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신학이냐? 샬롬신학이냐? 용어를 선택하는게 쉽지 않다. 한국교회를 팬데믹 이전에 비판하는 용어로 한국교회는 번영신학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사실 번영해야하는 당위성에 비춰보면 비판되서는 안되는 개념인데 과거 올곧지 못한 샤마니즘적 기복 신앙에 심취한 상황을 정리하면서 이 용어로 완곡히 표현한게 번영신학이란 말에 투영되었다 할 것이다. 

잘 살펴 보면 어디 무병장수 그리고 삶에 적절한 부의 혜택으로 제대로 된 집 한 채 갖는 노력 등을 우린 기복 신앙 그리고 번영 신학에 올인하는 기형적 신앙이다라고 몰아 붙이고 그렇게 가르친다면 그게 올바른 기독교의 가르침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주승민목사, 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신전원 원장
주승민목사, 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 신전원 원장

그런 가르침을 베푸는 자들 속에 과연 가난의 영성의 대표적 산 표적이 되는 성 프란시스의 삶보다 훨 풍요로움을 누리면서 평균 보편적 삶을 추구하며 땀흘려 일하는 것을 기복신앙 번영신학의 아류다라고 단죄하는 거 그게 다름아닌 바리새적이며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아닌가?하는 반문이다. 

한국교회에 난무하는 이단들의 침투와 유사 기독교 단체의 무성함 그리고 드러내 놓고 양의 가죽을 쓴 이리떼처럼 믿음 약한 자들을 미혹하는 일이 팽배한 상황은 바로 교회 안에서 가르침의 이율배반성 그리고 바른 복에 대한 가르침에 대한 곡해 등으로 오히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생각을 갈라 놓는 취약점 때문 아닌가?

그래서 샬롬 신학으로 하나님의 바른 복을 말하는 패러다임 형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수께서 오셔서 선포와 가르침과 치료하심으로 그의 삼중 사역을 완성하셨던 발판에 서서 전인 구원 사역을 교회가 강도 높게 전개하는 거 그게 샬롬 신학으로 가는 길이라는 입장이다. 샬롬 신학에 대표적 모델인 아브라함을 보자 그의 영성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가 깊었다. 

이같은 영성의 깊이를 예수께서도 요한복음 8장 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한 말씀처럼 “메시야를 바라봄(La Visione Messianica)“을 실현한 상황, 6000년 이상의 타임 테이블을 거슬러 올라간 태고적에 아브라함은 영적 눈을 뜨고 메시야인 예수를 통찰 했다고 설명한다. 그런 영성의 주인공의 삶의 현실을 보라. 영의 세계만 그렇게 풍성했던 것이 아니라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소위 사병 380명을 거느리고 고대 전쟁에서 승리자가 될 정도로 380명의 병참까지 담당할 정도의 거부였다. 그는 영에 속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샬롬 신학의 주인공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같은 영성가 현대 모슬렘 학자들마져 그의 영성의 모습에 수긍하는 리더인데 그의 히포 교회당 안에만도 70필의 말을 소유하고 경영할 정도의 4세기 경제 지표가 되는 양화라 (bad money가 아닌 good money)할 수 있는 선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일렉산드리아의 메가스 아타나시오스는 기독교 신관 삼위일체 교리를 지키기 위해 로마 황실과 긴장할 때 아프리카의 식량 수송선박을 통해 황제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의 실력을 행사 했음을 살필 때 기복신앙 번영신학이라는 걸림돌에 주눅들어 샬롬 신학이 말하는 전인구원에 관한 담대한 전개를 위축 시키면 복음의 역동성을 제한하는 경우가 될까 매우 염려스럽다.

주승민목사, 전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교수
주승민목사, 전서울신학대학교 교회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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