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스물여섯째 주간

 

1. 심판의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행한 것 (마 25: 31-46 313장 내 임금되신 내주여)
임금이 오른 편에 서 있는 자에게는 “지극히 작은 자들의 형제들의 이들 중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하여 “형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반면 왼편에 있는 자에게는 임금이 “지극히 작은 자들의 이들 중 하나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여 “형제”라는 개념을 생략했습니다. 여기서 오른 편에 있는 자의 돌봄을 받았던 지극히 작은 자에게는 “형제”라는 말이 들어 있는 반면에 왼편에 있는 자의 돌봄을 받지 못했던 지극히 작은 자에게는 “형제”라는 말이 빠져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주님 보시기에 오른편에 있는 자에게는 형제 개념이 있고 왼편에 있는 자에게는 형제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는 헐벗고 굶주리고 길 잃고 상처받고 살아가는 작은 자를 돌보게 된 것이 형제 사랑으로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왼편에 있는 자들은 굶주리고 헐벗고 소외받고 길잃고 상처받고 살아가는 그 작은 자들을 그들의 형제 중 하나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그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로 길잃고 병들고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지 않았다고 하였을 때 “우리가 언제 당신을 돌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돌보는 일을 했다고 한 것입니다. 임금이 “아니”라고 한 것을 그들은 “행하였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행하기는 행하였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행하였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들은 경건을 목적으로 선행과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왜 선행과 금식을 하였던 그들에게 의로운 일 선행을 한 것이 없다고 하는가? 그들에게 형제 사랑의 근본이 되는 긍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이 그들에게 긍휼을 찾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요? 긍휼은 심판 날에 심판의 잣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심판대 앞에 모였는데 그 앞에서 임금은 오른 편으로 양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왼편에는 염소들을 세웠습니다. 오른편과 왼편으로 갈라서는데 기준이 무엇인고 하면 그것이 긍휼입니다. 긍휼의 마음이 있는 자는 형제를 돌보는 사랑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긍휼의 마음이 없는 자는 그 마음 가운데 돌보아야 할 대상인 형제가 없는 것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강도 만나 개울에 쓰러져 있는 사람 곁을 세 사람이 다 지나갔습니다. 먼저 지나갔던 두 사람은 두 가지 일을 하고 맨 나중에 지나간 세 번째 사람은 세가기 일을 합니다. 먼저 두 사람이 행한 두 가지 일은 무엇인가? 첫째는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는 일이요 두 번째는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사람은 세 가지 일을 합니다. 그는 처음에 쓰러진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로 그는 긍휼의 마음이 솟아나 감동을 받게 됩니다. 세 번째 그는 긍휼의 마음을 겉으로 표현하고 그를 도와주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문제는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는데 심판 날이 갑자기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른편에 선 자나 왼편에 선 자는 모두 다 심판대 앞에서 임금의 심판에 대하여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임금이 어떤 기준으로 심판하고 있는지 그 심판의 기준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기준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긍휼의 행동을 실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작고 미미하게 보이는 주님의 형제에 대한 긍휼의 실천이 주님 앞에 복받을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을 실천하기 위한 긍휼의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요?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오직 기도 곧 회개기도 시에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2. 작은 자에 대한 대접이 이렇게 큰 상이 될 줄이야 (성경 마 25:31-46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올 것을 비유로 말하였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예수님이 오실 때에는 임금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을 것이며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구별하여 세울 것이라고 합니다. 임금이 오른 편 양들에게는  “내 아버지로 부터 복받은 자들이여 창세이래로 너희를 위해 준비된 나라 곧 너희의 유업을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굶주릴 때 너희가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옷을 필요로 할 때에 옷을 입혔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 나를 돌아보았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너희가 와서 방문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의로운 자가 물었습니다. “주여 제가 언제 당신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나이까?” 그리고 “ 제가 언제 당신을 방문하고 옷을 입혀주었으며 언제 제가 병 문안과 감옥을 방문하였나이까?”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대답하였습니다. “가장 작은 자들 중 하나에게 한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나를 위해 한 것이니라.” 그리고 왼편에 있는 염소들에게는 그와 반대로 “가장 작은 자들 중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은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생소하게 들립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부활한 예수님은 육신의 눈을 가진 우리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남겨두신 작은 자들에게 대접한 것이 예수님을 대접한 것입니다. 반대로 작은 자들을 홀대한 것이 예수님을 홀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 자들이란 누구인가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3. 길잃은 양떼를 찾고 돌보시는 하나님 (겔 34:11-24 찬송가 529장 온유한 주님의 음성)
하나님께서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라고 합니다. “찾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라쉬(דָּרַשׁ)”와 “카바르(בָּקַר)”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라쉬”는 “조사하다, 발견하다”의 의미에 가깝고 “카바르”는 “추구하다 고려하다”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양떼를 반드시 찾아낸다는 말입니다. 이같은 표현은 하나님이 자기 양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 양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셨는가?
하나님의 양떼들이 길을 잃고 각자 흩어져서 병들고 상처받은 상태로 방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되신 하나님의 우리에 있어야 할 양 떼가 왜 우리 밖에서 길을 잃고 병들고 상처난 몸을 가지고 돌아다니게 되었는가? 그 약한 양들은 살치고 힘센 양에게 먹이를 빼앗기고 힘센 양의 발에 밟힌 잔반을 먹다가 그곳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자기 양을 찾아 나서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밀고 들이받는 지도자들인 힘센 양과 압제받는 백성들인 약한 양들이 정의에 입각하여 상호 돌보기를 기다렸습니다. 여기서 그러나 하나님은 때가 차서 심판의 막대기를 들고 양떼들 가운데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 자기 양떼를 챙기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직접 약하고 굶주린 양들, 상처받은 양들, 그리고 길잃은 양들을 특별하게 돌보듯이 마찬가지로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본을 따서 궁핍한 자들을 똑같이 돌보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궁핍한 자를 돌보기를 원하심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19-21절)”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 양을 찾아 돌보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님은 양을 돌볼 목자를 세울 것입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23-24절)” 여기서 하나님은 양떼를 구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양들을 다스리는 한 목자를 세울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목자가 선한목자로서 하나님 자신을 본뜬 “나의 다윗”이 될 것입니다.


4. 영광과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엡 1:15-23 찬송가 293장 주의 사랑 비칠 때에)
바울은 기도할 때에 에베소 교회로 인하여 끊임없이 감사하면서 지혜와 계시의 영과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를 위해 기도한다고 합니다. 믿음과 성도 간에 사랑의 소식을 듣고 감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주시기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을 속량해 주신 하나님과 부르심의 소망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히신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 모든 권세와 만물을 그 발아래 굴복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권세와 만물을 발아래 굴복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충만을 어디에서 늘길 수 있는가? 교회에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충만한 것을 언제 느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의 충만을 느낄 수 있는 때는 예배 중입니다. 에베소서 저자는 예배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자들이 그 영광과 능력의 근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그 영광과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에베소 신자들에게 계시의 영과 마음의 눈이 열릴 때 그들이 얼마나 복을 받은 자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출석하여 예배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 보물로 가득한 곳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20-22절)”

 

5. 하나님 앞에서 함성을 질러야 하는 이유 (시 100편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시인은 온 땅에게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찬송을 부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는 전쟁에 나가는 군대가 함성을 지르거나 적을 무찌르고 승리한 군대가 함성을 지를 때에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야!”하고... 그런데 시작부터 시인은 온 땅이 왜 하나님께 “우....야!”로 함성을 질러야 한다고 하는가?
우리가 부름 받은 자리에 우리를 창조하시고 자기 양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목자되신 하나님이 소망없이 길잃고 방황하며 찢기고 상처입은 백성들을 찾아내어 불러서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한 목자로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데 왜 백성들은 소망없이 방황하고 상처받는 자리에서 신음하고 있었는가? 그들이 하나님이 선한 목자인 것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물욕과 성취욕을 부추기는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긿잃고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양떼들을 끝까지 찾아 불러낸 것입니다. 자기 양떼를 찾으시고 돌보시는 목자 앞에 서 있는 그 백성들을 향하여 시인은 외칩니다.
그래서 시인은 백성들에게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라고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라.” “찬송하며 그의 궁정에 들어가라” 그리고 “그에게 감사하라 그리고 그의 이름을 송축하라.”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