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대림절 첫째 주간


1. 경보음을 듣지 못하는 이유 (막 13:24-37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인도, 타이, 스리랑카, 등지에서 2004년 12월 말에 일어난 남아시아 지진 해일에서 30만 명 정도의 인명 피해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나무가 뿌리 채 뽑히고 자동차가 전복되는 등 엄청난 지진 충격으로 관광객 등 200명 정도의 인명 피해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동물의 피해는 한 건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코끼리, 표범, 원숭이 등 수십여 종의 동물들이 지진 발생하기 수개월 전부터 이동하기 시작하여 모두 다 고지대로 안전하게 대피하였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자연 재해를 대피할 수 있는 감지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감지능력이 동물보다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이성과 지식의 능력에 의해 발명해 낸 도구를 의지한 나머지 동물적 감각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현상 뒤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혀 모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감각이 발달되지 않은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우리 몸에는 경보장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경보장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경보장치는 피로라고 합니다. 피로가 느껴질 때 우리 몸의 소리를 듣고 잘 쉬어주고 잘 점검하면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는 영적세계를 느낄 수 있는 경보음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경보음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급한 일에 몰두한 나머지 경보음을 들을 만큼 중요한 일에 시간을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안다고 하는가? 여름이 오기 전에 반드시 먼저 징조인 무화과나무 잎사귀가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기후와 계절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주님의 재림 전에 그 징조가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에게 경보하는 징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열 처녀들 중 기름 준비를 못한 사람들은 신랑을 맞이하는 데 실패하였으나 기름준비를 한 사람들은 신랑을 맞이하여 혼인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다섯은 주님을 맞이할 준비로 영적감각이 살아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징조는 무엇인가? 징조가 오기 전에 먼저 환란이 온다고 했습니다. 14절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것을 말합니다. 곧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성전파괴와 나라가 망한 일이 있고 그 다음에 주님이 오실 징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보통 사업하다가 실패할 때에 큰 실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가 실패의 고통이 있는 순간이지만 결코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리어 이 때가 주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도리어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는 징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그 자리에 주님의 빛이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 64장에서 선지자는 우리는 토기이고 하나님은 토기장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빛줄기를 비추고 있어도 우리가 닫고 있으면 빛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빛줄기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때는 육신의 상처와 아픔과 좌절을 겪는 그 순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환란 후에 주님 재림의 징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징조가 무엇인가요?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24-25절)”. 해가 어두워지고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는 것은 하늘과 땅에 큰 충격입니다. 이 충격은 땅위에 있는 우리들은 엄청난 두려움과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충격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작동이 잘되는 주님의 경보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보음의 의미는 생명과 사망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두워지는 해와 떨어지는 별들과 흔들리는 하늘의 권능과 같이 오늘날 우리를 동요시키고 충격에 빠뜨리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날 코로나 19는 역시 우리에게 큰 충격입니다. 이것 역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경보음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경보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알람시계 소리를 들은 자가 일어나듯이 우리 역시 경보음을 듣고 깨어야 합니다. “깨다”는 말은 “각성한다”는 말입니다. 코로나 19를 비롯해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있는 사건들을 보고 우리에게 영적 각성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서 오실 주님을 찾고 오실 주님에게 우리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36-37)”


2. 우리 몸 속의 알람장치 (막 13:24-37 찬송가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우리 몸에는 경보장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경보장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경보장치는 피로라고 합니다. 피로가 느껴질 때 우리 몸의 소리를 듣고 잘 쉬어주고 잘 점검하면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안다고 하는가? 여름이 오기 전에 반드시 먼저 징조인 무화과나무 잎사귀가 나오듯이 주님의 재림 전에 그 징조가 반드시 먼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에게 경보하는 징조는 무엇인가?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24-25절)”. 해가 어두워지고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리는 것은 하늘과 땅에 큰 충격입니다. 이 충격은 땅위에 있는 우리들은 엄청난 두려움과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충격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작동이 잘되는 주님의 경보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경보음의 의미는 생명과 사망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두워지는 해와 떨어지는 별들과 흔들리는 하늘의 권능과 같이 오늘날 우리를 동요시키고 충격에 빠뜨리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날 코로나 19는 역시 우리에게 큰 충격입니다. 이것 역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경보음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경보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알람시계 소리를 들은 자가 일어나듯이 우리 역시 경보음을 듣고 깨어야 합니다. “깨다”는 말은 “각성한다”는 말입니다. 코로나 19를 비롯해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있는 사건들을 보고 우리에게 영적 각성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서 오실 주님을 찾고 오실 주님에게 우리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36-37)”


3. 토기장이 손 안에서 빚어지는 토기

(사 64:1-8 찬송가 278장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다”고 하나님을 심판자로 믿었던 이사야 선지자는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고 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고백합니다. 선지자가 심판자인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심판자인 하나님은 죄인에게 두려움과 죽음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죄를 범한 자녀에게도 사랑과 용서의 이미지를 드러냅니다. 선지자는 구약성경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개념인 아버지를 하나님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역하고 죄를 범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헤세드의 사랑으로 그 백성들을 구속하고 재창조하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바벨론 포로 말기에 선지자는 포로생활에 지친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위로와 희망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비록 백성들이 죄를 지어 시들고 바람에 날려 가버리는 낙엽같은 존재이지만 오직 소망은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이유인즉 하나님은 진흙으로 토기를 다시 만들 수 있는 토기장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흠집이 난 토기를 깨어 부수고는 새로운 토기를 만들어 내는 토기장이처럼 죄와 허물로 파괴되고 황폐해진 백성들까지도 새로 만드시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5-7절)”


4. 도달했다기 보다 갈 길이 더 많이 남은 순례길

(고전 1:1-9 찬송가 176장 주 어느 때 다시)


고린도 교회가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면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고린도 신자들이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고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만족하지 않는 갈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부흥한 교회입니다. 인적 자원도 재정 능력도 영적 은사도 봉사하는 능력도 넘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그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었으나 그리스도로부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 몇몇은 이미 그들이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위해 할 일도 없고 더 이상 배울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고린도인들의 이같은 자기 만족적 추구가 교만 죄로 보였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아직 도달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전이 여행 중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성장해야 할 그리고 배워야 할 많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되는 본질에 속한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 믿음 생활은 하나님의 선에 대한 개방성입니다. 이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과 우리와 이웃에게 많은 여유 공간을 남겨놓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와 다른 사람에게 여유 공간을 주지 않도록 꽉 막은 것을 비틀어 열고 있는 중입니다. 그 폐쇄성은 우리가 자기 성취적 자기 만족적 도취에 빠져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 자신과 이웃과 교제의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사랑만이 우리가 도달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7-9절)”


5. 주의 얼굴빛의 능력 (시 80: 1-7, 17-19 찬송가 278장 여러해 동안 주 떠나)


시편 80편은 3, 7, 19절에서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는 동일한 후렴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후렴구는 애가입니다. 왜 동일한 후렴구가 세 번이나 반복되는가? 이 애가에 시편의 예전적 동기와 신학적 관심사가 있고 이 구절을 지배하는 것은 세 동사 속에 있습니다. 즉 돌이키다(수브), 비추다(우르), 그리고 구원하다(야샤브).

돌이키다는 말은 회개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켜 달라는 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왜 우리를 돌이켜 달라고 호소하는가? 시편속에 백성들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은 바벨론 포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서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에게 진노하고 계시고 그 노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백성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노가 폴릴 것인가요? 돌이키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백성들이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돌이키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시면 우리를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백성들에게 비추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태양이 땅을 빛으로 일광욕을 시키듯이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내 뿜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낙심하고 절망 중에 있는 백성들에게 기운과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을 때 우리 인간은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을 얻도록 해 달라는 탄원 기도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 생각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 편에서 백성들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여준 성실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왜 나를 배반하는가?” 두 번째로 백성의 편에서 하나님에게 질문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보여준 성실한 사랑(헤세드)에도 불구하고 왜 당신은 우리가 고난 받도록 내버려 두셨는가요?”

그러나 시편은 말미에서 백성들은 그들이 구원을 받아 소생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계속하여 부르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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