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스물한째 주간


1. 율법과 예언이 성취되는 때는

(마 22:34-46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교회에는 본질적인 요소가 있고 비본질 요소가 있습니다. 본질을 양보해서는 안되지만 비본질은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깔뱅은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는 양보할 수 없어도 비본질적인 요소는 양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 성만찬을 훼손하지 않는 한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에 개방적이었습니다. 오늘 성전 안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을 종교지도자들이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던 기존의 체제의 기초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두개파에 이어 바리새파가 정교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려 넘어뜨리려고 묘안을 찾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바리새인들 중에 한 율법학자를 대표로 선정하여 예수님에게 질문하게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 가지고 온 질문은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였습니다. 이 질문에 곧이 곧대로 대답을 하게 되면 여러 계명 중에 어느 한 가지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그 나머지에 대한 무시가 자연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 중 큰 계명 한 가지를 말하면서 그 나머지 계명을 무시하는 것을 포착 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계명에 대하여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계층적(하이러라키적)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1열로 줄 세울 때 제일 먼저 되는 계명, 두 번째, 세 번째... 등으로 계명의 순서를 매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과 같이 대답했다면 예수님은 그들의 예상대로 답변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보통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의 접근방식이 전혀 달랐습니다. 율법사가 요구하는 답은 개별 계명이었으나 예수님은 율법의 계명 중 어떤 개별 계명을 가지고 답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계명들을 바치고 있는 토대가 되는 본질적인 정신을 가지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대화하는 내용은 대부분 일상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본질적인 것보다는 비본질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 율법사가 가지고 온 질문이 요구하는 답변도 율법의 본질적인 부분보다도 비본질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율법을 일렬로 세워 놓았을 때에 그 중에서 어는 것이 크냐는 식으로 이야기가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이야기할 때에 사람들이 이야기하기 쉬운 비본질적인 내용입니다. 이 논리대로 그 중 하나를 꼬집어 그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했을 때 자연히 나머지 다른 계명은 그것에 비해 작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의 핵심은 정답을 듣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작은 계명이라도 성경입니다. 그 작은 계명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큰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난 후에 그것에 대한 대답에서 다른 계명을 작다고 할 경우에 성경을 무시한다고 꼬투리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무시하는 한다는 답변을 그는 예수님에게서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왔습니다. 먼저 신명기 6:5을 가지고 왔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 다음에는 레 19; 18을 이야기합니다. “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7-40절)”고 하였습니다. 율법에 대한 본질적인 답변을 듣고 그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이제 예수님이 주도권을 잡고서 그들의 관심거리가 되는 본질적 질문을 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그들은 “다윗의 자손입니다”고 답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 110편을 인용합니다. 다윗 성령에 감동되어 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 110:1). 그들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질문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주라고 말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큰 율법에 대한 답변을 마치시고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입장이 어떠한지 질문한 이유가 무엇인가? 율법과 예언은 메시야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율법과 예언은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합니다. 메시야오심은 율법의 성취가 됩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예언을 가르치는 율법 학자는 메시야를 어떻게 대우해야만 할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율법대로라면 그들이 메시야를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나타난 메시야에게 그들은 어떤 대우를 하고 있는가? 메시야를 사랑하기커녕 그 메시야를 살인할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을 가르치는 학자들이 어리석게도 율법과 메시야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초래된 문제입니다. 반면 마태의 독자들은 율법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들은 메시야를 사랑하는 것으로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2. 제일 큰 계명은? 
(마 22:34-46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성전 안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을 한 방에 무너뜨릴 질문을 만들어 공격하였으나 실패한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다른 묘안을 찾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바리새인들 중에 한 율법학자를 대표로 선정하여 예수님에게 시험하는 질문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 가지고 온 질문은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였습니다. 이 질문에 곧이 곧 대로 대답을 하게 되면 여러 계명 중에 어느 한 가지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택한 한가지 계명 외에 나머지 계명은 자연히 무시당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큰 계명을 선정한 대신에 다른 계명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공격을 예수님에게 퍼붓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같은 전략을 세운 이유는 계명에 대한 그들의 사고방식이 위계 질서적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1열로 줄 세울 때 제일 먼저 되는 계명, 두 번째, 세 번째... 등으로 계명의 순서를 매길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큰 계명에 대하여 예수님은 율법의 계명 중 어떤 개별 계명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그 계명들의 토대가 되는 요약된 핵심내용을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7-40절)” 예수님을 답변을 듣고 있었던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은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답에서 흠잡을 것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이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질문합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라고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칭하였은즉 어찌 그리스도가 그의 자손이 되겠는가?”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3. 겸손한 자의 복 
(신 34:1-12 찬송가 347장 허락하신 새 땅에)


120세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던 모세는 느보산 비스가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이 주시기로 한 약속의 땅을 모두 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기서 죽게 됩니다. 맞은편에서 약속의 땅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던 모세가 왜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였는가? 그 일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을 출애굽시키고 광야를 통과하고 약속의 땅이 내려다 보이는 느보산 비스가 산꼭대기까지 백성들을 인도했던 모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백성을 인도하여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한 그 땅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백성들과 함께 어떻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되었는가?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이 충만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지혜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모세에게서 안수를 받은 이후였습니다. 그러면 모세에게서 받은 그 안수의 의미는 무엇인가? 안수란 손을 머리에 얹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그의 머리를 안수자의 손에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를 누군가의 손에 맡긴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하고 따라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가나안 정탐꾼들 모두가 다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악평할 때 갈렙과 함께 여호수아는 그 땅을 하나님이 주시면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던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도 순종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할 수 있어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 둘 다를 순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 일을 해낸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는가?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능력의 아래 머리를 맡긴 사람이었으나 그는 모세가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할 만큼 모세는 위대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웅이 들어가지 못한 약속에 땅에 백성들을 인도하여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였습니다. 이 점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모세를 동시에 순종했던 여호수아의 겸손입니다. 여호수아의 위대성은 순종과 겸손입니다.


4. 번영의 장소가 되는 하나님의 거주지 
(시 90: 1-6, 13-17 찬송가 588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시인은 예배자로서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인과 그의 공동체의 거처는 장소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시인과 그의 공동체가 예배하는 장소로서 성전이 아니라 그들의 거처로서 하나님을 노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 하나님은 영원하시지만 잠깐인 인생이 거처하는 장소는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인과 그의 공동체는 거주지로서 성전과 나라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성전과 나라는 그들의 거주지로서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오직 그들의 거주지는 하나님이신 분입니다. 시인의 초점은 공간에서 하나님의 임재하는 시간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수한은 티끌같고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같은 것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3-4절)”
그렇다면 시인은 인생의 짧음이 허무하다는 것인가? 아닙니다. 잠깐 머물다 갈 공간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히 영속하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소망을 두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긍휼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헷세드 사랑 곧 견고한 사랑이 공동체에 응답의 증거로서 항상 보여질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끝으로 공동체의 번영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16-17절)”


5.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

(살전 2:9-13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11절에서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를 바울은 네 번째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기억하리니”까지 포함시키면 2장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알고 있는 것을 5번이나 강조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1, 2, 5, 11절). 데살로니가 교회 설립 초기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바울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빌립보에서 바울과 그의 일행이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둘째 바울이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는 수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그 때에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사람의 말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알고 있었던 이같은 내용을 바울이 다시 그들에게 상기시키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 초기 사역에서 그들이 읽고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였던 처음 신앙을 회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처음 신앙은 순수하였습니다.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신앙을 망각하므로 믿음에 변질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바울을 의심하는 것도 처음 신앙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의심할 때 그들이 믿는 복음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1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12-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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