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열다섯째 주간

1. 1만달란트 탕감받은 자(마 18:21-35 298장 속죄하신 구세주를)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고 승차거부 당한 승객이 버스 기사를 폭행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 이 승객은 같은 회사 기사였습니다. 승차거부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택시를 잡아타고 버스 종점까지 따라가서 버스 기사를 폭행한 것입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또 다른 유형의 사건이 있습니다. 지난 2일 부터 8일째 자가 격리 중 딸과 말다툼을 벌인 후에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 때에 중학생 딸은 문을 잠그고 엄마를 신고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사람들이 분노 가득차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디서든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다고 생각하면 어김없이 클레임을 하고 분노합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화를 내는 것이 일상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원한에 차서 복수심을 가지고 복수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보입니다. 모두가 다 네가 잘못이고 내 잘못은 없다고 합니다. 내가 하면 로멘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이 유행하는 사회입니다.
마태 공동체의 당시 사회도 사람들이 분노로 가득하여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유 속에 어느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 받고 나가는 순간에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화를 내면서 빚을 당장 갚으라고 합니다. 갚을 능력이 안되어서 참아달라고 엎드려 빌고 있는 데 친구를 감옥에 쳐 넣습니다. 친구지간인데도 나에게 진 빚을 갚지 않는다고 분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임금님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의 친구들이 임금님에게 고발하였기 때문입니다. 짧은 이야기 속에서 당시 사회의 모습을 잘 요약해 놓았습니다. 분노, 고발문화, 그리고 상호 불신이 사회의 단면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점은 오늘날 우리 사회와도 공통점입니다. 인류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발전을 해 왔음에도 인간사는 크게 변한 게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임금님에게서 당시 다른 임금과 다른 특징이 발견됩니다. 신하들은 분노가득하고 복수심에 불타고 있지만 임금은 신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1만달란트 진 빚을 결산하는 날에 엎드려 절하며 참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신진 신하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임금님은 그 신하가 진 빚 1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1만달란트는 오늘날 환산하면 얼마나 되는 금액일까요?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며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임금입니다. 하루 임금을 10만원을 잡을 때에 1달란트는 600,000,000원입니다. 1만달란트는 6억× 1만 = 6조원이 됩니다. 100데나리온은 오늘날 환산하면 얼마나 되는 금액인가? 1천만 원에 해당합니다.
먼저 천국 비유에서 임금은 누구를 상징하고 있을까? 당시 임금님이 긍휼과 사랑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임금은 신입니다. 그런데 당시 어떤 신도 무자비하였지 사랑과 긍휼의 신은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만이 긍휼과 사랑의 신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1만달란트 빚졌다가 탕감 받은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으로 용서받아 하나님의 제사장이요 율법학자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있는 유대인지도자들로 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로 하나님과 관계에서 예배를 집례 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평생 동안 애써도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하나님으로부터 탕감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탕감 받은 금액에 비하면 60만 분의 1에 해당하는 0.0000017원에 불과한 것을 돌려받지 못했다고 친구에게 분노하고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왜 그토록 큰 금액을 탕감 받았음에도 그렇게 자기가 받을 작은 금액을 탕감해주지 못하고 분노하고 있는가?
그가 친구를 보는 순간 받을 돈이 생각났고 그 순간 자신이 엄청나게 탕감 받은 것은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게 우리들 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준 것, 내가 받을 것, 그리고 나의 권리는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생활속에서 화내고 짜증내는 일들 그 순간 지나고 보면 대부분 별일도 아닌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가 억만 죄를 탕감 받은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리는 늘 감사하고 사랑해도 그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은혜를 그 사랑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 앞에 우리의 계산에 맞지 않는 일들 때문에 화를 내게 됩니다. 나와 다른 남을 용납하지 못하고 너그럽게 보아 넘기지 못합니다.
1만 달란트 6조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을 탕감 받고 돌아서는 순간 100데나리온 갚으라고 친구를 감옥에 넣은 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화내고 용서하지 못하는 순간 탕감해 주었던 그 금액을 전액 빚으로 다시 되돌려 받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빚을 다 갚기 전까지는 감옥에서 나올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00데나리온 빚진 자는 누구인가?
유대사회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유대인 회당을 사용하는 기독교인입니다. 같은 유대 백성이기 때문에 회당을 당연히 사용할 수 있지만 그래도 유대 바리새파 사람들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었다. 회당관리권을 가진 바리새파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예배를 위한 회당 사용은 자신들이 혜택을 베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대 지도자로서 그들이 그 백성 중에 하나인 기독교인들에게 이방인과 세리와 달리 시민적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그는 누구인가? 일상에서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던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나의 계산과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우리들은 1만달란트 탕감 받은 자입니다.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빚 죄의 빚을 탕감 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와 다른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못마땅한 적은 없었는지요? 1만달란트 탕감 받는 것에 비하면 0.0000017에 불과한 것이 나의 성미를 거스린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화낸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탕감해 주신 1만달란트를 다시 철회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억만 죄를 탕감 받은 우리가 분노의 홍수로 가득한 사회에서 우리가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부터 용서할 때에 오직 우리가 분노로 가득찬 사회에서 벗어나 이 사회를 진정시키는데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2. 억만 죄를 탕감받은 자(마 18:21-35 찬송가 3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


바로 단락에서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형제가 죄를 범한 경우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논의하였습니다. 마지막 단계인 교회의 권고도 듣지 않을 경우 최종적 판결은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였습니다. 이같은 결정은 이방인과 세리들에 대하여 사회적 활동을 차단시키는 당시 유대사회의 법적용이 냉혹하게 보이는 반면에 마태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 멤버쉽의 권리를 교회가 박탈한다기 보다 범죄자가 스스로 포기하는 격이 됩니다. 교회는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받아주겠다는 긍휼의 정신을 바탕에 깔고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언제까지 그를 용서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교회안에서 생겨날 수있습니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오늘 본문 속의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가? “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형제를 언제까지 용서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요? 무한대로 용서하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까지 용서를 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몸과 아내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고 당장 빚을 갚으라고 호통하는 임금님 앞에 섰습니다. 그가 갚을 것이 없어서 엎드려 절하면서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의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자리에서 나가자 마자 길에서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 친구의 멱살을 붙잡고 당장 빚을 갚으라고 하자 그 친구도 갚을 것이 없는 지라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것을 허락지 않고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사실을 곁에서 지켜보던 동료가 1 만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의 행동을 임금에게 알려드렸습니다. 그 임금님이 다시금 1 만달란트 탕감받은 자를 불러다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겨 너의 빚을 탕감해 주었으니 너도 친구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옥졸들에게 명하여 그를 다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끝낸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억만 죄를 탕감받은 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죄를 탕감받은 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3.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자(롬 14:1-12 찬송가 263장 이 세상 험하고)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의 로마교회는 어떤 모습의 교회였을까? 오늘날처럼 교회당 중심의 모임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전역에 흩어져 있는 가정교회 모습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가정들이 모여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서를 읽으면서 오늘날 맘모스 교회당을 상상하면 성경의 뜻을 오해하기 쉽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상가교회나 가정교회는 교회의 이미지가 아니고 땅위에 세워진 교회당 건물을 교회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로마교회는 로마 전역에 흩어져 있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가정들을 통칭하는 이름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이 로마교회에게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의 이 말씀에 의하면 믿음이 약한 자들이 교회를 파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작은 자는 누구인가? 오늘날 우리는 누구를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믿음의 가문에서 어릴 때부터 믿음을 가져온 사람이거나 교회에서 열심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바울 역시 그들의 믿음을 인정합니다. 그같은 전통적인 가문이나 열정적인 신앙의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데 열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신앙의 틀이 강합니다. 자신이 열심히 법을 지켜서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 살았기 때문에 법을 어기거나 규례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워합니다. 그들은 육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습니다. 그들이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혹시 먹는 고기 중에 우상제물로 사용된 고기가 아닐까 하여 먹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율법의 정결규례를 지키고 있는데 예수 믿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같은 규례를 무시하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자들을 지나쳐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결례를 어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이 낙심하여 교회생활을 중단하는 경우가 생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안기게 됩니다.
바울은 이같은 상황에서 그들을 믿음이 약한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과 함께 교회 생활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고 용납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해야 이런 기독교 공동체에서 적응을 하며 함께 지낼 수 있을까? 성숙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이 다른 문화와 이념으로 모였을지라도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약한 자나 믿음이 강한 자 모두가 다 성숙한 믿음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 오실 그날까지 우리가 성숙해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일하심(출 14:19-31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비하히롯 앞 바닷가에 진을 치고 있었을 때 일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의 바로의 군대가 공격을 피해 앞만 바라보고 왔습니다. 그들이 진행해야 할 앞에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닷가에 진을 쳤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에게 두려움이 찾아 왔습니다. 가로막힌 바다 앞에 진을 쳤는데 추격해 오던 애굽의 마병대와 이스라엘 진과의 거리가 좁아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점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모세의 말을 듣고 담대하게 바다 앞까지 왔던 그들은 뒤따라오는 바로의 군대를 보는 순간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라는 바로의 소리를 더 크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모세에게 항의 하였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1-12절)”. 그들의 두려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요? 하나님의 말씀과 모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바로의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순간 부터입니다. 이 순간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고난은 깊어지고 믿음이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모세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합니다. 바로의 소리만 들렸던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요? 먼저 고난의 현장 속에서 모세가 먼저 장애물인 바다에 접근하는 것을 그들은 보았습니다. 모세가 바다에 손을 내미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바다에 손을 내밀었는가요? 그에게는 백성들의 원망보다 “바다에 손을 내 밀어라”는 하나님의 소리가 더 크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이 바다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과거에 파묻히지 않고 확신 속에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여호와의 사자와 구름 기둥의 이동이었습니다. 앞에서 인도하던 여호와의 사자가 이번에는 뒤로 돌아섰고 구름 기둥도 여호와의 사자를 따라 이스라엘의 앞에서 뒤쪽으로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뒤따라오던 애굽진에게 머물렀던 구름과 흑암 때문에 밤새도록 이스라엘진 쪽으로 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같은 확신속에서 모세는 바다에 손을 내 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두려워하고 있는 그 바다에 최초로 접근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바다를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갑자기 동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밤새도록 불어온 바람은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마른 땅의 길이 생겼고 그 길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군대도 마른 땅의 길을 따라 바다 한 복판까지 추격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시금 모세가 손을 바다에 내 밀자 마른 땅에 바닷물이 들어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를 건넌 후 바로의 군대는 바닷물에서 수장당하였습니다. 모세의 손을 통하여 바닷물이 갈라지고 애굽군대가 수장당하는 장면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손과 모세의 손의 능력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30-31절)”

 

5. 승리의 노래(출 15:1-8, 21-22 찬송가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 때문에 여호와께 노래하는 그 노래가 오늘 본문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바로 뒤까지 추격해 오는 애굽의 군대를 보고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두려웠습니다. 앞에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그들에게 도망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불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승리의 노래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인가요? 애굽 군대를 무찌른 용사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이 애굽 군대를 혼잡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의 손이 바다를 향하여 펼치니 바닷 물이 물러가고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그 바다에 동풍이 불어와 마른 땅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마른 땅으로 걸어 바다를 지나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뒤 따라오던 애굽 군대는 모세의 손이 바다를 가르키는 순간에 수장되었습니다. 애굽군대를 수장시킨 것은 순종하는 모세를 사용하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죽음의 현장에서 기적으로 살아난 이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찬양하게 됩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6-7절)“.
전염병이 멈추지 않고 있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의 권능의 역사가 전염병을 물러가게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여 기도에 전념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움을 만날수록 본질로 돌아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세를 신뢰하게 된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우리 역시 코로나 19로 어려움이 있으나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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