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성령강림 열여덟째 주간

1. 행동하는 순종( 마 21:33-41 찬송가 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집도 건물도 모든 재산도 우리 몸도 모두다 우리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살 영원한 곳은 아닙니다. 지금 사는 동안 우리는 이곳을 빌려쓰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성전의 관리자로 책임지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도 하나님의 성전에 섬기는 자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종교지도자들이 관리의 책임을 지고 있었던 성전은 형체도 없이 파괴되어 사라진 것입니다. 그같은 비극이 찾아온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들과 마지막 예언자 세례요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로 온 세례요한의 가르키는 방향을 바라보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믿지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같은 배경에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느 부재지주가 소작농들에게 포도원을 맡겨놓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세 받을 때가 되어 종들을 보내었으나 그들 중 하나는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하나는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었습니다. 이유인즉 아들을 보내면 그들이 그를 존대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작농들은 주인의 생각과 반대로 아들을 보자마자 “이가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고 한 이후에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온 후에 그 소작농들에게 주인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제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다른 소작농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줄지니라”.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진멸하라고 한 악한 자는 누구이며 제 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소작농은 누구인가? 그 악한 자는 주인 보낸 종들을 폭행하고 아들까지 죽이는 기존의 소작인들입니다. 그 기존의 소작인들이 왜 주인의 종과 아들을 죽이는 일을 했는가? 그들은 상속자되는 아들을 죽이면 결국 그 땅을 자신들이 차지할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왜 주인의 편에서 폭력적인 소작인들을 악하고다고 평하고 있는가? 그들 대부분 비유 속에 포도원 주인과 같은 부재지주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는 동안 대제사장과 장로는 많은 땅을 소유하고 소작인들에게 세를 주고서 그 세를 받아 재산을 늘리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일정한 세를 주지 않으려고 주인이 보낸 종들과 아들에게 폭행과 살인을 감행하는 것은 악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하는 자리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포도원은 무엇인가요? 포도원은 하나님이 관리하도록 맡겨놓은 성전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누구인가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포도원을 세내어 소작인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포도원 곧 성전관리를 잘못하여 책망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관리자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됩니다. 이 성전 관리직책을 뺏아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누가 한 것인가요? 이것은 예수님을 심판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과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요? 하나님의 보내신 자들을 잘 맞이하고 하나님을 순종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예언자 세례요한을 그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들은 헤롯이 살인하는 것을 방관하므로 살인을 막지 못했으므로 공모를 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시겨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현장에 있는 그들자신에게 실제적으로 적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말대로 포도원을 다른 백성에게 세 주어야 하는데 새포도원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 새포도원은 성전이 파괴되고 없어진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요 새로운 공동체요 교회가 되겠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마태의 기록시점이 언제인가? 85년경입니다. 성전파괴된 시점이 70년이니까 성전파괴이후 15년이 지난 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전관리와 책임을 게을리한 이유 때문에 성전을 허물고 새로운 포도원인 공동체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주시겠다고 합니까? 제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백성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열매는 행동과 순종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행동하는 순종이 있는 백성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은 메시야를 믿는 세리와 창기를 포함하여 이방인들까지 열매를 제때에 바치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세로 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교회에 오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열매를 잘 바칠 것을 알고 불러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고 교회를 섬기는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하나님앞에서 칭찬받고 상받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2. 열매맺는 백성(마 21:33-46 찬송가 216장 성자의 귀한 몸)


성전안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을 향해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권위가 하늘로 부터냐 땅으로 부터냐”라고 되물었습니다. 지난 주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권위에 대하여 두 아들 비유로 말씀하던 반면에 오늘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하여 세를 받기 위해 포도원에 아들을 보내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세례요한의 의의 도에 귀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나라에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성전관리자로 임명을 받은 그들은 성전을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관리자로 있는 동안 성전은 파괴될 것입니다. 이유인즉 선지자로 온 세례요한의 가르키는 방향을 바라보는데 실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의 외치는 소리를 통해서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보내는 메시야를 맞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부재지주인 포도원 주인이 소작농들에게 포도원을 맡겨놓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세받을 때가 되어 종들을 보내었으나 그들 중 하나는 죽임을 당하고 다른 하나는 돌에 맞아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었습니다. 이유인즉 아들을 보내면 그들이 그를 존대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작농들은 주인의 생각과 반대로 아들을 보자마자 “이가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고 한 이후에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온 후에 그 소작농들에게 주인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제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다른 소작농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줄지니라”.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진멸하라고 한 악한 자는 누구이며 제 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소작농은 누구인가? 그 악한 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제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소작농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세리와 창기 그리고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될 열매맺는 백성들입니다. 반면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입니다. 그들이 관리자로 있던 성전은 산산조각으로 파괴될 것입니다. 성전관리자로서 직무를 게을리하였기 때문에 성전파괴 이후에 그들은 성전파괴의 주범으로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열매맺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 곧 교회의 상징인 포도원을 잘 관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을 것입니다. 아들을 믿고 아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들은 마지막 때에 아버지로부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푯대를 향하여(빌 3:4-14 찬송가 94장 주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육체를 신뢰할만한 자였다고 합니다. 팔일만에 할례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이며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없는 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그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이같은 이력을 가졌다는 것은 출세와 성공의 조건을 구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서 추구하던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들 보다 더 고상한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고상한 가치임을 몸소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에게서 발견한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안에서 찾으려고 전심을 기울였으나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가 율법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것은 죄와 사망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이전에 바울사도가 혼신을 다하여도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그가 그것을 발견했으니 그가 부러워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경우 원하는 것을 얻고 목적 달성했으면 이제 힘든 일을 그만하고 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반면에 그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면서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하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한 사람이 느끼는 안도감에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붙잡으려고 열심히 달려간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가 바라던 것을 찾았다고 했는데 그것을 붙잡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앞으로 달려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그의 최종목표는 죽은 자 가운에서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부활에 도달하게 되는 그것을 표대로 삼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는 부르시는 그 부름의 상을 위하여 그는 쉼없이 달려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힘써 달려가는 수고를 무엇에 비유하고 있는가? 그것은 새 생명이 태어나기까지 산모가 겪어야 하는 해산의 수고입니다. 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해 겪는 고난을 그리스도를 믿어 부활에 이르게 될 새 생명이 태어나기 위한 해산의 고통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더 이상 달려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우리 역시 아직도 달려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달려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달리기를 멈추고 쉬고 있다면 우리가 붙잡은 그것은 무엇인가? 혹시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믿은 나머지 더 쉽게 더 편안하게 더 효율적으로 달려갈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2-14절)”

 

4. 구속의 은혜(출 20:1-4 6-10 12-20 찬송가 38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도착하였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모세는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내려오는 데 40일이나 걸렸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산기슭에서 모세가 서 있는 산에 접근을 하지 못할 만큼 산에 하나님의 임재로 흑암에 가리웠기 때문입니다. 그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법은 10계명입니다. 이 계명의 처음에는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은 애굽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구속자입니다. 종살이에서 자유케 된 이스라엘 백성의 주권의 소유자는 구속자인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10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 법을 지킴으로써 안전과 생명을 보장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법의 구조는 전반부(1-4계명)와 후반부(5-10계명)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전반부는 하나님 사랑의 계명인 반면에 후반부는 사람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의 한 가운데 에는 제 4계명인 안식일 준수의 법이 있습니다. 안식일 법을 모든 계명의 중앙에 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안식일 법을 통해서 백성들이 구속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매 안식일마다 백성들은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훗날 이 안식일 준수는 바벨론 포로기 유배생활을 하는 백성들에게 나라와 성전 회복을 위한 자녀교육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십계명과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이 구속의 사건인 반면에 기독교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속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안식후 첫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부활의 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로 지켜왔습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준수는 기독교인들에게 주의 날에 적용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날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며 예배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일날에 안식일 계명을 적용하되 이 날을 나라의 회복과 기독교 정체성 교육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날을 지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죄의 종살이에서 구속받은 하나님 자녀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인들의 주일이 공휴일로 정착된 것은 로마에서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를 공인종교로 선언한 이후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5. 완전, 순결, 정결(시 19편 찬송가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창조는 소리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고대 사회에서 신으로 여겨졌던 태양조차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시편기자는 온세상에 빛으로 스며드는 태양처럼 하나님의 계명도 사람의 마음속에 스며든다고 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왜 하나님의 계명을 태양에 비유하였을까요? 시편 기자는 고대 사회에서 신으로 숭배받고 있었던 태양의 파급효과가 하나님의 계명의 능력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파급능력은 은밀하게 투과하는 빛처럼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그리고 여호와의 법도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이름을 가지게 된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능력이 탁월함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의 능력은 어떠하며 그 기능은 무엇인가요? 먼저 그 능력은 흠없이 완전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이 완전한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서만 소생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 능력은 순결입니다. 죄로 인해 볼 수 없는 인간의 눈을 열어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세 번째로 그 능력은 정결하고 진실하며 의로와서 인간을 심판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꿀과 송이꿀보다 더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에 말씀은 우리가 위험에 대처할 수 있도록 경고음성으로 들려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큰 상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7-11절)”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