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많이 까는 씨암닭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신문대표, 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춘천),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저서로는 제자세우기40일영적순례(1,2), 충성된일꾼되어가기, 주기도문, 등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신문대표, 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춘천),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저서로는 제자세우기40일영적순례(1,2), 충성된일꾼되어가기, 주기도문, 등

영성을 추구하는 분들이 선택하는 것중에 하나가 순례의 길을 걷는다. 무소유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분들의 성지 산티아고는 전세계인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져왔다.

한국 개신교인들의 사랑을 받는 '천사의 섬 신안'은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순례자들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영적순례를 떠나기 전에 먼저 그 섬이 지니는 역사적 신학적 가치를 담은 것이 먼저 일듯싶다. 

주승민 교수가 쓴 [순교자 문준경의 신앙과 삶]은 순교자 문준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 책의 탁월함은 저자가 끊임없이 세계 기독교 역사의 대가들과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라남도 신안군에 일어났던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를 한국 성결교회의 순교자로 더 나아가 한국교회사의 큰 인물로 부각시키면서 세계교회사의 대가 들의 순교의 영성과 다리를 놓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을 대하는 독자들에게 한국교회 저력과 역동성과 생명력있는 믿음의 힘을 제공해주고 있다.

저자는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와 삶을 재조명하면서 독자들에게 영적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책을 읽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심장을 뛰게하는 강렬함이 글의 밑바닥에서 용솟음치고 있고 감동의 물결이 점점 책장을 넘기면서 심장의 박동소리가 고조되어 감을 느낀다.

이것은 주승민 교수가 순교자의 삶을 글로 남겨할 거룩한 부담감과 교회사 학자로서 소명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믿는다. 문준경 전도사의 일대기에서 가장 정점을 찍는 순간인 순교의 장으로 달려가면서 더욱더 그의 글은 강렬하고, 예리하고, 섬세하게 심장 폐부를 강타하고 있다.

한국이 낳은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의 삶은 기구하다는 말이 맞지만 그러나 그의 인생 후반전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사는 불굴의 신앙인이었다. 문준경 전도사의 삶은 오늘날 목회의 방향성을 제공해주고 있다.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 그 이유를 분명히 찾을 수 있다. 이기주의, 물질 만능주의, 명예 지상주의를 하나님 나라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이 시대의 사역자들에게 주는 교훈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문준경 : 롯과 같은 효심이 지극한 여인


그녀는 구약성경 룻과 같이 효심이 지극한 여인이었다. 1908317세에 결혼했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은 첩이 있는 여인의 집으로 갔고 자연스럽게 별거가 되어 생과부로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여년간 시부모님들을 정성스럽게 모셨고,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


부르심의 소명  "너는 내것이라"


그녀는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이 있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고난과 인생무상을 경험한 문준경은 교회에 들어가 찬양을 부르며 기도하던 중 너는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고,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신학교를 입학하였다.

그녀의 성실함은 그의 트레드 마크이다. 준경은 신학 공부를 하면서 6년동안 3교회를 개척하고, 3곳의 기도처를 세웠다. 1년동안 9켤레의 고무신이 다 닳도록 동분서주하면서 건강한 교회를 세웠다.

복음을 분명하게 가르친 여인이었다. 함께 순교의 대열에 합류했던 이판일 장로를 전도한 일화는 모든 목회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교훈이다. 복음을 전하자 구주를 영접한 이판일 장로에게 문준경전도사는 담대하게 정리해야 될 2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첫째는 주초문제이고, 둘째 제사 문제였다. 즉시 듣자마자 담배와 담뱃대와 제사에 사용하는 모든 기물들을 아궁에 던져버려 소각해버렸다. 성수주일과 십일조생활 등을 철저하게 구별하였다.

그녀의 사택은 목민센터라고 불렀다. 병든자, 귀신들린자, 의지할데 없는 고아와 과부와 같이 이들이 함께 운집해 공동체 생활을 통해 치유를 체험하는 종합 목민센터였다. 그녀의 사택은 단순히 잠자리만 제공해주는 여관의 역할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까지도 돌보는 통전적인 치유와 회복의 장이었다.

문준경 전도사에 대한 다른 별명 중 대리거지라는 별명도 있다. 가난해서 굶주려 있는 사람들을 못 본체 지나칠 수 없었다. 그때마다 여유있는 집을 찾아가서 먹을 양식을 구걸하여 그들의 굶주린 배들을 채워주었다.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이 그녀의 마음이었고 생활이었다.

 


순교로 마감한 여인: "알을 많이 까는 씨암닭"


순교의 현장에서 스데반처럼 생을 마감했던 여인이었다. 1950105일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녀는저 젊은이들은 무슨 죄가 있소 살려주시오”, 끝까지 성도들을 온 몸으로 껴안았던 믿음과 사랑과 희생을 자처했던 사명자였다. 공산당들은 문준경 전도사를 알을 많이 까는 씨암닭이라고 부르면서 죽창에 무참히 찔려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이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좋은 나무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결실하듯”, 그녀의 헌신적인 섬김의 사역과 순교 피는 결실을 맺어 그 이름들이 역사의 자랑거리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요 소망이 되었다. 문준경 전도사님을 추억하면서 알을 많이 까는계절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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