 할 근거도 사라지고 있다.

 

2. 요한계시록 11장의 주요 단어는 ‘지팡이 같은 갈대’(rod like a staff, 1절),

‘성전과 제단’, ‘측량’, ‘이방인’, ‘42달’, ‘1260일’, ‘두 증인’, ‘소돔, 애굽 =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두 선지자’, ‘부활과 승천’,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 ‘24 장로’, ‘하나님의 성전’, ‘언약궤’ 등이다.

요한계시록 11장은 일곱째 나팔이 불기 전 휴지(休止) 상태이다(송영목, 2015: 206). ‘삽입(interlude)’이란 표현은 편집설에 우려가 있고, 문학 기법으로 구조 분석을 할 우려가 있다. 성경 읽음에서 문장 구조를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문장의 의미를 구조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견해는 바람직하지 않다. 문장 의미는 저자가 의도하는 전달하려는 내용이다. 성경 기록자는 구조적 방법으로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했고, 독자들도 성령으로 파악하도록 의도했을 것이다.

 

3.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어린양의 통치와 영광’ 그리고 ‘복음전파’로 생각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복음전파’(두 증인, 1-13절)와 ‘어린양, 그리스도의 영광(15-19)가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복음전파에 이방인, 두 선지자 등의 박해자와 훼방자가 있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에 시련과 불시험을 만날 때에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권면했다(벧전 4:12-19).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여호와께 힐문했다(하박국). 여호와께서 그들을 초청하며 힘써 변론하자고 제안했다(사 1:18). 그러나 구원이 성취된 뒤 사도는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권면했다. 그리스도인이 연약하기 때문에, 여전히 구약적인 특성을 갖고서 ’왜‘라는 질문을 한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왜‘라는 질문이 아니라, 가장 밝은 빛 참빛 주와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고백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거나 선한 삶을 살 때 고난을 당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고 기쁘게 주의 이름을 부르자. 우리 구주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초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래서 ’왜‘라고 부를 그 시점에 ’감사와 믿음‘을 고백할 수 있도록 하셨다.

 

4. 힘센 다른 천사(계 10:1)가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계 11:1)을 주었다.

‘갈대’는 요단 계곡에 무성한 들풀인데, ‘갈대’는 성전과 제단을 측량하는 도구이다. 지팡이 같은 갈대는 척량하는 측정 기구이다. κάλαμος는 reed(갈대, a measuring rod)로 번역되었는데, 신약성경에서 1회 등장한 어휘이다. 1규빗은 약 45Cm인데, 갈대의 규격은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측량하는 도구로 ‘붓’(요3 13), ‘측량 자’등이 있다. ‘붓’으로 기록된 계시에 근거해서 성전이 측량(건축)할 수 있다. 성전을 측량하는 구약 본문은 에스겔 40-48장이다. 에스겔에서 성전 측량은 성전 재건인데, 스룹바벨 성전과 참 성전의 측량이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다.

필자는 ‘예배’와 ‘임재’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성전은 하나님의 상시 임재한다는 장소인데, 교회당은 상시가 아니라 예배에 임재가 있다. 예배를 통해서 임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백성들의 예배를 받으신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사도 요한에게 주어 측량하도록 하셨다(1절).

예수께서는 “와보라(come and see)”라고 하셨고, “가서 전하라(Go and preach)”고 하셨는데(마 28장), 요한계시록에서는 “가서 측량하라(Go and measure)”고 명령하셨다.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할 필요가 없다(계 11:2).

 

5. 성전 바깥 마당에 있는 이방인들이 ‘거룩한 성(the holy city)’을 42 개월 동안 짓밟는 것이다(계 11:2).

예루살렘에 헤롯 성전이 있지만,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주의 예언을 듣고 피신한 상태이다. 마태복음의 저작연대로 등장한다. 마태복음 저작 연대를 70년 이후로 보면 예수의 예언은 큰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70년 이전에 기록된 마태복음에서 예언한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말씀을 듣고서, 피신한 교회라고 연결할 수 있다. 그래서 참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이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모든 곳은 이방인들이 짓밟고 있는 예루살렘과 동일한 성전 바깥 마당이다.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완전하게 파괴하지만 주께 피한 자들은 그 파멸에서 피하게 된다.

 

6. 요한계시록 저작 연대를 70년 이전으로 보는 송영목은 1,260일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 바로의 박해(약 64년) 시절에 복음을 전한 기간으로 제시한다(송영목, 2015: 210).

두 증인은 굵은 베웃을 입고 1,260일 동안 예언했다(참고 계 10:11). 그들이 한 예언은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임박한 심판과 환난에 대해서 생명을 대해서 예언했다. 예수를 증언하는 것에는 ‘두 증인’이면 충분하다. 예수는 아버지와 성령이 증언하시고, 두 사람이 증언한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홀로 증언을 해도 완전하다. 성령께서 택자를 불러 예수를 증언하도록 한다. 현재 목사는 한 명으로 보이지만, ‘노회’라는 두 증인 기관에서 파송한 증인이다. 참고로 로마 카톨릭주의는 교황청에서 파송한 사역자이다. 예수 증인인지 교황을 반복하는 수종자인지 구분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임박한 환난에 대한 경고를 두 증인은 예언했다. 성경에서 증언의 효력은 2인이 증언해야 한다.

 

7. 두 증인은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이다(계 11:4, 참고 슥 4장).

스가랴에서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하는 여호수아(레위 지파, 제사장)와 스룹바벨(유다 지파)이다. 재미있는 상상은 감람유와 촛불이다. 촛불의 기름은 감람유이다. 두 감람나무는 풍성하고 완전한 감람유를 공급하고, 두 촛대는 절대로 꺼지지 않는 기능이다.

만약 두 증인을 해하려는 세력에 대해서는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원수를 소멸할 것이다(계 11:5). 하나님께서 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두 증인의 입에서 불이 나와 소멸시킨다. 두 증인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방편은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오는 것이다. 두 증인의 입에서는 복음과 가장 합리적인 언어(지혜)가 구현된다. 복음을 대적하는 자는 결국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굴복당한다. 주의 자녀는 복음 전함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가 복음 전함을 양보하고 포기하려고 한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한다고 말하기도 했다(롬 1:16-17). 복음을 전하지 않기 위해서 여러 핑계될 수 있지만 복음 전함에는 핑계할 수 없다. 교회가 복음 전함을 결코 양보하거나 게으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

필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 분깃을 이루도록 가르친다. 자기 기업을 소홀히 하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서 멋을 부리고 싶은 행태이다. 교회는 시작되면서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수를 증언하는 것을 쉬지 않았다.

 

8. 두 증인이 예언할 때에, 비가 오지 않는 권능(엘리야, 약 4장), 물을 피로 변하게(모세) 하는 권능을 갖는다(계 11:6).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에서 올라와 그들을 박해할 것이다(계 11:7). 그러나 그 성(城)은 영적으로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소돔이고 애굽이다(계 11:8). 무저갱에서 올라온 세력은 증인을 박해한다. 그러나 증인은 구주께서 소돔과 애굽이라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보았다(계 11:8). 그렇기 때문에 자기에게 임하는 박해와 환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거룩한 성’과 ‘큰 성’은 동일한 예루살렘이지만 영적으로 전혀 다른 성(城)이다.

 

9. 두 증인이 무저갱의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계 11:8),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들이 사흘반 동안 지켜보았다(계 11:9).

두 선지자(계 11:10)는 두 증인에 대항하는 거짓 세력이다.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으로 두 증인의 죽음을 보면서 즐거워한다. 참고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죽음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죽음에 휴지(休止)가 없으면 거짓 선지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삼일반 후에 그들에게 생기를 주어 살아나게 하신다(계 11:11). 그것을 본 구경꾼들은 크게 두려워 한다(계 11:11). 그리고 하늘에서 나온 큰 음성을 듣고서 원수들이 구경하는 곳에서 하늘로 올라간다(계 11:12). 원수들은 죽이며 즐거워했지만,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처다 보는 것처럼 바라만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때 큰 지진이 일어나고 성 1/10이 무너질 것이고, 7,000명이 죽을 것이다. 남은 자들이 두려워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계 11:13). 두 증인이 죽지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자기들이 죽는 것을 기뻐했던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고 지진으로 성이 무너질 때 1/10이 죽었다. 그 남은 자들 중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한 행동은 철저한 회개 운동이다.

 

10. 계 11:14의 ‘셋째 화’는 ‘일곱 째 나팔 재앙’이다(송영목, 2015; 213).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세상 나라에 주와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통치하신다. 이에 이방 사람이 분노하지만 주의 진노로 심판을 받으며, 주의 종, 선지자, 성도들에게 주어진 상급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은 가득하다.

 

11.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다(계 11:15).

‘일곱째 나팔’을 기독교와 유대교의 단절이라고 송영목은 제시했다(송영목, 2015: 216).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교회와 세상을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신 것이다. 천사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the kingdom of our Lord and of his Christ)”가 되어, 그가 영원토록 왕 노릇할 것이라고 했다(계 11:15). 천사는 성자 하나님을 ‘우리 주’라고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고 ‘그의 그리스도’라고 했다. 천사에게 그리스도(메시아)가 아닌 신자에게 죄사함의 구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자는 ‘우리 주와 우리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천사와 신자의 다른 고백이다. 성자 하나님의 다스림은 세상에서 영원히 실현된다(he will reign for ever and ever).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24 장로들이 얼굴을 땅에 엎드려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다(계 11:16, 계 4:4). 성자 하나님의 다스림이 완전하게 실현되려면 무저갱의 사자들이 사라져야 한다(계 11:17-18).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Lord God Almighty, the One who is and who was)에게 24 장로가 경배했다. 앞 부분에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장차 오실 이”라는 문구에서 미래형(장차 오실 이)이 빠진 문구이다. 만유를 통치하시는 주 하나님의 현재를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번역에서는 ‘왕노릇하시도다’라고 했는데, ‘통치가 시작됨(begun to reign)’이다.

24장로는 주의 통치에 대항하는 이방에 대해서 심판과 멸망을 선언하며(18절), 주의 종 선지자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것과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for destroying those who destroy the earth)라고 하셨다(18절).

그리스도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모습을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린 것으로 표현한다(계 11:19).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다. 그 안에는 번개와 음성들(rumblings, 우르릉소리)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었다(There were flashes of lightning, rumblings, peals of thunder, an earthquake, and heavy hail). 언약궤는 모세가 만든 언약궤가 있는데, 역사에서 사라졌다. 모세는 언약궤에 두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 항아리를 넣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의 언약궤에는 두 돌판 있었고,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에는 언약궤가 없다. 그런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언약궤가 보였다. 언약궤 안은 볼 수 없었지만, 성전 안에 있는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었다. 구약의 언약궤는 누구도 볼 수 없었지만(대제사장이 일 년에 1회), 하늘 성전의 언약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번개, 음성들,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에서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십자가를 믿는 사람에게는 고대했던 가장 경이로운 장면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언약궤가 보이지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이방인들은 주변 환경에서 막혀 영광스러운 언약궤를 보지 못한다.

고경태 목사, 형림서원, 주님의교회
고경태 목사, 형림서원, 주님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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