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열여섯째 주간

1. 부름 받은 자는 많고 택함 받은 자는 적으니라( 마 20:1-16 찬송가 317장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예수님은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온 자가 먼저 되고 나중 된 자가 나중 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상식을 뒤집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구약에서 사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야곱은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먼저 난 자는 에서였습니다. 먼저 된 장자인 에서가 장자권을 가지는 것은 순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장자권을 누가 가졌는가? 순리를 뒤집고 나중 된 자 야곱이 장자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와서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원문에는 16절에 뒷 부분에 “πολλοὶ γὰρ εἰσιν κλητοί, ὀλίγοι δὲ ἐκλεκτοί 폴로이 까르 에이신 클레토이, 올리고이 데 에클렠토이(왜냐하면 부름을 받은 자는 많은 택함을 받은 자는 적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다 부름을 받을 수 있지만 택함을 받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야기의 주제에서 택함을 받은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율법을 다 지킨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나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 청년과 대화 중에 예수님은 “자네가 율법은 다 지켰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예, 어릴 때부터 율법을 다 암송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 지켰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율법을 다 지켜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율법을 암송하고 지킨다는 것은 명성을 얻고 출세하는 지름길입니다. 이 청년은 유대사회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그러면 네게 있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그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떠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 대화를 나누는 자리까지 나온 부자 청년은 이미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재물이 많음으로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가는 순간 그는 예수님의 선택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택함을 받지 못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상당히 우수한 사람이고 어릴 때부터 율법을 다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재산도 많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돌아올지라도 그는 주님의 제자로서는 끝자락에 서게 될 것입니다.
20장에서 집주인이 포도원 품꾼을 부르는 이야기를 예수님은 천국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 공동체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함인가? 마태복음에서 제자 공동체 내의 제자들 간에 순위 경쟁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자리에서 두 아들을 옆에 앉혀 달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순위를 놓고 제자들 사이에 높고자 하는 경쟁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엘리트주의화 된 유대사회에서 기독교도 지도자들이 유대교의 엘리트주의에 영향을 받아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엘리트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이른 아침에 품꾼을 구하려고 장터로 나갑니다. 아침 9시, 정오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 주인은 장터에 놀고 있는 품꾼을 불러 품삯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보냅니다. 하루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그 큰 포도원에 청지기도 많을 텐데 주인이 포도원에 보낼 품꾼을 직접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태도도 품꾼에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해 달라고 아쉬운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퉁명스럽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어느 누구도 주인의 거친 태도에 불만을 표현하는 자 없었고 모두가 다 말없이 주인의 명대로 포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품꾼들은 각자가 다 포도원에 들어와서 열심히 일을 하게 됩니다. 먼저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나중 온 자까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해가 저물녘에 일을 다 마치고 삯을 주는 시간이 왔습니다. 주인은 삯을 주기 위해 사람들을 부릅니다. 나중 온 사람부터 먼저 온 사람 순으로 사람을 부릅니다. 주인이 나중 온 자로부터 삯을 주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먼저 온 자들은 기대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1시간 일한 사람이 주인에게서 1 데나리온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루 종일 일하였기 때문에 많이 받을 줄 생각했습니다. 나중 온 자가 차례가 되어 주인 앞에 섰는데 그가 받은 것은 여전히 1 데나리온이었습니다. 먼저 온 자는 당장 주인을 향하여 원망을 하였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먼저 온 품꾼이 주인에게 원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인이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을 같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삯을 주고 있는 그 장면만 카메라를 비추어 볼 때 품꾼이 주인에게 원망하는 것은 정당하게 보입니다. 시간당 시급으로 계산할 때에 1시간에 1데나리온이면 먼저 온자가 9시간 일한 자는 9 데나리온, 6시간 일한 자는 6 데나리온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 그가 원망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그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기를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주인은 먼저 온 자에게 계약을 이행하여 1데나리온을 준 것입니다. 먼저 온 자에게 주인이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먼저 온 자는 주인에게 원망을 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나중 온 자와 먼저 와서 땀 흘리며 수고한 자신과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나중 온 자와 같게 여겼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주인은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요?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나중 온 자에게 주인이 후하게 주는 것은 주인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중 온 자에게 후하게 주는 주인의 뜻은 무엇일까요? 1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근로자의 최저 생계비용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중 온 자라 할지라도 최저생계를 보장해 주겠다는 정신을 가진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온 자가 질문하는 것은 나중 온 자가 일한 시간에 비해 먼저 와서 하루 종일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은 다르게 주어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입니다. 먼저 온 자의 질문에 대하여 주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주인이 먼저 온자에게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고 답변한다면 이런 대답을 할 것입니다. “네가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하는 그 시간부터 너는 이미 보상을 받았다.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하는 그 자체가 보상이니라”.
그러면 먼저 온 품꾼은 주인을 원망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먼저 온 품꾼은 자신이 본래 어떤 처지에서 주인의 부름을 받았는지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품꾼은 장터에서 놀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가 언제부터 백수가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를 일꾼으로 불러주는 자가 그동안 없었기 때문에 장터에서 놀고 불러줄 자를 기다리며 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실직 상태에 있을 때 주인의 부름과 선택에 의해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주인의 주권적 선택을 받고 포도원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모든 보수를 받을 만한 자격과 공로가 그에게 있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놀고 있는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낸 것입니다. 먼저 온 자는 자신의 공로가 아닌 주인의 은혜로 포도원에 들어온 것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포도원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제자들은 먼저 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 곁에서 먼저 부름을 받고 재산을 바치고 가족을 희생하고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지금 먼저 온 자들로서 그들이 사도와 제자로 주님 곁에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유대인 지도자들처럼 엘리트주의화 되어 교만해지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나중 온 자들에 해당하는 세리와 창기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천국의 행복을 함께 누리는 것을 보고 그들이 배 아파하면 안됩니다. 도리어 감사하고 기뻐하고 그들을 축하해야 할 것입니다.
나중 온 자들이 주님의 택함을 받고 함께 천국 생활하는 자리에 온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온 자나 나중 온 자는 모두 다 주님과 관계 속에서 내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옆 사람 잘 되는 것 보고 비교하지 말고 옛날에 잘 살던 때 비교하여 지금 생활을 비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택함을 받아 주님의 나라에서 직분 받아 봉사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보상인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천국 윤리와 천국의 법(마 20:1-16 찬송가 586장 어느 민족 누구게나)
 

추수 때에 포도원 주인이 추수할 일꾼을 구하러 장터에 나갔습니다. 이른 아침에 나가서 품군과 하루 한 데나리온 약속을 하고 포도원에 일꾼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해뜰 녘 정오, 그리고 오후 3시와 5시에도 장터에서 놀고 있는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내었습니다. 포도원에서 모두 땀을 흘리며 일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온 사람의 수고가 가장 많았습니다. 해가 질려고 할 때 일을 마감하고 주인이 나중 온 사람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주었습니다. 먼저 온 자가 주인이 품삯을 주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 온사람에게 주인이 1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내심 나중 와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1데나리온 주는 걸 보니 나에게는 더 많은 것을 줄 것인가 기대를 하였습니다. 먼저 온 자는 주인 앞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에게 주는 것은 1데나리온뿐이었습니다. 먼저 온 자는 주인에게 실망하여 그에게 원망하며 항의하였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2절)” 먼저 온 자가 주인에게 왜 항의하고 있는가? 그의 입장에서 볼 때에 주인이 공평하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보기에도 12시간 일한 사람과 1시간 일한 사람은 시급을 계산하면 그 수당이 12배나 차이가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13절)”고 하였습니다. 주인은 일을 시키고 보수를 준 게 잘못이 없다는 것은 공평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인이 일꾼에게 한 것이 공평한가? 지금 일을 하고 보수를 받는 자리가 다른 곳이 아니라 주인의 포도원입니다. 천국 비유로 해석할 때에 포도원은 천국입니다. 천국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일꾼은 주인의 은혜로 부름받아 천국에 들어와 일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일하다가 오늘은 장터에서 일거리가 없어 천국의 주인에게 부름받아 천국에 들어온 것입니다. 비록 세상 가운에서 들어온 천국이지만 천국에서는 천국 윤리와 천국의 법이 있습니다. 주인은 오늘 세상의 윤리와 잣대로 품꾼들에게 보수를 준 것이 아니라 이 천국의 윤리와 잣대로 보수를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평하고 있는 먼저 온 자의 주장은 세상에서는 정의입니다. 그러나 오늘 천국에 들어온 이상 그는 천국의 정의에 적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공평한 정의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천국의 기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먼저 주인은 먼저 온 자와 약속한 1데나리온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 다음에 나중 온자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은 한 데나리온이 최저생계비였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정의는 주인의 뜻이며 그 뜻은 일하는 자에게 누구든지 최저 생계비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포도원에 먼저 온 자부터 나중 온 자에 이르기까지 포도원 일꾼으로 일한 자들은 모두 다 포도원 주인의 은혜를 따라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주권이 일꾼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선택한 주인에게 있습니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3-16절)”

 

3.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라(출 16:2-15 찬송가 263장 이 세상 험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넌 후 1달 반 만에 도착한 곳은 신광야였습니다. 신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이 왜 원망을 하게 되었는가? 이곳은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사막지대였습니다. 기록상 장정 60만 명이며 여자와 아이의 수를 추가했을 때에 약 200만 명이 사막지대에 들어온 것입니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 많은 사람이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을 그곳에서 어떻게 마련하였을까입니다. 정말 생계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없을 때 인간의 고통은 극에 달하고 신음소리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물과 양식을 찾아도 없게되자 이스라엘 자손도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음소리가 원망이 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다음과 같이 원망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3절)”.
인간이 겪는 고통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이 신음소리라고 할 때 그 신음소리에서 출발한 원망이 왜 문제가 되는가? 인간의 자연스런 고통의 표현인 신음소리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원망에는 “나의 고통의 원인이 너 때문”이라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망을 상대편에게 돌리며 탓하는 요소는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원망하며 서로 뒷담화를 하게 될 때 모세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가 일어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모세와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질 경우 하나님과 맞서서 싸우게 되는 더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대적 관계가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오늘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을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하시면서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는 아론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자손더러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자손은 아론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듣자마자 광야를 바라보는 순간 놀라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구름 속에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입니다. 여호와의 영광 속에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내려왔습니다.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12절)”. 그리고나서 그들은 양식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론이 그들에게 “여호와께 가까이 나오라”고 하였을 때 원망함으로 하나님과 대적 관계에 있던 그들이 어떻게 무탈하게 나올 수 있었는가? 그들에게 회개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과 모세와의 관계를 회복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 가까이로 접근 할 수 있었습니다.

 

4. 복음으로 하나되는 것( 빌 1:21-30 찬송가 94장 주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바울은 빌립보에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감옥에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죽음의 문제를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라고 함으로써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삶이거나 죽음 이후의 삶이거나 어느 것이든지 그의 마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육신으로 있는 것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들었으나 흔들리는 자가 많고 그들을 복음으로 더 견고하게 세워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흔들리는가? 복음을 따라 사는 신자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을 빌립보 신자들 대부분이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두려워하는가?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원하는 것은 신자들이 복음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고 참 자유의 의미를 깨닫는 자가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향력있는 삶을 살므로써 다른 복음을 가진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27-28절)”

 

5. 신실하신 하나님(시 105:1-6, 37-45 찬송가 263장 이 세상 험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 때에 은금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이 그 땅을 떠나는 순간 애굽은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땅에 머물고 있는 이스라엘을 애굽사람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그들이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3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떠난 즉시 바로와 애굽 군대는 이스라엘을 추격하였습니다. 추격을 당하면서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이스라엘 자손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바다를 만나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바다에 내밀게 하여 바다가 갈라져 마른 땅이 되게 하였습니다. 반면에 추격해 오던 애굽 군대는 모세가 손을 내밀자 마른 땅이 바다가 되어 모두 수장되었습니다. 애굽 군대를 두려워하여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던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보여준 기적을 본 이후에야 비로소 모세와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광야에 도착하여 물과 양식이 없어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을 뿐만 아니라 므리바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물이 없어서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을 들었을 때에 그들에게 물과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오늘 시편에서는 므리바의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충성스럽지 못한 자기 백성에게 기적을 주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언약을 천대가 지난 후에도 기억하시고 이루십니다. “반석을 여신즉 물이 흘러나와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41-42절)”.
그렇다면, 불신앙으로 멸망받아야 마땅한 이스라엘 자손은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기억하고 계신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 것인가요? 신실하신 하나님이 기억하신 것처럼 그들에게 하나님의 행하신 그 기적의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5절)” 이스라엘 자손이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을 칭찬하며 감사함으로 그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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